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버섯구름 솟구치던 날의 기억

조회수 2018. 3. 3. 12: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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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에서 기사회생한 한국인의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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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김형차의자서전 <운명의 턴넬>에서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에서 쌍동이 형제로 태어난 저자가 부모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겪은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되기도 하고,해방 후에는 제1기 카투사로 6.25 전쟁에 참전해 압록강 진격과 함흥철수 작전을 몸소 겪는 등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책은 1968년 5월에 처음 출간됐다가, 최근 그 기록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50년 만에 복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2차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순간 현장에 있다가 기적같이 살아남아 귀국한 한국인 두 명의 생생한 체험담이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끕니다.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협은 두고두고 이야기돼 왔지만 피폭지에서 직접 겪은 한국인의 목격담이 소개된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 세세한 묘사는 손에 잡힐 듯합니다.


북한의 핵 개발로 한반도에 핵 위험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두 사람의 회고 부분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길지만 일독을 권합니다.

히로시마(廣島) 최후(最後)의 날(1)


해방, 국토의 분단, 그리고 이북에서의 탈출, 이렇게 숨가쁜 고비를 겪는 동안 나는 수도 서울의 거리에서 뜻밖에도 반가운 친구를 하나 만났다. 그는 「히로시마」에 갔던 학병 동지 열세 사람 중 하나이던 임경규 동지로서 일본 군대 말기에 을종 간부후보생으로 오장 계급에 있던 동지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음 그간에 겪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는데, 그의 경험담 중에서 「히로시마」 최후의 날에 있었던 것을 여기 옮기기로 한다.


왜냐하면, 임 동지야말로 민규식 동지와 함께 원폭이 터진 「히로시마」 생지옥에서 무사히 살아 나온 사람이며, 따라서 그 경험은 실로 희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전쟁 사상 가장 비정한 파괴와 살인수단이었고 또 살인 무기였다고 일컬어지는 그 전대미문의 원자탄이 투하되었던 당시 「히로시마」는 과연 어떠했는가? 여기, 생생한 경험담을 공개하는 바이다.


1945년하면 우리는 누구나 감격의 8・15해방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 그해 8월 15일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던 해이며,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던 일본이 패망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간의 암흑에서 광명의 해방을 맞던 날이다.


그 8・15가 있기 아흐레 전인 8월 6일이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쾌청했었다. 일본에서는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히로시마」의 「하쿠시마(白島)」국민학교 교정엔 아침 햇살이 막 퍼지고 있었다. 주번하사관인 오장은 기간병들에게 당일 작업을 지시한 다음 자기 거실로 돌아왔다. 조반은 모두 8시 10분 전에 끝났고 작업 지시도 끝났으니 이제 자기 몫의 아침밥을 찾아 먹을 참이었다.


그의 거실은 이층 목조교사(木造校舍)의 아래층에 있었다. 평소에는 학동들의 교실이던 그곳에는 스물 남짓한 동료 하사관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군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잡담들을 나누고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습경보가 울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엔 경계경보가 먼저 울린 다음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공습경보가 울리는 법인데, 이날 아침은 어떻게 된 셈인지 경계경보 없이 곧바로 공습경보가 울려왔다.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식사를 막 시작했던 임 동지 역시 수저를 놓았다.


그래도 별일이야 있으랴 싶었다. 왜냐하면, 미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이 개시된 이래 이날까지 「히로시마」는 한 번도 그 공습을 당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피해 없이 말짱했다.


갑자기 대대장실로 오라는 호출을 받고 임 동지는 곧장 대대장실로 향했다. 그것은 목조 이 층에 있었다. 임 동지는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대대장실로 들어갔다. 거기, 주번 사관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공습에 대비한 지시가 있을 모양이었다. 임 동지는 그 앞에 서서 대대장에게 경례를 부쳤다.


그 순간 실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창밖의 하늘이 온통 시뻘겋게 되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불더미가 떨어져 목조 이 층의 병사(兵舍)를 온통 뒤덮어버린 것이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임 동지는 머리를 싸안으며 본능적으로 전신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그러자 시뻘건 불빛은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임 동지는 곧 의식을 잃어버렸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쳐들고 보니 실내는 어두웠다.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분별해 낼 수가 없었다. 맞은편 쪽 판자 벽에서부터 뿌연 태양광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먼지가그 광선 속에 뿌옇게 떠올라 보였다. 그것이 일이 분 정도 계속됐을까, 곧 먼지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태양광선만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없느냐? 누구 없어?”


공포에 가득 질린 대대장의 음성이었다. 임 동지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마주 고함을 질렀다.“여기 있습니다— 임 오장은 여기 있습니다—” 곧이어 다른 쪽에서도 인기척이 났다. 모두가 공포에 질린 음성이었다. 기상천외의 돌연한 사태 앞에 다들 무서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 심리가 똑같이 작용했기 때문에 다들 엉금엉금 기어서 한곳에 모였다. 서로 의지하고 싶었다.


실내는 훌렁 뒤집혔다. 책상이며 걸상, 그리고 다른 집물들이 엉망으로 뒤집힌 건 물론, 천정의 대들보까지 내려앉았다. 그 아수라장 속을 기어서 한곳에 모여 서로 등을 비비적대며 불안을 함께했다. 이 돌연한 사태는 무언가, 무엇이 떨어졌는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불안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우선 이곳을 탈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일단 밖으로 나가고 보자.그들은 햇빛이 희미하게 흘러들고 있는 벽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벽의 판자가 뒤틀어져 있고, 햇빛은 그 틈새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들은 발길질로 판자 쪽을 몇 개 떨어냈다. 그런 후 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비로소 자신들이 놓여 있는 상황이 이해됐다. 어떤 알지 못할 커다란 충격으로 목조 이층 병사가 통째로 비스듬히 기울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모양이었다. 무엇이 폭발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충격은 그리도 컸다. 새삼스럽게 눈앞의 변화에 전율이 느껴졌다.


아래층은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따라서 이 층의 높이는 훨씬 줄어들어 땅과의 거리는 불과 1~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었다. 담 너머 민가가 바로 눈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민가 역시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어디선가 여자의 절망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헤이다이산 히도오 다스께데 구다사이!(兵隊さん、人を助けてください,군인 아저씨들 사람 좀 살려줘요.) 히도오 다스께데 구다사이.(人を助けてください, 사람 좀 살려줘요.)”


그 애절한 소리에 다들 숙연해졌다. 그러나 어떻게 하리. 똑같은 입장인데 어떻게 그들을 구원해 줄 수가 있으랴. 임 동지와 동료들은 우선 이층의 그 벽 구멍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여간 내려가고 볼 일이었다. 땅바닥에 내려서고 보니 임 동지의 머리에서는 타박상으로 피가 흘렀다.


우선 헝겊으로 머리를 싸매었다. 또 다른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납작하게 찌그러진 채 이 층 교사의 전 무게로 짓눌린 장애물 사이로 희미하게 울려 나왔다. 흡사 두꺼운 벽 너머에서 웅얼웅얼하고 떠드는 소리 같았다.


그 비명 앞에 한동안 넋이 빠져있던 임 동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주번 하사관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무언지 모를 책임감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그래서 임 동지는 우선 전 병사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허물어진 목조 병사는 군데군데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맑은 하늘로 서서히 피어올랐다. 학교운동장 한복판의 피복더미에도 불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화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불은 제멋대로 타오르는 것이었다. 듣기에도 애절한 비명소리가 찌그러진 목조 병사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때 이 층 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대대장이었다. 임 동지는 그 앞으로 달려갔다. 대대장이 임 동지를 향해 구조작업을 하라고 했다. 우선 군인들부터 구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조작업은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전 병사가 당일의 작업 준비를 하려고 들어갔다가 한꺼번에 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선 동원할 인력이 없었다. 임 동지를 포함한 칠팔 명 외에는 성한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다 도구도 없었다. 목조 병사 안에 깔린 사람을 구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사력을 다해 약 삼십 분간 구조 작업을 한 결과, 스무 명 남짓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요행히 손쓰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깊숙한 안쪽에 갇혀 있거나 혹은 무거운 나무 틈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구해 낼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구해 줄 수가 없었다.


