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자유의지는 착각일까

조회수 2018. 7. 10. 10: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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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셔머의 신간 '도덕의 궤적'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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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최근에 번역 출간된 미국의 과학자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에서 골라봤습니다.


원제는 The Moral Arc: How Science Makes Us Better People입니다. 2015년 출간됐습니다.


셔머는 이 책에서 인류는 이성과 과학에 힘입어 진리와 정의, 자유가 확대되는 쪽으로 진보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인간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도 개선되는 쪽으로 진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낙관합니다.


도덕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쟁점으로 떠오르는 문제가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개인의 행동을 칭찬 혹은 비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결정임을 전제로 합니다.


근대 과학이 출현한 이래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뜨거운 쟁점이었습니다. 과학은 세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충돌하는 듯 보입니다.


둘은 양립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과학을 토대로 신화와 미신, 허구를 비판하는 '회의주의' 운동을 주도해 온 셔머는 인지과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해명을 시도합니다.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도덕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최근에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수많은 맛있는 음식을 제안하는 메뉴판을 보며 저녁을 주문할 때였다.


욕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뇌의 진화한 신경망들은-잘 익은 과일과 고기처럼-달고 기름진 음식, 다시 말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의 환경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영양가 있는 음식들에 대한 갈급을 만들어낸다. 자연선택은 지방과 당분을 원하도록 우리 뇌를 설계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비만과 당뇨병 문제를 초래했다. 이런 원초적 갈망은 우리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높은 적응도 신호(지위와 매력을 과시하는 신호)로 통하는 체격에 신경 쓰게 만들도록 진화된 다른 신경망의 신호들과 경쟁한다.

이러한 선택을 자유의지라 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는 없다>의 샘 해리스는 '자유의지는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의지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배경 원인들에서 나오고, 우리는 그러한 원인들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진화한 입맛에서부터, 사회적 지위에 대한 학습된 관심에 이르기까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힘과 조건들이 메뉴 선택에 이르는 인과적 연쇄의 모든 단계를 통제한다. 내 조상과 부모, 문화와 사회, 또래 집단과 친구, 멘토와 스승이 인과적 연쇄의 경로를 정한다. 이러한 역사적 우연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먼 과거에 시작되었다.

'내 안의 나'와 결정론의 악마


인과의 연쇄는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어떻게 보면, 빅뱅으로 공간과 시간, 물질과 에너지가 창조된, 우주의 탄생이 그 시작일 것이다. 결정론의 원리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모든 원인을 알면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생길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내 선택은 인과적 연쇄의 어디쯤에 들어갈까?


뇌 안에서 레버를 당기는 작은 인간, 호문쿨루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내 안의 작은 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작은 뇌 역시 큰 뇌처럼 결정론적이고, 따라서 작은 내가 자유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작은 나의 내부에서 결정을 내리는 더 작은 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작은 나의 뇌 안에는 다시 더더욱 작은 내가 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당신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영혼은 당신에게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영혼이 당신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내 안의 나'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는 것은 영혼 안에서 행동을 지시하는 작은 영혼이 있음을 뜻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할 수 있다. 말할 나위 없이, 뇌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호문쿨루스, 내 안의 나, 작은 영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과학이 출현해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들에 주목하면서 결정론은 신뢰를 얻었다. 결과와 원인을 연결하는 사슬은 훨씬 더 공고해졌다. 결정된 우주의 복잡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원인-결과-원인-결과-원인-결과로 연결되는 선형적 도식을 쓰는 대신, 과거를 통과해 미래로 이어지는 결과들과 연결되는 원인들의 네트워크인 훨씬 폭 넓은 인과의 그물을 던져야 한다. 이 그물은 수많은 매개 변수들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무수한 요인들을 아우른다.


이런 인과의 그물은 현상들, 과거-현재-미래, 우주 전체, 원자에서부터 분자, 세포, 유기체, 사람, 행성, 항성, 관찰 가능한 우주 끝까지 펼쳐져 있는 은하들을 포함한다. 사실, 우주가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은 과거를 설명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려고 시도하는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설득력 있는 실험들이 인간 행동에서 결정론적 교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1985년에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이 일련의 유명한 실험들을 실시했다. 그는 피험자들에게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때나 내킬 때마다 버튼을 누르도록 하고, 그동안 그들의 뇌파를 판독했다. 그 결과,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몇 초 전에 뇌의 운동 피질이 활성화되었다.


