[오늘의 큐레이션] 나는 무엇이 되려 하나

조회수 2018. 9. 9. 17:24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유발 하라리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은 유발 하라리의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골라봤습니다.


원제는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입니다. 한글 번역본과 동시 출간됐습니다.


21세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유전공학 분야의 벅찬 기술적 도전, 무한성장 경쟁에 따른 생태학적 도전, 자유민주주의의 신뢰 위기와 민족주의의 고조, 디지털 독재의 위협 같은 정치적 도전을 맞아 우리 앞에는 어떤 위험과 희망이 잠복해 있는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비할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중 '19장 교육: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다'에서 발췌했습니다.

단절성이야말로 삶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된다. 태곳적부터 인생은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부분으로 나뉘었다. 배우는 시기와 그다음 일하는 시기다. 인생의 전반부에는 정보를 축적하고 기량을 연마하며 세계관을 구축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비록 15세 때 하루의 대부분을 (정규 학교가 아니라) 가족의 논에서 일을 하며 보냈어도,이때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학습이었다. 일하는 중에 쌀을 경작하는 법과, 대도시의 탐욕스런 쌀 상인과 흥정하는 법,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과 땅과 물 분쟁을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다음 인생 후반부에는 그동안 축적한 기량을 활용해 세상을 헤쳐 나가고, 생계를 꾸리며, 사회에 기여했다. 물론 50세가 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쌀과 상인과 분쟁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배웠지만, 이미 잘 연마된 능력에 약간의 조정을 더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이 되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데다 수명까지 길어지면서 전통적인 모델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서로 다른 기간들 사이에 연속성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전에 없이 다급하고 복잡한 질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 과정은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는 거의 늘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어떤 나이가 지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예 변화를 싫어한다. 15세 때만 해도 삶 전체가 변화다. 몸도 자라고 정신도 발달하고 인간관계도 깊어진다.


이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모든 것이 새롭다. 누구나 자신을 발명하느라 분주한 시기다. 대다수 10대는 이 시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흥미진진하다.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펼쳐지고, 온 세상이 나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50세가 되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 정복 같은 것은 포기한 상태다. 거기도 가봤고, 그것도 해봤고, 그곳 기념 티셔츠도 갖고 있다. 그러니 안정을 훨씬 더 선호할 밖에.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자신의 기량과 경력, 정체성, 세계관에 쏟아 부은 상태여서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쌓는 데 열심이었을수록 그것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가 어렵다. 여전히 새로운 경험과 약간의 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50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의 심층 구조를 뜯어고치는 데 소극적이다.


여기에는 신경학적 이유가 있다. 성인의 뇌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탄력적이고 변덕스럽다 해도 10대에 비하면 가소성이 훨씬 낮다. 이들로서는 뉴런을 재연결하고 시냅스를 재배선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안정을 누릴 만한 여유가 거의 없다. 어떤 안정된 정체성이나 일, 세계관을 고집하려 들다가는, 세계는 휙 지나가고 자신은 뒤로 처지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게다가 기대수명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후로도 수십 년을 멍청한 화석 상태로 보내야 할 수 있다. 앞으로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려면—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50세 정도의 젊은 나이라면 확실히 그래야만 한다.


늘 낯선 것이 새로운 기본new normal이 되면서, 개인의 과거 경험은 물론 인류 전체가 겪은 지난 경험까지 미래의 안내자로 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인간은 개인으로나 인류 전체로나 이전에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처해야 한다.


가령 초지능 기계와 공학적으로 설계된 신체,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감정을 조정할 수 있는 알고리즘, 신속하게 조절되는 인공 기후 변동, 10년마다 직업을 바꿔야 할 필요성 같은 것들이다.

