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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분노에 굴복하지 마세요

조회수 2018. 6. 25. 17: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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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에 관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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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신간 <분노와 용서>에서 골라봤습니다.


원제목은 Anger and Forgiveness: Resentment, Generosity, Justice입니다. 2016년 4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저자는 서양고전학을 공부하고 고전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법철학, 도덕철학, 고전학, 여성학 등 인문학 전반에 걸쳐 연구와 저술, 강연 활동을 해왔습니다. 하버드대와 브라운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대 시카고대 종신교수로 있습니다.


그동안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석학입니다. 이번 책은 2014년 옥스퍼드대학교의 존 로크 강연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류가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고민해온 분노와 용서의 문제를 개인과 사회, 법제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심도 있게 재조명합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분노의 본질이 복수와 관련되어 있다며 경계합니다. 용서에 대해서도, 가해자가 자신을 격하시키는 대가로 용서를 베푸는 거래적·교환적 태도는 모든 문제를 서열과 상대적 지위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자아도취적 분노 및 보복과 맥을 같이한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사회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지향적 태도라면서, 피해가 발생했을 때 누가 더 잘못을 많이 했는지 따져 빌며 자비를 청하는 거래적 용서를 하기보다 피해사실이 있었음을 공인하고, 최대한 그 피해를 복구하며, 다시는 그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미래지향적 태도를 제안합니다.


결론 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분노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다른 문제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현대인에게는 건강과 교육에는 굳세게 개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노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걸까요? 어째서 우리는 의학적 경제적 연구에는 공적으로 정치적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노라는 사회적 질병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가능성 높은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분노하는 성향을 인간의 천성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러한 믿음이 과장된 것임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물론 분노에는 진화적 기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다이어트나 운동에 대해 했던 말을 여기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부당한 욕망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꼭 품어야만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우리 인생이 비-분노를 통해 무척 나아진 다음에는, 온갖 갈등으로 갈가리 찢긴 과거의 나날이 전혀 그립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감자튀김이나 도넛에 대한 갑작스러운 열망 정도로는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요. 설령 분노를 계속 경험하게 된다 할지라도 규범적 차원에서 분노가 시도하는 오류투성이 설득에 근거하여 정책을 만들 필요는 없어질 테고요.


비-분노의 추구를 꺼리는 문화적 경향의 두 번째 이유는 비-분노에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이며 사랑이라고는 깃들어있지 않은 거리 두기가 포함된다는 믿음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분노에 대한 추구에 이런 매력적이지 않은 목표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비-분노는 우리가 깊은 사랑과 우정, (예를 들면 대의나 특정 계획에 대한) 다른 방식의 헌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런 사랑에 수반되는 슬픔과 공포에의 취약성도 유지하게 해줍니다. 비-분노에 실패하는 경우가 자주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가 보통 비-분노에 대한 추구를 수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문제에 대처하는 문화가 깊이 분열되어 있음에도, 수많은 현대인이 분노를 좋은 것, 강력한 것, 남자다운 것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특히 남자)아이들에게서 분노를 부추기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분노에 방종하게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분노가 가지고 있다는 선에 근거한 사법정책을 독려합니다. 반면 그리스 로마인들은 분노를 북돋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도 엄청나게 화를 내기는 했지만, 또 분노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지 그냥 엄청나게 절제되는 선에서 그쳐야 하는지를 놓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분노를 질병이자 약점으로 보았으며 분노하는 사람은 강한(그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남성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유치한(그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여성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일단 이런 통찰에 이르면 반은 이긴 겁니다. 자기계발은 원래도 어렵지만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 책에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저는 그 성과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재교육의 시발점이 되기를 원합니다. 독자들이 분노의 비합리성과 어리석음을 명백히 보도록 하는 것이죠. 다음 단계를 밟아갈 것인지는 독자들 자신이 선택할 몫입니다. 저도 제가 처방한 약을 항상 먹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항공사나 은행, 인터넷 수리기사들의 세계가 합리적으로 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굴복하고, (예상 그대로이지만) 현실세계가 기대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에는 분노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어리석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열심히 노력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런 노력을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응보주의적 정신이라는 어리석음을 수용하고 안정적으로 적용하는 정치적 법적 제도를 참아주거나 심지어 부추기는 행동은 간단히 말해 변명의 가치가 없는 행위로 보입니다.


우리의 제도는 최악이 아니라 최선을 전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린아이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의 제도는 성숙함의 전형적인 예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개별적인 사람들이 모두 사적으로는 계속해서 비합리적인 응보주의를 어느 정도 따른다 할지라도, 법과 정의의 제도 안에서는 어리석음을 관용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범죄문제에 사람들이 보통 경제 건설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즉 가치 있는 목표나 그 목표와 합리적으로 연결된 사후적 전략은 물론,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략 또한 요구되는 대단히 까다롭고 다면적인 지적 실제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현대사회를 (상상 속) 옛 서부시대를 향해 마구 산탄을 쏘아대는 교전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부시대도 사실 전혀 그런 식은 아니었고,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대로였다면 그리 살기 좋은 시대가 아니었죠.


더 나아가, 엄청난 불의가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유지하고 무절제한 행위의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의에는 저항을 통해서, 그리고 신중하고도 용감한 전략적 행위를 통해서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를 언제나 시야 내에 두고 있어야겠죠. 킹 목사가 매우 간단하게 말한 목표, 그러니까 "남자들과 여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과 통제력, 아량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 정신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필로프로수네philophrosune, 로마어로는 후마니타스humnitas, 성경에 따르면 아가페agape, 아프리카어로는 우분투ubuntu라 합니다. 나쁜 것에 집착하며 지겹도록 지껄이기보다는 좋은 점을 보고 추구하는 인내심 있고 관대한 입장입니다.


보복적 정신으로 조직된 온갖 어리석은 짓이 수백 년간, 그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이 시점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한마디 있습니다. 여러분, "평화에 기회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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