신경과학자 존-딜런 헤인스는 2011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fMRI 기술을 이용했다. 그는 뇌 스캐너 안에 있는 피험자에게 무작위로 나타나는 일련의 영문 철자들을 보면서 아무 때나 두 버튼 중 하나를 누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스크린에 어떤 철자가 떴는지 말하도록 했다.


그 결과, 뇌가 활성화되는 시점과 '선택'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지점 사이에 수초의 시간 간격이 있었고, 어떤 경우는 그 간격이 7초나 되었다. 헤인스의 결론은 이렇다. "리벳과 우리의 연구 결과들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사전에 일어나는 뇌 활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므로 우리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는, 자유의지에 관한 대중 심리학의 순진한 직관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연구들에서-그리고 시초가 된 리벳의 연구를 보강하는 많은 다른 연구들에서-신경과학자들은 뇌 활성을 측정함으로써 피험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본인이 알기 전에 알아냈다. 앞에서 제시한 레스토랑 사례에서 만일 내가 뇌파 측정기를 달고 메뉴판을 익는 동안 신경과학자들이 내 뇌파를 측정했다면, 그들은 내가 어떤 메뉴를 고를지 의식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웨이터에게 주문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소름 돋는 일이다.


이러한 결과들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자유가 있다고 느끼지만, 우리의 의식이 그렇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의식은 선택을 내린 의식 하부에서 입력되는 신호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된 세계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을 보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역설을 해결할 방법이 적어도 네 가지가 있다.

마음의 모듈성


뇌의 무의식적인 영역이 의식적인 영역으로 무슨 결정이 내려졌는지 통보하므로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의심스러운 신경과학적 해석일 뿐이다. 내 뇌의 피질하영역이 피질 영역에 신호를 보내 어떤 한 선택을 통지한다 해도, 결정을 내리는 것이 내 뇌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뇌의 어느 영역이 선택을 내리든,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여전히 나-자유의지와 자기 결정권을 지닌 존재-이다.


구획화되어 있는 뇌 기능들이 서로 협력하거나 갈등을 빚는다는 개념은 1990년대 이래로 진화심리학의 핵심을 이루었다. <왜 모든 사람은 (나만 빼고) 위선자인가>에서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커즈번은 어떻게 뇌가 모듈별로 문제를 해결하는 멀티태스킹 기관으로 진화했는지 보여준다. 모듈화된 우리 뇌는 오래된 은유로 말하면 다양한 앱을 장착한 아이폰인 셈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의식적인 선택을 내리는 존재, 다시 말해 내 안에서 아무런 충돌 없이 일사불란하고 일관된 믿음을 발생시키는 통일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 뇌는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반목하는 모듈들의 집합체이며, 의사결정 과정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마치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부터 선택이 내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메뉴를 선택하는 내 사례에서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달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는 모듈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체형과 건강을 감독하는 모듈이 충돌을 빚는다. 도덕적 딜레마에 처한 경우는, 협력을 추구하는 모듈이 경쟁을 추구하는 모델과 이따금씩 충돌한다. 마찬가지로, 이 타성을 추구하는 모듈과 탐욕을 추구하는 모듈, 진실을 추구하는 모듈과 거짓말을 추구하는 모듈도 서로 충돌한다.


마음을 모듈로 보는 관점은 도덕적 위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선택 실험들에 대한 신경과학의 결정론적 해석에서 자유롭다. 뇌신경에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로를 아는 지금, 우리는 심리 모델에 자유의지를 되돌려놓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내 안의 나'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모두는 자기만의 선호를 갖고 서로 경쟁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의 뇌 안에 있다.

하지 않을 자유 '자유거부의지'


자유의지를 '그렇게 하지 않는 힘'으로 정의한다면, '자유의지'는 곧 '자유거부의지'-마음에서 일어나는 충동들 가운데 이것을 거부하고 저것을 선택하는 힘-가 된다. 자유거부의지는 무의식적인 신경망에서 비롯되는 특정 행동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고, 따라서 저 방식 대신 이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하는 것은 모두 선택이다.