임 동지는 다시 대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현존자들만 인솔하고 빨리 시외로 대피하라는 명령이었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나 그 불길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목조 병사는 이미 시뻘건 화염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나머지 인명의 구조란 도저히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비참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폭의 무서운 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일시에 전 시가를 마비시켜버린 것이었다. 우선 교통이 두절되었다. 파괴된 건물과 건물, 그리고 넘어진 전신주들로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론 구조 작업에 나설 사람이 없었다. 누구나 똑같이 당한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화재가 곳곳에서 일어나 「히로시마」 전체를 불더미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지만, 그것을 진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불은 점점 확대되어 무섭도록 타오를 뿐이었다. 시내에 그대로 우물거리고 있다가는 곧 화염에 휩싸여버릴 상태였다.


임 동지는 생존자들을 인솔하고 「하쿠시마(白島)」 초등학교 문을 나섰다. 시가는 가위 쑥대밭이었다. 화염과 비명과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로 아비규환의 도가니를 이루고 있었다. 영문을 나서서 조금 걷다 보니, 길바닥에 너덧 살쯤 돼 보이는 아이의 시체가 하나 반듯이 놓여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시체였다. 그래서 임 동지는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팔에 안고 얼마를 가다가 보니 역시 죽은 아이였다. 코끝에 귀를 갖다 대보아도 숨소리가 없었다.


아마도 아침녘의 길바닥에 나와 혼자서 놀다가 그만 원폭의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휙 떠올랐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진 채 즉사해버린 모양이었다. 임 동지는 그 조그만 시체를 길가에 고이 눕혀놓았다. 그러나 그 시신을 덮어 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조그만 시체는 벌거숭이로 길가에 놓인 채 그대로 불길 속에 휘말려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부 제7부대의 후문을 지나, 「오타가와(太田川)」의 「츠리바시(吊り橋)」(줄걸이, 현수교) 다리를 건너갔다. 그곳의 연병장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당시 일본 전역에서 동원령을 받아 우리 부대로 들어오기 위하여 징집된 장병들과 그 가족들이 그곳에 운집하여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불의의 참화를 입게 된 것이었다. 그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 성한 자가 없고 더러는 이미 숨져 있기도 했으니 그 참상을 어떻게 눈 뜨고 볼 수 있겠는가.

임 동지와 그 일행은 대지 위의 생지옥 「히로시마」를 벗어났다. 「히로시마」 성에서부터 3킬로까지는 말할 것도 없이 온통 쑥밭이었는데, 그밖의 4킬로 정도에서부터 6킬로까지는 반파(半破)되고 좀 더 먼 곳에 있던 집은 장지문이 모두 찢겨 있었다. 결국 그것이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위력을 설명해 주는 셈이다.


임 동지는 일행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20리밖에 있는 한 촌락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의 어느 국민학교 교사에 수용되었다. 다음날부터는 다시 민가로 옮겼고 곧 시체 처리에 나섰다. 그것도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처리해야 할 시체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서 거기까지 기어 와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그렇게나 많았다. 하기야 그곳에 마련된 의료시설이나 약품이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부상자들을 일일이 다 가료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부상자 중에서는 화상이 절대다수로 많았고, 또 그들이 가장 문제였다. 우선은 급한 대로 상처가 큰 사람들부터 치료를 해주고 있었는데, 그동안에 원래는 상처가 적던 사람들조차 그것이 급속도로 자꾸 커져서 결국은 구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상처가 적은 사람부터 치료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그들만이라도 구제할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원폭에 입은 화상이란 그것이 경미할 때는 간단한 소독약 정도로 충분히 완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래도 약삭빠르게 옥시풀이나 머큐롬 정도만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 살아날 수가 있었다.


하여간 이래저래 죽어간 사람들의 사체가 운동장이며 교실마다 부지기수로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처리하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은 오십 명 정도였다. 임 동지는 그 인원을 셋으로 갈라 한쪽은 장작을 구해오게 하고 또 한쪽은 운동장 옆 밭에다 곳곳에 구덩이를 파게 하고 또 한쪽은 마을의 달구지와 손수레를 모두 동원해 시체를 실어 나르게 했다.


시체를 나를 때에 부하들이 부주의하여 꾸부러진 시체의 손이 때로는 달구지 바퀴에 끼어서 손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우지직하고 날 때마다 섬뜩했다. 임 동지는 부하들에게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 해도 조심해서 다루라고 타일렀다. 커다란 구덩이에다 먼저 장작을 깔고 그 위에다 시체를 쌓아 올렸다.


한 구덩이에 보통 칠팔십 구의 시체를 처리할 수가 있었다. 그 시체 위에 다시 장작을 얹고 석유를 끼얹은 다음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충분히 소각된 다음, 흙으로 대충 덮은 정도로 시체처리를 끝내는 셈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임 동지는 역시 시체처리를 위해 「히로시마」에 돌아왔다. 원폭과 화염이 휩쓸고 간 「히로시마」는 완전히 잿더미였다. 며칠을 두고 불길은 계속되어 탈 수 있는 것은 깡그리 태운 다음 저절로 꺼진 모양이었다. 그 잿더미 속에 주춧돌이던 화강암들만 앙상하게 뒹굴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도 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불 속에서 오래도록 있었기 때문에 발길로 툭 차기만 해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이젠 애절한 비명소리도, 비참한 몰골의 시체들도, 그리고 허물어진 건물들도 없었다. 그 모두가 황량한 잿더미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그 폐허의 「히로시마」에 유독 「핫초보리(八丁堀)」백화점 건물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건물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허물어지지도않고 타버리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투하된 원폭의 파괴력은 역시 적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쿠시마(白島)」 국민학교에 도착한 임 동지는 다시 한번 끔찍한 광경을 발견했다. 목조 이 층 건물은 잿더미로 내려앉고 그곳엔 시멘트로 된 기초 부분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 시멘트의 기초 부분에는 군데군데 공기통이 나 있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그 조그만 공기구멍 앞에 새까만 숯덩이가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처음엔 그 숯덩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그것을 곧 깨닫고는 무서운 전율을 느꼈다.


그 까만 숯덩이들은 모두 사람의 유골이었다. 목조 이 층이 기울면서 주저앉은 바람에 그 속에 갇히고 짓눌렸던 병사들이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그 공기구멍 앞으로 몰려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공기구멍은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크지 못했다. 그래도 불길은 자꾸만 타들어 오고, 살고 싶은 욕망은 그럴수록 거세지기만 해서 그 좁은 공기구멍 앞으로 올망졸망 몰려든 채 결국은 타죽은 것이었다. 그때 여러 개의 공기구멍마다 그런 광경이 빚어져 있었다.


임 동지는 땅바닥에 굴러있는 일본도(日本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것은 자루 부분은 타버리고 쇠 부분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거기의 숯덩이를 툭툭 쳤다. 사람의 뼈도 너무 지독히 타고 나면 하나의 숯덩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빛깔도 검고 부서지기도 잘했다. 그것을 한 토막씩 집어 유골 봉투에 담았다. 어느 게 누구의 유골인지 도저히 가려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골 정리나 희생자 명단이란 자연히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임 동지에게서 들은 「히로시마」 최후의 날 얘기는 여기서 일단 끝내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 같은 한국 출신 학도병들에게는 그 후 해방까지 그리고 귀국하기까지 과정 역시 기구한 바가 있었다. 임 동지 역시 예외 일 수가 없었으니 그가 귀국하기까지는 꽤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한국 출신 학병들이 조국의 아늑한 품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얼마만 한 어려움이 있었던가 하는 의미에서 여기 그의 귀국담까지 기술해 두기로 한다.

