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사소한 희망

조회수 2018. 8. 13. 09: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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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별세한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의 말과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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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은 지난 8일 세상을 떠난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의 글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그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재수록된 글과,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최한 대중 강좌를 모아서 펴낸 책 <선배 수업>과 플라톤 아카데미가 기획한 강연집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각각 수록된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소작농이 수확의 7할을 지대로 내놓아야 했던 것도 당신의 사정이고, 없던 도로가 뚫려 한 마을이 두 마을로 나뉘어 살아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며, 그 끔찍했던 입시 공부를 자식에게 다시 강요해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의 전영주: 편집자)는 당신의 쓰고 있는 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실은 비단 글쓰기에만 한정된 진실이 아닐 것 같다. 어디에 좋은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를 당신의 사소한 사정에 비추어 마련하고 바꾸어가는 문화일 것이다. 문제는 결국 유연성인데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무협영화 한 편만을 보더라도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


<밤이 선생이다>의 '당신의 사소한 사정'(2002) 중에서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과학 이론, 철학 이론 등 온갖 이론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론들은 다양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농민들의 사정, 공무원들이 무시해버린 그 사정을 대변해줄 말은 없습니다. 문학이 바로 그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농민들은 법도 안 지키는 무지렁이라고 말할 때 문학은 그 농민들의 사정을 대신 이야기합니다. 철학도, 법률도, 경제학도 하지 않는 말을 시와 소설이 해주는 것이지요. 저는 거대 이론들에 맞서서 개인들의 사소한 사정을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발전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니 사회적인 성격을 띤 문제들은 사회가 발전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내부에는 어떤 경우에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문제가 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문학이 사람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지극히 사소한 사정들을 대신 이야기해주고 표현해주듯이,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는 일에 관해서는 온갖 방식의 말하는 법과 형식, 표현법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든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억압되고 감춰져 있는 그것,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그것들은 여전히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개인의 사소한 사정은 더더욱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연대도 가능하고 협력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문제는,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불가능하고 협력도 어렵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다리를 놓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표현할 말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세계를 개발하고 또 그것들을 전파할 수 있도록 약속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그리고 그 문학의 전위가 바로 시이며, 시가 바로 그 일을 합니다. (중략)


말을 표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만들고 함축성을 부여하고, 그러면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미학적인 힘을 갖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시가 우리에게 와서 언어가 되어 나타나는 과정이 실제로 인간의 자유, 정책의 자유, 마음의 자유, 믿음의 자유, 또 자기 안의 능력을 펼쳐내는 자유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직접적으로 자유를 말해서가 아니라 시가 써지는 방식 자체가 우리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시와 타자의 목소리'(2014) 중에서


제가 시에 대해 그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란 우리에게 '끝까지 희망하게 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말이 곧 시의 말이죠. 시는 어떤 행복의 개념을 만들고(이때 행복이라는 건 잘 먹고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조화와 조화로운 삶이 있는 세계죠), 그 행복의 세계를 꿈꾸면서 동시에 언어적으로 그 세계의 모습을 실현시킵니다. 그게 바로 미학적 실현이죠.


그 세계에 대한 설계도를 직접 만든다거나 그 행복에 이르는 운동에 매달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세계의 한 조각을 미학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그 세계가 있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세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그게 시라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긴 실천은 포기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지요. (중략)


시라는 것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한 장치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말은 또 다른 의미로 포기의 장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는 세상의 모든 말을 다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고, 세상을 모두 다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의 약속만은 제안합니다. 그 약속만은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고 또다시 확인하고... 결국 그렇게 해서 시가 희망의 끈을 계속 붙잡고 있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파라다이스란, 그 자체로 행복한 곳이 아니라 그 파라다이스에 대한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략)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질서와 조화와 균형을 갖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런 걸 전혀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돈을 벌거나 권력을 갖는 걸 떠나서 이 세상이 좋은 사회로 바뀌는 것(비록 자신이 그 사회에 못 살더라도 내 자식이나 손주들이 그런 사회에 살기를 바라면서), 그런 사회가 실현된다는 희망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확연하게 갈려 있죠. 아마도 이게 깊은 정치적 갈등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면 사람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 앞에서의 나를 생각하니까 겸손해지는 거죠. 그래서 그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긍지와 자신감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도덕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도 그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모든 인의의 근본이라고. 사랑이라는 게 결국은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좋은 사회, 행복한 사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고 타인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선배 수업>의 '자기를 비우는 노년, 좋은 사회의 희망에 대한 약속'(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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