앞의 사례에서, 나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도 있었지만 내게 상반되는 다른 충돌(건강과 배 둘레)을 상기시키는 자기 제어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하나의 선택지를 거부하고 다른 것을 선택했다. 이것이 자유거부의지다. 물론 우리는 한계가 있고 선택한 대로 모두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거부할 힘이 있다.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있으며, 저렇게 하는 대신 이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택이다.


자유 선택은 결정론적 인과망의 일부


어떤 원인들의 집합도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인자를 완벽하게 아우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원인들을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 '조건적'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실용적이라는 것이 결정론적 인과망 이론이 인간의 자유에 대해 가지는 입장이다. 인과망의 광대함, 복잡함, 궁극적인 불가지성은 마치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착각만은 아니다. 우리가 자유거부의지 덕에 무의식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욕구를 제압하기로 선택하듯이 우리의 선택은 신경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 조상들은 진화적 과거에 생존과 번식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의 행동을 선택했고, 이는 행동을 선택하는 신경 구조의 진화로 이어졌다.


이런 형태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탐구한 사람이 철학자 대니얼 대닛이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에게 작용한 진화적 압력이 자유의지를 유발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열려 있는 많고 다양한 행동 경로들 각각의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그리고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피질을 서서히 진화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는 진화한다Freedom Evolves>에서 대닛은 자유의지는 인간의 많은 인지적 특징들에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나는 대형 유인원과 해양 포유류 같은 다른 종들도 이러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타인들도 그렇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이러한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상징적 언어', 수많은 신경 자극들로부터 많은 행동 옵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복잡한 신경회로', 타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이론', 옳고 그른 선택을 판단하는 '진화한 도덕 감정들'이 그런 인지적 특징들에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복잡한 생각들을 주고받을 수 있으므로 이 모든 도덕적 선택에 대해 서로 토론할 수 있다. 이러한 인지적 특징들에서 자유의지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러한 특징들 덕분에 특정 순간에 우리에게 열려 있는 많은 행동 경로들의 결과를 평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알고, 그러므로 그러한 선택에 대해 우리자신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도덕적 자유는 정도의 문제


결정론 안에서 자유의지를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은 '자유를 정도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생물의 복잡성에 따라, 그리고 그 생물에 작용하는 매개 변수의 수에 따라 선택의 폭이 달라진다. 예컨대 곤충은 자유가 매우 적어서, 주로 고정된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파충류와 조류는 결정적 시기들에 환경 신호를 받아 발휘되는 가변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살면서 겪는 경험에 따라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학습된 반응을 할 수 있으므로 보다 큰 자유를 가진다. 포유류, 특히 대형 유인원은 신경 가소성과 학습 능력이 매우 높아서 훨씬 더 높은 등급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인간은 피질의 규모와 고도로 발달된 문화 덕분에 가장 높은 등급의 자유를 가진다.


우리 종내에서도 어떤 사람들-사이코패스, 뇌가 손상된 사람, 심각한 우울증 환자, 화학물질에 중독된 사람-은 남들보다 낮은 등급의 자유를 갖고, 법은 이런 사람들의 사법적, 도덕적 책임 능력을 감안해 형량을 조정한다. 그렇다 해도 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선택을 통제할 수 있는가, 그중에서도 범죄 충동을 어느 정도까지 거부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일정한 책임을 묻는다.


신경과학자들이 뇌의 블랙박스를 열어 내부 기제를 밝혀낼수록, 도덕적 책임을 범주가 아니라 연속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사람들을 멀쩡한 사람 대 정신이상자, 정상 대 비정상, 법을 준수하는 시민 대 범죄자로 구분하는 대신 차등적 연속체 위에 놓아야 한다. 사회과학자들도 멀쩡한 정신과 정신 이상 같은 내적 상태에 대해 생각할 때 연속체에 올려놓고 생각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의 행동 체계 내에 있을 수 있는 자유의 정도를 참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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