원폭이 떨어진 다음의 혼란된 며칠이 지나고부터 일본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입 밖에 내어 감히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군부며 민간인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일본의 비극적 패망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군 내부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어딘가 살벌해졌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동경대지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지진으로 흉흉해진 일본인들 사이에는 어느새 한국인을 모함하는 소리가 일어났고 그것이 마침내는 책임 전가의 한 수단으로서 교포의 대량 학살로까지 번졌다.


그런 일본인들 사이에 비극적인 종전이 다가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인심이 흉흉해지고 군 내부의 분위기가 살벌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모함이 일어날 것도 당연한 일인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군 내부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한국인에게 전가시키는 모함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의 패전은 순전히 한국인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일본 군대 내에 있는 조센징(朝鮮人)들이 적의 스파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뒷공론이 일어나게 되니 한국 출신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동경대지진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만큼 몹시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이다. 임 동지 역시 그러했다. 그의 부대 내에서도 그런 공론이 파다하게 일어났다. 심지어는 임 동지 앞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다. 대다수의 병사는 임동지가 한국 사람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모는 사실 일본인과 비슷했다.


그러나 상급자들과 한때 임 동지가 데리고 있던 「미야모도(宮本)」 일등병만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급자들은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고, 「미야모도」 일등병은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던 만큼 오히려 그러한 공론에 변호해 주었다. 그러나 불안은 역시 가시지 않았다. 「미야모도」의 지나친 변호 때문에 임 동지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다음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 짓눌린 임 동지는 대대장을 직접 찾아가 그 문제를 놓고 상의했다. 그의 대대장은 역시 인텔리다웠다. 임동지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으며, 앞으로 그 점에 세심한 배려를 할 터이니 마음을 놓으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왕 패전한 것, 당신은 이제 그날을 기다렸다가 무사히 귀국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날 저녁은 술을 두 병이나 구해가지고 모두 함께 먹기까지 했다.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불안은 가시었다. 그러나 초조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드디어 8월 15일이 왔다. 이날 낮 열두시 일본 천황의 울음 섞인 항복 방송이 있었다. 일본은 마침내 비극적인 종전을 맞았다. 이제 임 동지에게 남은 일은 무사히 귀국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그리던 날인가. 자유로운 조국으로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지불하는 귀향 여비란 8원 50전뿐이었다.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판이었다.


임 동지는 경리를 맡은 학병 동지 「구니모도」(국본(國本))에게로 쫓아갔다. 그리고 귀국 후에 갚아 주마고 말하고 300원을 집어왔다. 그 돈이면 충분히 귀국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현해탄을 건너는 데도 뱃삯 백오십 원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대를 나선 임 동지는 「미야모도」의 권고로 그의 집이 있는 「미야지마(宮島)」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이 「미야지마」에 와서 들으니,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던 그 시간에는, 칠십 리나 떨어진 이곳에서도 먼지 색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으며, 또 유리창들이 몹시 흔들렸다는 것이었다. 임 동지는 다음날 그곳을 떠나 「시모노세키」로 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널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보니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한국 출신 병졸들의 처리문제였다. 그들은 뱃삯도 없이 그곳에 운집한 채 실로 막연한 기대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태워줄 배란 없었다. 일 인당 백 오십 원씩이나 하는 뱃삯을 그들의 힘으로 구해 낼 수도 물론 없는 일이었다. 딱하게 된 그들은 하늘만 믿고 그 들끓는 부두에 운집한 채 막연히 웅성대고만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사 역시 대부분 빌어먹는 처지였다. 거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한 그들을 그대로 버려둘 수야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임 동지의 생각에 선뜻 호응해 준 이는 같은 학병 출신으로 「나고야」 부대에 갔다가 경리장교가 된 박진동(朴鎭東) 동지였다. 둘은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구제하기로 의견을 본 다음 우선 그 수많은 한국 출신 병졸들을 한자리에 모아 인원파악을 했다. 학병 사십여 명에 병졸 4,000여의 숫자였다. 실로 거대한 인원이었다. 그것을 적당히 부대편성을 하고 그날부터 숙식을 공동으로 해나갔다.


그러나 실로 난처한 것은 그 많은 인원을 먹이고 또 귀국시킬 수 있는 재정이 막연하다는 점이었다. 임 동지가 주머니를 다 털어서 내놓은 300원과 박 동지가 내놓은 2,800원이 전 재산이었다. 임 동지가 그중 오백 원은 떼어서 다시 박 동지의 주머니에다 넣어주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남은 돈 2,600원으로 어떻게든 해볼 도리밖에 없었다.


며칠 후, 일본인의 배 한 척이 쌀을 싣기 위해 한국으로 출항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임 동지와 박 동지는 그 배를 교섭하기 위해 당사자들을 찾아갔다. 하나 뱃삯을 충분히 지불할 만큼의 능력이 없는지라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하고 갔었다. 가서 만나고 보니 그들 역시 일 인당 150원의 뱃삯을 요구했다. 승선 전원은 3백 명 선박비는 도합 3천 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임 동지와 박동지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우선 계약금 조로 오백 원을 지불했다. 어떻게 하든지 일단 출항만 하는 날이면 저들이 어쩌겠느냐 하는 계산에서였다. 출항하는 날, 전원의 의견대로 일 연대 첫머리부터 시작해서 태울수 있는 데까지 태웠다. 그렇게 승선한 사람의 수가 거의 450명가량 되었다. 우선 제일진이 출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임 동지가 그들을 인솔하기로 하고 박 동지는 남은 사람들을 위해 뒤에 남기로 했다. 임 동지 일행이 탄 배는 이윽고 「시모노세키(下關)」 부두를 떠났다.


배에 탄 사람들의 감회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 역시 감회가 깊었다. 그들도 곧 귀국선에 오를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부두를 거의 벗어났을 때쯤었다. 갑자기 배 한 척이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물기둥과 함께 공중으로 휙 솟아올랐다가 그대로 가라앉아버렸다. 물속에 있던 수뢰(水雷)에 부딪혀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눈앞에 목격한 일행은 등골이 오싹했다. 배는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 조금 후에 천 톤급의 구축함 한 척이 이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왔다. 그것이 임 동지가 탄 배 옆 지나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더니 곧이어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침몰해버렸다.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모두 또 한 번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전쟁 시에 띄워 놓은 수뢰는 삽시간에 두 척의 배를 삼켜버린 것이었다.


임 동지의 옆에 서 있던 일본인 선장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조금 전부터 수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배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 오는 것을 알고는 가슴을 졸이던 판이었는데 예의 구축함이 자기의 배 지나가느라고 대신 변을 당한 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임 동지 역시 싸늘한 전율이 등을 스쳤다.

히로시마(廣島) 최후(最後)의 날(2)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동지인 민규식 씨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기로 한다. 똑같이 그날에 경험했던 일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각도에서 그 「히로시마」 최후의 날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결코 나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이하 그의 생생한 체험담을 덧붙인다.


1945년 8월 6일 민규식 동지는 여전히 「히로시마」 공병부대에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목조 이 층의 병사 내에 있었다. 당시는 전속부대라 하여 군복 절약운동이라는 게 한창일 때라 윗도리는 홀랑 벗어버린 채 바지만 끼어 입고서 창가에 앉아 있었다.


군복 절약운동이라고 하니 무슨 거창 운동 같지만 실상은 다른 게 아니라 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일본 당국이 궁핍한 전쟁물자 절약의 일환으로서 평시의 군인들은 모두가 상의를 벗고 지냄으로 다소간이라도 군복을 절약해 보자는 의도로 시행되었던 일일 뿐이다. 그래서 모두다 상의를 벗어버린 채 맨몸 바람이었다. 민 동지가 이점을 굳이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민 동지는 그날 아침, 일본인 동료와 둘이서 창 앞에 앉아 있었다. 서편으로 난 창은 꽤 높직한 것이어서 그들의 앉은키보다 높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 앞엔 침구인 담요가 잔뜩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민 동지와 그의 일본인 동료는 창 앞에 쌓여있는 침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훗날 민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바로 그 침구 덕분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몸을 방사선으로부터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그는 침구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다른 동료들이 여럿이 웅성대며 서 있었다. 이제 곧 아침 식사를 시작하게 될 판이었다. 맞은편 창은 어둠침침했다. 그쪽이 동편이고 해가 떠오를 때이지만, 복도가 그것을 막고 있어 어둠침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복도에서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그때였다.


