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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인생의 값은 얼마인가

인류학자 마르셀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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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은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셀 에나프(Marcel Henaff, 1942-2018)<진리의 가격>에서 골라봤습니다.


2002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책으로 최근 국내에 번역돼 나왔습니다.


저자는 프랑스 태생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파리국제철학대학과 미국 UC 샌디에이고 교수를 지냈으며 지난 6월 작고했습니다.


진리는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에서 출발, 화폐를 매개로 한 상업적 관계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묻고, 또다른 방식의 관계인 증여(giving)의 다양한 전통을 탐색합니다.


시장의 교환과 구분되는 증여는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하며, 이런 인정이야말로 사회 결속의 기초이자 도덕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근대인이 고대인보다 특벽히 더 돈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는 모든 종류의 재화에 대해 상업적 등가성을 추구하려는 잠재적 경향이(나아가 시도가) 존재한다. 시장이 사회 전체와 동일하도록 범주가 확장되어 활동, 지위, 프로젝트를 모두 포괄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윤리 문제가 놓인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어떤 '재화'는 상업적 가치로 평가될 수 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가? (중략)


화폐가 필요 이상으로 축적될 뿐 아니라 모든 한계를 넘어서 축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왜냐하면 화폐는 어떤 종류의 가능성(물건, 행위, 개입, 투자, 생산, 쾌락, 관계, 영향력)도 나타낼 수 있는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폐는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재빠르다. 화폐는 결코 물리지 않는 가상 세계를 제공한다. 다른 모든 필요와 욕망은 충족에 의해 한계를 가지지만, 화폐의 축적은 대조적으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 계속된다.


다른 말로 하면, 화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이다('한계'란 소비 행위 속에서 수요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어떤 재화도 더 찾게 되지 않는 지점이다). 화폐는 유일하게 이런 특성을 갖는 재화이다. 한계의 부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매혹했으며, 그는 화폐를 이해할 수 없고 괴물 같은 무언가로 여겼다.


이것이 화폐에 내재된 위험이다. 이 위험은 새롭지 않다. 그것은 가치의 기호로서의 화폐 권력, 그리고 평가 교환, 저장, 투자의 도구로서의 화폐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것은 상업 영역의 엄청난 성장과 주식시장 시스템에 힘입은 금융적 조작의 발전이다. 이제 그것은 일개 활동 영역의 수준을 벗어나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화폐는 제한적으로만 개입하지 않고 어디나 나타난다.


우리는 화폐로 산업사회의 성원권을 산다. 산업사회에서는 (주거, 통신, 교통, 여가 등 시장에 의존하는 모든 것과 관련된) 물질적 재화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만이 정당성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런 재화를 살 수 없는 사람은 기능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배제된다. (중략)

상업적 관계는 참여자 간의 상호 인정이 필요치 않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재화들을 교환하기로 수락하면 그만이다. 교환되는 모든 재화를 인정의 요구로 간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교환도 인정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 견디기 어렵다. 공정함이라는 잣대에 의해 지배되는 유용한 교환의 영역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증여와 상업적 교환을 언제나 대립시켜 왔다면 이는 증여가 값을 따질 수 없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올바른 직관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이 초월성이 주어진 물건과 관련되기보다는 그 물건이 상징하는 것(인정, 명예, 존경)과 관련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의례 절차와 공동체의 지역적 테두리 바깥에서 이런 요구를 정당화하는 것은 얼굴의 수수께끼가 드러내는 요청, 즉 얼굴의 절대적인 존엄뿐이다.


그러므로 이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고, 나아가 파괴하지 않고 상업적 관계에 종속될 수 없는 물건들을 '가격의 바깥에 있다'거나 '양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이 존엄성은 부패, 굴욕, 착취를 절대적으로 비난하는 최후의 근거이다.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이런 존엄성에 대한 적극적 부인은 인정의 가능성이 사라진 세계, 더는 무엇도 인정의 상징이나 매개가 될 수 없는 세계를 초래한다.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죽음의 수용소와 같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경험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죽었다. 또는 그들이 목격하거나 직접 겪은 고통 속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인간성을 스스로 땅에 파묻었다." 희생자들은 도살자들의 반대편에서, 하지만 어떤 대칭성도 없이, 똑같이 비인간화된다. 그런 절대적 경멸 속에서 타락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레비에게서 대답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침묵하는 한 인간, 로렌초의 대답이었다. 로렌초에 대해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은 일을 겪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왜 살아남은 사람이 하필 나였는지 설명하는 게 의미 있다면 나는 그것이 로렌초 덕택이었다고 말하겠다. 그가 있었기에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 바깥에 아직 정의로운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단순하고 편안한 선량함으로, 증오와 공포에 물들지 않고 타락과 야만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하고 정직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선의 아득한 가능성처럼,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존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 내가 나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을 잊지 않은 것은 로렌초 덕택이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같은 상태가 아니라도, 경멸이나 오만이나 무관심에 의해, 친절은 물론이고 단순한 존중의 요구조차 거부되는 상황에는 언제나 이런 망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아주 깨끗하고 평화롭고 안락하고 안전한 세계 역시 비인간적일 수 있다.