이런 전적인 미증유의 상황을 맞아 과연 무엇을 해야 옳을까? 막대한 양의 정보는 홍수처럼 밀려 드는데 도무지 그것들을 흡수하고 분석할 방법은 없는 지금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심대한 불확실성이 일시적 결함이 아니라 항구적인 특성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세계에서도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적 균형감이 필요할 것이다. 반복해서 지금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중에서도 어떤 것은 버리고, 그전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아이들에게 미지의 것을 포용하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물리학 방정식이나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가르치는 것보 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책 한 권을 읽거나 강의 한 번 듣는 것으로 회복탄력성을 배울 수는 없다. 대개는 교사 자신들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정신적 탄력성을 갖고 있지 못할 때가 많다. 이들도 옛날식 교육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우리는 교육에서도 생산라인 이론을 물려받았다. 마을 중간에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데, 그 안은 똑같이 생긴 수많은 방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방에는 책걸상이 줄지어 놓여 있다.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 30명과 함께 이 교실들 중 한 곳으로 간다.


매시간 어떤 어른이 교실로 걸어 들어와서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들은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는다. 그들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 명은 인류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세 번째 사람은 인간의 신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런 교육 모델을 비웃기는 쉽다. 그리고 이 모델이 과거에는 성취가 어떠했든 이제는 파산했다는 데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쓸 만한 대안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교외 부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멕시코 농촌 지역에서도 실행할 수 있을 만큼 확장 가능한 교육 모델은 분명히 없다.


따라서 멕시코나 인도, 앨라배마 어느 동네의 구식 학교에 묶여 있는 15세 소년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이것이다. “어른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라.” 대부분은 나름 선의를 갖고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어른들 자신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어른 말을 따르는 편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세상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세계는 천천히 변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를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른들의 말이 시간을 초월한 지혜인지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한지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신 무엇에 의존해야 할까? 혹시 기술에 의존해야 할까? 그것은 훨씬 위험한 도박이다. 물론 기술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이 삶 속에서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면, 인간 자신이 기술의 의제에 인질이 될 수 있다.


수천 년 전 인간은 농업을 발명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소수의 엘리트만 부유하게 했다. 인간의 다수는 노예로 만들었다. 대다수 사람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뙤약볕 아래에서 잡초를 뽑고 물동이를 나르고 옥수수를 수확하며 일을 해야 했다. 이는 앞으로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됨에 따라, 기술이 나에게 봉사하기보다 내가 기술에 봉사하게 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붙인 채 길을 오가는 좀비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기술을 통제하는 걸까? 기술이 그들을 통제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의존해야 할까? 그런 말은 〈세서미 스트리 트Sesame Street〉(미국의 유아용 티브이 프로그램 — 옮긴이)나 구식 디즈니 영화에서라면 멋진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디즈니조차 그런 사실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라일리 앤더슨(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대다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수록 외부 조작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 우리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언제나 국가 선전, 아니면 이념적 세뇌, 상업 광고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생화학적인 결함도 포함된다.


앞으로 생명기술과 기계 학습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심층 감정과 욕망까지 조작하기가 점점 쉬워질 것이고,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따르는 일도 점점 위험해질 것이다. 코카콜라나 아마존, 바이두 혹은 정부가 우리의 가슴에 연결된 조종끈을 당기고 뇌의 버튼을 누르는 법을 아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 자신의 목소리이고 어떤 것이 시장 전문가가 주입한 내용인지 식별할 수 있을까?


그런 막중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우리 자신의 운영 체계를 더 잘 알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책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교훈이다. 너 자신을 알라.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라고 촉구했다.


이 조언은 21세기에 와서 더없이 다급한 것이 되었다. 노자나 소크라테스 시대와 달리 지금 우리 앞에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와 아마존, 바이두, 정부 모두 우리를 해킹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이들의 해킹 대상은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은행 계좌도 아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유기적 운영 체계를 해킹하는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빅데이터와 기계 학습을 통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점점 더 잘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 알고리즘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게 되면 우리를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지만, 거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매트릭스〉 혹은 〈트루먼 쇼〉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결국 단순히 경험적으로 판가름날 문제다.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더 잘 이해하면 자연히 권위는 그리로 이동할 것이다.


물론 모든 권위를 알고리즘에 넘기고 우리와 나머지 세계를 위한 결정을 믿고 맡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긴장을 풀고 질주를 즐기면 된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맡아서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다면 알고리즘보다, 아마존보다, 정부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들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빠르게 달리려면 짐이 많아서는 곤란하다. 갖고 있던 모든 환상들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그 환상들은 너무나 무겁다.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