서 있던 동료 중의 하나가 서향 창밖을 내다보며,“야— 비행기가 떴는데 B29야, B29!”하고 외쳤다. 웅성거리고 섰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창밖을 기웃거렸다. 목을 잔뜩 빼고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떴다…"하고 그는 무심히 중얼댔다. 뭐, 별로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B29 편대가 일본 본토 공습을 개시한지는 이미 오래된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저렇게 정찰비행을 나오는 일도 빈번한 노릇인 것이다.


달포 전, 인접한 「구레」항(吳港)을 폭격할 때 8월 5일에 「히로시마」를 폭격하겠다는 삐라가 살포되었으며, 또 전날 밤 10시경에서 그날 아침 네 시경까지는 공습경보가 들려서 그들은 철야 공습대기를 하다가 약 한 시간쯤 취침했을 뿐이었다. 몹시 고단하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단 민 동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매한가지였다. 비행기가 하나 떴군, 하는 정도로 무심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야, 무지무지하게 높이도 떴군, 그래. 아주 새까맣게 보이는데……”


누군가가 중얼댔다. “비행운 좀 봐라, 아주 하얗구나, 하얘…….” 그리고 다들 뭐라고 술렁거렸다. 민 동지는 그래도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침구에 등을 붙이고 웅크려 앉은 채 맞은편 벽만 시름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야, 무엇이 떨어진다, 떨어져. 바로 그 비행기에서 방금 떨어뜨린 모양이야.”


그 외침에 잇따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웅성거렸다.“저게 뭘까?” “글쎄, 워낙 높이 있어서 아직 잘 알 수가 없는데……” “가만히 봐라, 낙하산 같다. 낙하산” “그래, 낙하산이다. 그것도 두 개인 모양이다.”하고 다들 법석하게 떠들었다. 그리고는 활기 있게 지껄였다. 비행기가 고장이 난 모양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조종사 녀석이 저렇게 까마득하게 높은 창공에서 부득불 뛰어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하고 한바탕 지껄여댔다.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때때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 정찰 나온 저 비행기도 그런 변을 당한 것이리라. 민 동지는 지금 낙하산에 매달려 적국 상공에 떨어지고 있는 그 두 명의 조종사를 생각하고 이제 그들이 당할 운명에 상상해 보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주 짤막한 한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이 아찔해졌다. 어둠침침하던 방안이 굉장한 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어찌나 눈부신 빛이었던지, 그 빛이 눈 속으로 파고들던 순간은 동공이 어찔할 정도였다. 설사 태양을 지구 표면으로 끌어내렸대도 그처럼 은빛은 아닐 것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자잘한 모래 하나하나까지도 충분히 식별해 볼 수 있을 만한, 아니 그 이상의 밝은 빛이었다. 그것이 예고도 없이 돌연, 그 방을 가득 채웠다.


실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흡사 빛에 튕기듯, 민 동지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복도를 향해 튀어나갔다. 부지불식간의 행위였다. 빛이 번쩍한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그의 몸이 문밖으로 튀어나가 복도에 한 발을 내딛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밤일 뿐이었다.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생각과 조리 있는 사고와 매사 응할 분별력이 그 너무나 눈부신 빛에 깡그리 탈색되어버린 듯,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단지 온몸이 허공에 뜨는 감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무너진 집 속에 묻혀 있었다. 야전공병이라 무수한 굴을 팠었고, 또한 「하기(萩)」 지구의 백여리에 걸친 수제진지(水際陣地) 구축의 공사 책임자로부터, 굴이 무너졌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무너지는 것도 방지하고, 또 한정된 공기 속에서 질식을 면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은 생각이 났다. 작업장에서 직접 교육을 시켜준 일도 있었다. 양손의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여 보았다.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이 거대한 건물이 파괴된 그 속에서 살아 있다니, 정말 신의 가호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때까지도 혼수 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났을 때라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이 있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가만히 내 몸의 위치를 생각했다. 두 팔은 양편으로 펴져 있고, 허리에 무엇인가에 걸쳐져 있었다. 다리를 움직여보니 허공이다. 허리는 굽어지고 머리는 무엇인가에 눌려 있는 게 아닌가. 어두움 속이다.


또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둠 속에 간간이 희미한 광선이 비치는 게 보였다. 정신이 떠도는 모양이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나 병사가 무너지는 소리조차 전혀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크게 아니면 어렴풋이 들려오는 저 소리는? 심원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신음 소리. 옛말에 새가 숨지려 할 땐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숨지려 할 땐 그 말이 착하다고 했지만, 자리에서 편히 누워숨지는 것이 아닌 그 무수한 소리는 오직 슬프게만 들려왔다.


자신의 생각은 제쳐놓고 그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결에만 해도 밝은 8월의 태양이 주위를 비추었건만 그 이름 모를 섬광— 흡사 실내에서 터뜨리는 사진사의 마그네슘과 같은 섬광이나 그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가 되는지 모르는 섬광 하나에 세상은 일변해버린 것이었다.(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사진사의 플래시가 몸서리나도록 싫다고 한다.)


지금은 암흑과 아비규환뿐. 이 무슨 순간적인 변화일까. 무너진 병사의 지붕을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 그것도 현실적으로 그가 직접 체험하는 지옥이 아닌가.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란 소설의 주인공인 장발장이 무서운 시가전 속에서 지하의 하수구로 들어갔을 때, 맨홀 뚜껑을 하나 사이에 두고 지상의 소란과 지하의 정막을 묘사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고 한다.


어떻게 된 셈인지, 전신의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착잡한 감정 속에서 시간만 흘러갔다. 이 부대엔 한국 출신 전우가 두 명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들의 생사가 궁금해졌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두 손으로 머리 위를 헤쳐보았다. 판자다. 용이하게 헤쳐진다. 고개를 쳐드니, 무너진 이층 지붕 위로 머리가 삐어져 나갔다.


단박에 눈이 부셨다. 그 순간이었다. 약 십 미터 우측의 지붕이 화염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강렬한 열풍이 검은 연기와 함께 그의 머리 위를 스쳐 가는 것이었다. 두 다리를 휘저었으나 아무것도 걸리지를 않았다. 이때 왼발이 무엇엔가 닿은 것 같았다. 힘껏 밟았다. 찍, 미끄러진다. 나중에 나와 보니 셋째와 넷째 발가락 사이가 약 5cm가량 찢겨 있었다. 화염은 시시각각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어보니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다. 세 개의 거대한 대들보가, 하나는 그의 허리 뒤로, 하나는 좌측 허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측 허리로 지나갔고, 이 삼각형으로 얽힌 큰 대들보가 그의 가는 허리를 꼭 조르고 있어서, 그의 몸은 이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두 손으로 눌러도 그것들이 허리뼈에 걸려 몸이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운명의 신의 장난 치고는 너무나 심하다. 잠시 후에 저 화염에 삼켜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그대로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무서운 고통은 면하였을 것이었다.


전(全) 시가(市街)는 수백 수천 기둥의 검은 화염으로 덮여 있었다. 영내(營內) 광장을 둘러보니, 십여 명의 병사들이 쓰러져 있을 뿐, (원자탄의 투하(投下) 시(時)는 조반(朝飯) 직전이라 거의 전원이 영내에 있었다) 다만 장교 한 명과 병사 두 명만 우왕좌왕 구출 작업에 분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넓은 광장 속에서 지붕, 그것도 화염이 엄습하고 연기에 싸인 지붕에 머리 하나만 덩그러니 드러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들에게 발견될 리가 없었다.