고달픈 생계 활동의 한가운데에서 어떤 만남의 공간이 열리고, 거기서 서로를 이 활동과는 완전히 별개로, 사회적 운명이 각자에게 씌운 형상과는 무한히 다른 존재로 인정할 수 있을 때, 공동체이고자 하는 모든 집단은 이러한 존엄을 약속처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느낀다. 사람들은 단지 존재한다는 함께 경험하려고 이 공간을 찾는다.


카슨 매컬러스는 대공황 시기 미국 남부의 한 촌락을 묘사하면서 이 점을 잘 표현했다. "마을 자체는 황량했다. 방적공장과 노동자들이 사는 방 두 개짜리 주택들,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 색유리창을 단 교회, 그리고 고작 100미터도 안 되는 초라한 중심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토요일마다 인근의 농장주들이 잡담을 나누고 거래를 하러 모여들었다. 그때 말고는 세계의 다른 모든 장소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외딴곳, 쓸쓸하고 서글픈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운명과 우여곡절, 사랑과 고통이 있다. 한 여인이 읍내에 나타난다. 그녀는 미스 아멜리아라고 불리며, 부지런하고 과묵하다. 그녀는 카페를 연다. 그리고 어떤 변화가 생겨난다. 밤이 되면 모든 불빛이 꺼지고 집들이 차갑게 변하지만, 카페의 불은 켜져 있고 따뜻한 온기도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카페 안에 다른 이들이 있으리라는 것과 카페가 바로 그 순간에도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곳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함께 음료수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다른 사람과의 동석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다.

미스 아멜리아는 창문에 붉은 커튼을 달고 행상에게서 진짜처럼 보이는 종이 장미를 샀다. 하지만 그 카페가 그처럼 특별해지고 그 도시의 주민들에게 소중해진 것은 따뜻함과 명랑함, 다채로운 장식 덕택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때까지 그 고장 사람들이 몰랐던 어떤 자부심과 관련된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이 완전히 새로운 자부심을 이해하려면 가치가 사라진 인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적공장이 하나 생기면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그런데 모든 가족이 충분한 양식과 의복, 축제를 위한 여윳돈 등을 갖는 일은 드물다. 따라서 인생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긴 여정이 된다. 모든 것이 그래서 복잡해진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건들은 모두 귀중한 가치가 있고, 모두 돈으로 사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면화 한 보따리나 당밀 한 컵의 값은 물어보지 않고도 알지만, 인생의 가치는 정확히 모른다. 인생은 값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우리에게 주어졌다. 인생의 가격은 얼마인가? 주위를 둘러보라 인생은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타인은 노력하고 땀 흘리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을 발견하고서는, 자신이 별 가치가 없다는 느낌이 영혼 깊은 곳에서 싹트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 카페가 그 도시에 가져다준 완전히 새로운 자부심은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아이들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 그들은 훌륭하게 처신했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카페에 들어갈 때 그들은 동일한 자부심을 느꼈다. 미스 아멜리아의 가게에 가기 전에 그들은 몸단장을 하고 문간에서 예의 바르게 신발을 털었다. 몇 시간 동안 그들은 이 세계에서 자신이 대단한 가치가 없다는 이 깊고 쓰디쓴 감정을 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만남을 즐기고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아고라와도 같은 이곳에서, 낡고 해진 사교의 직물은 다시 짜인다. 동시에 예의와 거의 의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손한 대화들이 새롭게 태어나며, 다른 이와 함께 있다는 행복감도 따라온다.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존엄성은 우리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뜻임에 분명하다. 이런 것들이 다름 아닌 삶 그 자체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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