구원을 청하려 했지만 잔허리가 워낙 꼭 졸려있어 그런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 말라붙은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흡사, 광막한 대양에서 난파당한 사람이 구조선을 보고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들 눈에 발견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과도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긴박한 사정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2~3분 후에 그대로 생화장이 되어버릴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 그는 또다시 소리를 쳐보려고 했다. 그러나 심한 타박상으로 앞니 한 개가 부러지고 양 입술이 몹시 부어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시원하게 져 나오질 못했다. 간신히 소리는 났으나 콧소리 정도였을 뿐이었다.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올리려고 해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불가능했다.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무지 운신할 수가 없었다. 큰 대들보에 눌려 몸이 더 졸리는 것만 같았다.


이때의 심경이란, 누구나 체험해보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고 또 표현조차 할 수 없다. 실로 참혹하고 비참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체념한 것은 아니었다. 학병으로 끌려 나오던 그해 봄의 일을 생각했다. 그때 아내는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으랴. 그래서 내 운수까지 본 것이 아닌가. 내가 삼 년 동안 외국에 가 있을 운수라고. 나는 그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한 아내의 정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서 무사히 귀국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바른손으로 지붕을 쳐보았다. 손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보니 유혈이 낭자했다. 아마도 팔꿈치의 신경이 절단된 모양이었다. 천신만고로 왼손을 간신히 지붕 위로 올려 판자를 마구 두드렸다. 소리가 울렸다. 뜨거운 연기로 오른쪽 뺨이 견디기 어려웠다. 연기에 눈물이 나와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왼손으로 지붕 판자를 두드릴 때마다 좌측 늑골이 울려 부러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그는 지금도 그 순간의 일이 꼭 몇 시간이나 걸린 것 같았다고 한다.

문득 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너는 살았으니 정신을 차리라"하고 외치면서 그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몸은 꼼짝도 안 했다. 요지부동이었다. 그로서는 그 병사도 연기에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은 점점 가까이 타들어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그는 또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일각의 여유도 없다. 공병대의 교육 지침이 침착, 기민, 결행, 이 세 가지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재검했다.


운명의 기적이여. 그의 왼 허리를 조르고 있는 큰 대들보가 지붕 밖으로 돌출된 것 아닌가. 그는 그 병사에게 그 대들보 끝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대들보가 움직였다. 과연 기적이다. 조여드는 것이 아니라 부러졌다. 그는 힘을 다해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아래옷의 허리춤이 무엇엔가 걸려 몸이 빠져나오지 않았다. 다시 해보았다. 그야말로 최후의 힘을 다해 몸을 올렸더니 북하고 군복이 찢어지며 몸이 위로 나왔다. 60도 각도의 지붕 위를 밟으니 왼편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고 감각조차 없었다. 할 수 없다. 기민한 자세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그는 과감히 결행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모른다. 몸이 땅 위에 철석 떨어졌다. 그 사병이 그를 끌어안고 몇 발짝 물러나는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엉성하게 무너져 있던 공병대 병사가 폭삭 가라앉고 말았다. 마당에는 기왓장, 군복, 군화, 군모 등이 난잡하게 흩어져있었다. 그는 가련한 모습의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등허리가 칼로 에인 것처럼 따가웠다.


귀국 후 세어보니 440여 개의 상처가 있었다. 원자탄 폭풍에 유리창의 유리가 날라와 등에 박혔다가 진공이 되는 순간 모두 빠져나간 것이었다. 다만 바른 팔과 이마에서 각각 유리 하나씩을 집에 돌아와 수술로 꺼냈다. 피는 쉴 새 없이 흘렀다. 진공으로 빨아내 혈관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머리는 흙과 피로 뻣뻣하게 굳어 있고, 아래 양복 허리춤으로는 돌아가며 피가 두껍게 응결되어 있었다. 그 위로 자꾸만 새로운 피가 흘러내려 고이곤 했다. 그는 빨간 예식 군모를 하나 주워 썼다. 머리에 맞지도 않는 조그만 것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햇볕을 다소 가릴 수는 있었다. 그는 성한 발에다 군화 한 짝을 끼어 신고 또 한 짝(물론 짝이 서로 틀린 것이었지만)은 비 올 때를 생각해 허리춤에다 꿰어찼다.


그러고 보니, 그 넓은 연병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까지 포함해서 단 네 명뿐이었다. 그중 두 사람은 남고, 그는 좀 전에 자기를 구해준 그 부하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연병장을 걸어 나와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원대로 통하는, 소위 '룩백꾸' 직선 (도로로 6백미터의 길이) 도로는 허물어진 집더미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동편 길을 걸어갔다. 무수한 민간인들이 남부여대하여 북으로 향해가는데, 성한 사람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길가에 이불 한 채가 떨어져 있었다. 병사는 그를 위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조금 걸어가자니, 유아를 안은 여인이 따라와 자기 것이니 유아를 보아서라도 되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했다.


무수한 가옥이 타고 있었으나, 가만히 보니 흰 회(灰)를 바른 가옥은 하나도 타고 있질 않았다. 열광선을 반사해버린 모양이었다. 이윽고 원대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곳 역시 무참히도 파괴되어 있었다. 그중에도 취사장 하나만은 기이하게 지붕만 날아갔을 뿐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부대 북문을 통해 「오타가와」 강을 건너 산으로 갔다. 강둑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아까시나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이제 그 나무들이 하나같이 세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상부는 상부대로, 중동이는 중동이대로 잘렸으며, 특히 뿌리는 모조리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하나가 꼭 집채만 하게 컸다. 참으로 무서운 원폭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츠리바시(吊り橋)」(줄다리, 현수교)였다. 그것은 19세기 「명치」 시대 때 동 공병대가 가설했다는 것으로, 이쪽 둑에서 저쪽 둑까지 늘어져 있었다. 하도 오래된 줄다리라 이제는 노후할 대로 노후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 우리가 훈련 차 매일 두차례씩 이 줄다리를 왕복할 때면 꼭 2미터 간격을 두고 한 사람씩 건너곤 했다.


그런데 그 줄다리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강둑의 아까시나무를 부수고 넘어뜨린 그 폭풍에도, 어쩐지 이 「츠리바시」만은 조금의 피해도 입은 게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리는 하나도 파괴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그가 다리를 건넌 후 병사(兵士)는 돌아갔다. 무서운 전우애였다. 그 병사는 불바다 속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북쪽은 민가가 없고 다만 공병 연습장만 있었는데, 그끝에 「부다바야마(双 葉 山)」가 솟아 있었다. 또 부근엔 공병대의 커다란 자재 창고가 대여섯 동 서 있었는데 화염에 싸여 있었다. 그사이를 지나 산기슭으로 갔다. 그곳엔 공병들이 훈련을 받을 때 파놓은 항도가 여러 개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 속으로 대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기슭에 다가가보니 굴속은 이미 만원이요, 굴 밖에도 백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있었다. 대부분이 화상을 입고 있었다. 화상에다 수핀들유(油)를 발라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얼굴이 덴 사람은 군모를 썼던 자리만 동그랗게 성할 뿐, 얼굴이 흡사 커다란 수박처럼 부풀어 있었다. 눈은 거의 뜨질 못하고 입술은 흑인의 그것보다 더 두껍게 부어 있었다. 약 1cm 정도로 온통 부풀어 오른 피부엔 벌써 구더기 같은 조그만 벌레가 안면 위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돌연, 묘령의 여인이 반나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깨진 거울 쪽을 들고서 분주히 쏘다니며, “내 콤팍트(화장 도구) 어디 있나? 콤팍트가 어디 있어?”하고 외쳤다. 정신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람들을 밀치고, 누운 사람을 타넘고, 그 비좁은 굴속까지 드나들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기진맥진한 탓이었다.


민 동지는 풀도 없는 흙 위에 엎드려 있었다. 등이 아파서 바로 누울 수가 없었다. 또 좌측 다리와 우측 팔까지 아팠기 때문에 옆으로 누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엎드린 채로 단지, 좌측 이마와 좌측 윗니가 부러져 있어서 얼굴만 바른쪽으로 두고 있었다. 지극히 불편한 자세였으나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적기다!”하고 외쳤다. 적기의 내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 역시 그랬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다들 운명에 맡기고, 될 대로 되라는 태도였다.


다행히 비행기는 곧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팔월의 태양이, 죽은 듯 쓰러져 누운 병사들 위에 사정없이 내리쪼였다. 상처의 피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게 졸음이 왔다. 그래서 민 동지는 얼마 동안 잠이 들었다. 역시 몸이 좀 성한 병사가 원대로 가서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와민 동지를 깨운 때는 벌써 석양 무렵이었다. 한 사람에 한 덩이씩의 주먹밥을 받았다. 물도 떠 왔기에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같은 부대원이 모두 15명이었다.


민 동지는 그 주먹밥을 반도 먹지 못했다. 도시 넘어가질 않았다. 머리를 들고 보니, 시가지는 아직도 타고 있었다. 흡사, 잔인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뿐, 주위는 고요했다. 말 한마디 크게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요한 어둠의 장막이 하늘을 서서히 덮어 옴에 따라, 고루거각으로 즐비하던 시가는 더욱 빨간 화염에 싸여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쿼바디스」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중학교 시절 그 책을 읽었는데, 문득 폭군 「네로」가 「로마」시를 불사르고 양금을 치며 회심의 자작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생각난 것이었다. 당시 「네로」는 산 사람을 말뚝에 묶고 몸에다 송진을 바른 후 불을 지르고는 타는 냄새를 즐겨 맡았다고 했다.


이상한 대조다. 그믐밤 충천하는 화염에 휩싸여있는 광경은 같으나 거기서 나는 냄새는 같을 수가 없었다. 낮 동안에 숨진 그 많은 시체에서 타는 냄새가 심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하늘의 불길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주위의 적막은 야반 삼경에 더욱 짙어만 갔다.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요기(妖氣)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민 동지의 곁에 누워있던 병사가 고요히 자장가를 부르더니 ‘어머니’하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조용히 잠들었다. 또 하나의 병사가 유명을 달리했음을 알았다. 아마 미혼의 병사였던 모양이다. 실로 슬픈 임종이었다. 민 동지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왕모래에 닿은 앞가슴과 얼굴이 한없이 아파 왔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여 볼 수도 없었다. 8월이라지만, 새벽이 되니 몹시 추웠다. 가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악몽 같은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인 8월 7일이 되었다. 부대 안의 식량이 부족한 탓으로, 주먹밥도 그의 부대원 십여 명끼리만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부대에서 구급상자 하나를 찾아왔기에 그것도 수량이 부족하여 그의 부대원들만 사용했다. 구급상자라고 해도 그 속에 붕대, 머큐롬 따위뿐이긴 하지만 역시 귀중한 것이었다.


민 동지의 옆에는 「오하라」 군조가 있었다. 「오하라」 군조는 만주사변때 부터의 고참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들것에 누운 채 오늘까지 계속 혼수상태였다. 그의 외상은 오른쪽 팔꿈치가 뼈까지 나오도록 옆으로 쭉 갈라진 것이었다. 몸이 성한 병사가 머큐롬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민 동지와는 평소에 친한 사이였지만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이날 민 동지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노리모도」 특무조장을 만났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조선인 학도병 일행 13명을, 서울에서부터 「히로시마」 제7부대까지 인솔해왔던 자였다. 「노리모도」는 원폭의 그 북새판 속에서도 별로 큰 상처를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이 멀쩡했다. 아마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리모도」는 민 동지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민동지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정중히 했다. “민군, 정말 미안하네, 이 사지(死地)에까지 끌고 온 것에 대해 매우 죄스럽게 생각하네, 나야 원래 일본 국민으로 태어났으니 이런 변을 당한대도 할 말이 없지만, 자네들은 정말 안됐네, 내 손으로 자네들을 이 히로시마까지 끌고 와서 오늘날 이 지경을 만들어 놓았으니 정말 면목이없네. 어떻게 해서라도 무사히 귀국하길 바라네…….”


「노리모도」는 이렇게 정중한 사과를 한 다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다시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다. 「후다바야마」 산 뒤쪽에 무언가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어제 아침에 떨어진 원폭을 달아서 내려온 낙하산인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언제 또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다들 불안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는 다른 곳으로 휘적휘적 가버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다소 불안하기도 했다. 혹 그것이 원폭이라면, 언제 또 터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냐? 바로 산 뒤쪽이라고 하니 실로 위협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민 동지와 그의 동료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옮기려 하질 않았다. 그들은 이미 기진해 있어서 죽음이 이마를 기어오른다고 해도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있었다. 민 동지도 역시 그랬다. 우선은 완전히 기력을 잃어버려서 조금도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그는 땅바닥에 축 늘어진 채 만사를 이미 체념해버렸다. 누워있는 것도 고통스러운 몸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 새로운 아침이 왔다. 밤 사이에 시체 수는 더 불어 있었다. 당연한 귀결로 생존자의 수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침이 왔다고 해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란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 자리에 쓰러진 체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사흘째이지만 시가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엔 수백, 아니 수천의 병사가 소리 없이 누워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모두 소생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한갓 염원에 지나지 않았다. 민 동지 역시 그들 속에 끼어 누워있었다. 그렇게 누운 채로, 곁에 있는 병사의 다리를 자기의 다리로 가만히 건드려 보았다. 그것이 막대기처럼 흔들렸다. 이번엔 부어오른 자기의 오른쪽 어깨를 보았다. 실로 꺼림칙한 일이다. 그 어깨에서는 주위에서 나는 냄새와 다름없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주위엔 5~6명가량의 사람이 일어나 앉아 있었다. 민 동지도 힘을 내어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무심히 먼 산만 바라보았다. 멀리 길 쪽에서 원기 왕성한 군인 하나가 무어라고 외치며 이편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군인은 그들 앞으로 다가와서는, 멀리 「시모노세키(下関)」로부터 온 구조대의 일원이라고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면서, 시가지가 온통 시체로 즐비하여 도저히 트럭은 들어오지 못하니 하는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북으로 십 리만 가면 거기 국민학교가 하나 있고, 또 제5육군병원의 임간(林間)병원 분실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중에서 자력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그곳으로 가십시오. 그 이상의 구조는 기대불능입니다."


그때가 아마 아침 아홉 시 경이었으리라. 정확한 시간이란 알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민 동지는 일어섰다. 발이 마구 떨렸다. 그러나 이를 악물면서도 북으로 나서는 사람은 불과 십여 명뿐이었다. 그 길은 「오타가와(太田川, 오타강)」를 좌측에 끼고 가는 길이었다. 따라서 연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다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훈련을 받을 때 수시로 구보를 하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등 도로였지만 도저히 일직선으로 보행할 수가 없었다. 길바닥에 수없이 쓰러져 누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피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길을 조금 걸어가자니 누군가,“적기다!”하고 소리쳤다. 과연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도 무거운 몸을 지척대며, 민 동지는 무성한 가지밭에 들어가 엎드렸다. 비행기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눈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가지가 아주 먹음직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따먹을 기력이 없었다. 다시 일어서서 가야겠다, 하고 생각했으나 당장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민 동지는 그대로 얼마 동안을 엎드려 있었다. 정신이 자꾸만 아득해졌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리고 또 걷기 시작했다.


왼편 허리에 찬 군화가 출렁거릴 때마다 찢어진 발에 진동이 갔다. 그러나 그 군화 짝을 치켜올릴 기력마저 없었다.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목이 불같이 타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엔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지만, 역시 타는 갈증을 풀 도리는 없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도 맑았다. 민 동지는 5미터쯤 가다가 쉬고 10미터쯤 가다가 또 쉬곤 하면서 여전히 그 길을 갔다.


가면서 본 일이지만, 가다가 한번 드러누운 사람은 다시는 일어나질 못했다. 그것을 민 동지는 숱하게 목격했다 드러눕기만 하면 잠이 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깨어 일어날 것인지……. 그것을 보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 동지 역시 주저앉기만 하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이므로, 어디 기대어 앉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그런 곳을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강의 둑이 길어서 전신주는 우측 산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라도 길가에 있으면 좋으련만.…….


몇 시간을 계속 끈덕지게 걸었다. 마침 산을 깎아내린 어느 산기슭에 다다랐다. 민 동지는 등의 상처를 무릅쓰고 그 모래 흙벽에 기대어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바로 졸음이 왔다.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었다. 자서는 안 된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누구의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졸음은 악마와도 같이 그를 엄습해 왔다. 다리를 힘껏 꼬집어 보기도했으나 허사였다, 이때 그는 생각했다. 정신력으로 이 난관을, 이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여야만 한다 하고.


그는 그 산기슭, 흙벽 앞에서 한 시간 이상이나 정신적인 투쟁을 한 끝에 간신히 일어섰다. 그 순간, 현기증이 났다. 몸이 픽 쓰러지려는 것을 벼랑에 의지했다. 이마에서부터 구슬땀이 떨어져 맨 발등을 적셨다. 찢어진 발바닥에 모래가 박혀 지독히도 아파왔다.


민 동지가 천신만고로 그 국민학교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어 있었다. 그는 기나긴 팔월의 하루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단 십 리 길을 오는 데 소비했다. 「단테」의 「신곡」 중 불바다를 건너는 고생도 이만은 못할 것이었다. 이때야 그는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 것이며 또 귀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로지 그 정신력 하나로 그는 목전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었다.


학교의 교실들과 강당은 모두가 중상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한쪽에선 마을 여자들이 식사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수십 명이 두 줄로 늘어섰는데, 한쪽에선 밥과 단무지를 주고, 다른 쪽에선 죽을 주고 있었다. 민 동지도 그들 틈에 끼어 있다가 죽을 한 공기 타 먹었다. 그 이상은 안 준다고 했다. 벌써 멀리 있는 사람은 잘 안 보였다.


교정 건너편에서는 세 군데서 대량 노천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역시 대부분 여자였다. 시체는 대체로 화상을 입고 있어 피부가 온통 흐늘흐늘했다. 들것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새끼로 한사람은 목을 걸고 또 한 사람은 다리 중간을 걸어 시체를 날라 왔다. 그러고는 그 시체를 통나무 불더미 위에다 집어 던지곤 했다.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민 동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아무런 감회도 느낄 수 없었다. 막연하나마 단지, 인생무상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민 동지의 이름을 부르며 경례를 부쳤다. 그를 바라보았지만, 안면에 온통 화상을 입고 있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간 중상 환자였다. 지금까지 민 동지가 본 바로는, 전신의 3분지 2 정도의 화상자는 약 24시간, 안면 화상자는 약 48시간 이내로 생명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사는 꽤 오래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늘 저녁도 넘기기 어려운 처지였다.


바로 그런 사람이 민 동지를 보고, 살아계시니 반갑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인정의 극치일 것이었다. 이것을 본 주위의 일하던 부인들이 모두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병사 역시, 퉁퉁 부어올라 잘 보이지도, 잘 뜨이지도 않는 눈으로 두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민동지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져 두 눈시울을 적셨다.


등화관제 때문인지 노천화장도 이제는 검은 연기만 뿜고 있을 뿐 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일을 하던 부녀자들도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가 사방은 점점 조용해갔다. 원자탄이 투화되던 여러 날 전부터 일기는 화창하여 비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었다. 하늘에는 별이 점점 총총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구의 시체를 보았고, 또 운명하는 것도 보았다.


산 벌판 속에서 그들과 함께 말없이 2, 3일을 누워 지냈으나 아무런 공포감도 나지 않았다. 나 역시 불원간 저들과 동일한 운명에 놓일 거라고 체념해서인가? 또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못 이겨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 그러한 것인가? 혹은, 신심 공허 허탈 상태에 놓여있어 그러한 것일까, 민 동지 자신으로서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민 동지는 교정 밖으로 나와 우두커니 길옆에 서서 있었다. 때마침 초승달이 하늘에 은은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비만 안온다면 저 달이 우리 집 뜰에도 비치고 있을 테지. 약 열흘 전에 민 동지는 「히로시마」에서 전속하여 간다고 고향에다 편지를 내었었다. 그래서 지금은 타처에 있는 줄 알 것이다. 완전한 보도 관제를 하니 「히로시마」 최후의 날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보도가 되었다 하여도 자신이 「히로시마」에는 없는 줄 알 것이니 이점은 실로 마음이 후련하다. 민 동지는 얼마를 서 있었다. 무아의 경지였다.


이때 인기척이 나면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헤이따이상」하고 말을 걸었다.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15여 세의 한 남자와 두 사람의 부인이었다. 자기 집에 가서 쉬라는 것이었다. 민 동지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의 집은 비교적 큰 집이었다. 민 동지는 흙과 피와화농한 것으로 뒤범벅이 된 왼발을 걸레로 대강 문지른 다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침구에 몸을 던졌다. 그들은 지극히 친절하였다. 모기장도 쳐주었다. 잠결에 문득 듣자니, 그 집에는 고참 군인이 한사람 있는 모양이었다.


「한또슛싱 와 나이무모 야센모 유슈다가 요 니게루 까라 고마룬다.」半島出身は内務も野戦も優秀だが、よ~逃げるから困るんださらば広島よまた来るまでは(반도 출신은 내무도 야전도 우수하나 잘 도망을 쳐 곤란하다.) 이 말을 듣고 민 동지는 그들이 자기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각별히 후대하여 준다는 것을 알았다. 지각이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튿날 아침, 민 동지가 눈을 뜬 것은 열 시였다. 그들은 물수건을 주고, 또 귀한 쌀밥과 흰죽 두 가지를 주었다. 민 동지는 죽만 먹었다. 더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 집을 나왔다. 더 있으라는 것을, 산속의 육군병원 분실로 간다고 했다.

<중략>


눈을 떠보니 기차는 어느 역에 도착하였다. 아침해에 눈이 부시다. 역명을 보니 「오-다」였다. 많은 군인이 플랫폼에 나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민 동지는 군인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시내로 들어갔다. 여학교다. 「히로시마」 제5 육군병원의 분실이라고 했다. 역에 나온 군인들도 모두가 입원환자들이었다.


그날 새벽 기차 속에서의 평화로운 명상은 또다시 여지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가슴에는 안도감이 들었다. 등화관제 속에 잠을 이루려 하니 옆자리에 누운 환자가 몹시 신음을 했다. 그 환자는 바른팔에 손바닥만 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간호병이 와서 다른 발에 주사를 놓아주었다. 아마 진통제 같다. 잠시 후 신음은 그치고 조그마한 소리로 자장가를 부른다. 서양 것도 아닌 일본 노래다. 그러다가 나중엔 ‘어머니’ 하더니 잠이 든다.


민 동지는 그가 나이 어린 병사로서 몸이 아프니 어머니 생각을 하며 잠이 든 줄 알았으나 이튿날 일어나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 환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맞은 주사자리는 흑갈색으로 이미 변질되어 있었다. 죽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날이 환자 수는 줄어갔다. 그 당시는 도저히 이해 가지 않았다. 과도의 피로와 적기에 치료를 받지 못한 탓으로만 생각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 무서운 「감마」선의 작용이었다.


원폭에는 다섯 종류의 방사선이 나오는바α선 β선 γ선 χ선, 그리고 자외선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도 γ선이 가장 위험하다. 치명상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체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 내의 양전기와 음전기의 균형을 잃게 하여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무서운 살인광선이다. 민 동지가 그 병원을 떠나던 8월 22일에는 교실이 거의 텅 비다시피했다고 하니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났을 것인지 실로 궁금한 일이다.


8월 14일이 되었다. 그날도 역시 무더운 날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병원 내에서는 귓속말로 하나의 뉴스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일 즉 15일에 중대 발표가 있다는데, 그것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큰소리로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에서 귀로 퍼져나간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공기가 병원 내에 가득 찼다. 그러나 헌병정치인 군국주의가 두려웠던 탓인지 아무도 이에 대한 코멘트를 하지는 않았다.


침울하고 중압적인 그날 밤이 지나고 8월15일이 되었다. 예측한 대로 정오에 무조건 항복 선언이 있었다. 그 이유의 하나가 된 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항복한 것은 분하나 기왕 질 것을 빤히 알면서도 무수한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고 불태우면서까지 전쟁을 계속해 온 것이 차라리 야속하다는 심정 같아 보였다.


손자(孫子)의 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라고 되어 있다. 적은 원자탄을 투하하는 마당에 본토방위라 하여 부녀자까지 동원시켜 대나무창으로 돌격훈련을 하다니, 당시의 군국주의적인 위정자들의 억지춘향격인 소위 「야세가망」도 유분수였다.


민 동지는 8월 23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였다. 초저녁이었다. 「시모노세키」역 구내와 역전광장 일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한국 군인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수라장이었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교차하는 소음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모두가 크고 작은 보따리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혼잡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 중 등화관제를 하느라고 역 구내의 전력을 줄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카키색 차림의 군복을 입은 군인과 휴대하는 짐도 모두 카키색으로 역 구내는 침침하고 음산했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징을 박은 군화 소리가 높은 역 천정에 메아리쳐서, 종전은 되었다지만 군대가 집결하였을 때와 같은 일종의 긴장감마저 풍기었다.


다시 「시모노세키」로 내려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풍채가 좋은 50대의 신사가 그를 보고 한국은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포츠담회담」 결과라고 했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나라를 위하여 건투하라고 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조를 보니 좋은 의미로그에게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모로 보나 상당한 지식층에 속하는 신사였다.


물론 2차대전 전쟁이 종식되면 결과는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며, 따라서 한국도 일본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형태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지만, 막상 그 노신사에게 소식을 전하여 들으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하루바삐 돌아가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겨레를 위하여 일을 할생각이 더한층 열렬하게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났다. 귀심여시(歸心如矢)란 말은 이런 때에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그 이튿날 아침에 민 동지는 또다시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다. 한국 군인으로 붐비는 것은 매일 반이었다. 백 톤 미만의 목선으로서 부산으로 떠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조금 있으니 탈 사람을 모집하러 다니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그 큰 배가 출범을 했다. 우리들의 배도 예정과 같이 그 배의 뒤를 따랐다. 항 외로 나가니 아직도 약간의 풍랑이 있었다. 큰 배는 속력이 빨라 얼마 안 가서 일행의 시야에서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배가 대마도의 북단을 멀리 떨어져 나갔을 때 갑자기 배의 엔진 소리가 멈췄다. 엔진의 고장이다. 배는 섰으나 그 배의 속력이 워낙 느리었던지라 파도에 배가 흔들릴 때는 가는 것인지 안 가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모두 공포에 싸였다. 풍랑은 매일반이나 배의 동요가 심하여진다. 파도가 넘쳐 들어올 때마다 오싹오싹하여진다. 선원 세 명이 기름투성이가 되어열심히 고치긴 했으나, 좀처럼 발동이 걸리지를 않았다. 여러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구름은 개기 시작하고 파도도 좀 잔잔하여졌다. 오후 늦게야 배는 다시 항해를 시작하였다.


밤이 되니 고요한 달빛이 바다위의 금파 은파에 부딪치어 망망한 바다가 아름다웠다. 멀리 북쪽을 보니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모습이 눈썹과 같이 보였다. 파도는 자고 선내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시 활기를 띠었으며 그간의 피로와 공포도 씻은듯이 잊어버리고 희희낙락하게 담소를 하였다. 기쁨에 모두 잠을 자지 않았다. 한국땅이 보이니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육지에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이튿날 아침이 되니 인가는 잘 안 보이나 먼 산이 뚜렷하게 보이며 부산시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하여 배는 오후 세시 경 부산 앞바다에 있는 오륙도를 지나게 되니 작은 배들이 오갔다. 오래간만에 보는 선원이 입은 여름 베잠방이가 대단히 기이하고 시원하게 보였다 어느 병사가 "아, 저 베잠방이 참 시원하게 보인다. 바람이 쑥쑥 들어오겠다"고 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어떤 친구는 이 배가 걸어가는 것보다도 느리니 물에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쳐서 가고 싶다고도 하였다. 배는 작아서 큰 부두에는 대지를 못하고, 지금 부산 수상서(水上署) 사무실이 있는 「폰툰」에 대었다. 이리하여 여러 날의 고생스러운 항해, 아니 생과 사의 언저리를 방황하던 항해는 끝났다.


식사를 사 먹을 경황도 없이 민 동지는 부산역으로 와보니 귀향 군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고향인 안성까지 차표를 끊고 차에 올라 그대로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떠보니 차는 때마침 대전역을 통과 중이었다. 민 동지는 대전역에서 빵과 계란으로 요기를 하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래 약 한 달 동안 이상하게도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는데, 창문 밖을 내다보니 소낙비가쏟아지고 있었다. 민 동지는 그렇게 몸이 불편한 중에도 줄곧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군화를, 아픔을 참고 비로소 기차 속에서 신고 천안역 홈에 내렸다. 그는 혼자였다. 배 안에서 만났던 친구는 부산부두에서 내린 후 헤어졌다. 민 동지는 몸도 괴롭고 비도 오고 해서 역 안에 있는 대기실에서 안성으로 가는 차를 기다렸다.


정오가 좀 지나 안성역에 도착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바로 역전에서 민 동지는 옛친구인 염 씨를 만났다. 그가 급히 민 동지의 집으로 연락을 취해주었다. 시골이라 자동차도 없었다. 조금 후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뛰어왔다. 모두 그의 비참한 모습에 놀라며 기뻐들하였다.


그는 곧 인력거(人力車)를 타고 덕제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 동시에 바른 팔목과 이마에서 유리쪽 각 몇 개를 절개수술로 빼냈다. 민 동지가 귀가한 지 삼사일이 지났을 때, 개선한 미군들이 그의 고향 안성에 진주했다. 때문에 군수의 요청으로 민 동지가 환영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불편한 몸을 일으켜 그 환영사에서 영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오늘 이곳에 진주한 미군 여러분에게 환영 인사를 하기 위해 나온 나의 모습이 꼭 환자 같은 모양이어서 아마도 여러분은 놀라셨을 것입니다. 머리엔 붕대를 돌리고, 얼굴과 입술은 부어있고, 또 앞니가 부러졌으며, 발까지 쩔룩거리면서 이 단상으로 올라오는 나의 모습을 보고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는 재학 중 뜻밖에도 학도병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갔었습니다. 그래서 히로시마의 일본 군대에 있다가 지난 8월 6일, 미군이 던진 원자탄에 맞아 이렇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기에 바로 삼사일 전에 귀향했던 것입니다. 내가 당한 일은 나 개인으로 볼 때는 분명 억울하고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내가 당했던 일이나,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일, 그리고 여기 계시는 미군 여러분이 이곳까지 오게 됨은 실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을 얻었고, 머지않아 완전독립을 이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일본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여러분의 진정한 친우로서 이렇게 환영사를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내 일생을 통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즐거움이며, 영광이며 또 감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민 동지의 환영 인사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미군 하나가 달려 나와 악수를 청하고는 기념으로 보관할 터이니 그 환영사의 원고를 달라고 했다. 민 동지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재미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학도병으로 억울하게 끌려간 민 동지가 원자탄을 맞고 쓰러졌을 때, 그를 끌고 갔던 「노리모도」 특무조장은 멀쩡한 몸으로 나타나 그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미군이 던진 원자탄 덕분에 아직도 부상 중인 그가 자기에게 원자탄을 던진 그 미군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환영사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이 두 가지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역사적인 아이러니였으며, 또 운명의 심한 장난이 아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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