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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고집불통 빌 게이츠는 어떻게 최대 자선사업가가 되었나

워런 버핏이 가르쳐준 두 가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어라
북클럽 오리진 작성일자2016.07.07. | 60,606  view

꼭 읽어볼 만한 글을 소개하는 북클럽 오리진의 [오늘의 큐레이션]입니다.


오늘은 빌 게이츠에 관한 글 두 편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25년 우정에 관한 회고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빌 게이츠의 83세 부친이 아들의 성장 과정에 대해 회상한 글입니다.


빌 게이츠는 7월 5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워런 버핏을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고 그후 자신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워런 버핏은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이사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아버지 빌 게이츠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고집불통' 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컴퓨터 기업가로 자랐고 자선사업가가 됐는지를 설명합니다. 거기에는 22년 전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 자신의 아내이자 아들의 어머니였던 매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버핏을 아들에게 소개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지금은 책 많이 읽는 세계 최대 부자이자 자선사업가로 우뚝한 빌 게이츠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명한 부모의 조력과 나이를 초월한 좋은 친구와의 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인성 형성 과정과 자녀 교육에 관한 생각을 자극하는 내용입니다.


원문을 일부 축약하고 개인의 회상 형식으로 화법을 바꿔 소개했습니다. 아래에 원문도 함께 링크합니다.

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을 못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워런 버핏입니다. 그와 만난 날은 정확히 25년 전 오늘이었습니다. 1991년 7월 5일.

그 날짜가 이렇게 제 머리 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 멜린다에게는 이 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우정이 시작된 날로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의 우정은 우리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더 낫게 바꿔놓았습니다.

워런 덕분에 우리 부부는 평생에 걸쳐 해도 못다 할 일 두 가지를 하게 됐습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는 일입니다. 4반세기 동안 워런과의 우정을 이어오면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많이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워런이 우리에게 나눠준 지혜의 정수들을 종종 다시 꺼내 이야기하곤 합니다. 또 그가 했던 재미있는 말이나 행동들을 떠올리고는 키득키득 웃기도 하지요.

오늘 그와의 우정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와 함께했던 시간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순간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설득으로 시작된 우정

얼핏 보면 워런과 저는 이상한 조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고지식한 엔지니어인데, 그는 이메일조차 쓰지 않는 투자가이지요. 실제로 저 자신도 그와 친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991년이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후드 커낼에 있는 가족 휴가 별장으로 와서 지인들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행 안에 워런도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가기가 싫었습니다. 일이 너무 바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워런을 만나보면 관심이 갈 거라고 우기더군요. 그래도 저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것 보세요, 엄마. 그 사람은 그저 종이 조각(주식)을 사고 파는 사람이라구요. 진짜 가치를 늘리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국에는 어머니의 고집에 졌습니다. 가서 2시간만 머무르다 회사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가서 워런을 만났지요. 그가 제게 질문을 하더군요. 소프트웨어 사업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작은 회사가 IBM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도 묻더군요. 갖고 있는 기술력은 무엇이고 가격 책정은 어떻게 할 건지도 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전까지 아무도 묻지 않았던 핵심적인 질문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졌습니다. 순식간에 그와의 대화에 빠져들었지요.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대화 중에도 그는 거물 투자자의 티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나 겸손했습니다. 그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상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대화에서 우리의 깊은 우정은 시작됐습니다.

여섯 살 아이 같은 버핏의 식습관

워런에 대해 알아가면서 놀란 사실 한 가지는 그의 식습관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6살 때 좋아했던 식습관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애들 음식 기간은 졸업을 했지요. 하지만 지금도 대개 햄버거와 아이스크림, 콜라를 즐겨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와 저녁 식사를 하러 외식을 나갈 때면 그렇게나 즐거웠습니다.

그와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으로 그를 초대했습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그가 오레오 과자를 꺼내더니 봉지를 뜯더군요. 그걸 본 우리 아이들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그가 좋지 않은 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워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식습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민이 될 때는 단축키 2번을 누른다

저의 사무실 전화에는 단축 번호가 딱 2개 입력돼 있습니다. 1번이 엄마, 2번이 워런입니다. 워런과 통화하는 시간이야말로 저의 일주일 일과 중에서 최고의 시간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끊임없이 배웁니다. 그와 저는 기업, 정치, 세계의 여러 일들, 새로운 혁신 같은 것들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이런 것들을 함께 공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지요. 버핏은 투자자의 관점에서, 저는 기술전문가의 눈으로 그런 일들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재단의 이사이기도 한 워런은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나 좋은 생각과 대화의 조력자입니다.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 부부는 "워런 같으면 어떻게 할까?"라고 자문해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답이 나옵니다. 워런은 평소에는 저와 친구 같지만 어떨 때는 저보다 훨씬 더 현명해서 아버지같이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투자할 줄 아는 사람

워런은 명민한 투자 혜안 때문에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평판을 얻었지요. 하지만 그는 사람에 대한 투자에서도 똑같은 재능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능력, 그리고 그들이 그로부터 즐겁게 배울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보면서 저는 늘 놀랍니다.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몇몇 사람들과의 우정을 가꾸는 데 시간을 기꺼이 할애합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자신이 읽은 기사들 중에 우리가 재미있어 할 것들을 이메일로 보내곤 합니다.

그런 식으로 지난 25년 동안 워런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내가 바라는 그런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워런처럼 사려깊고 친절한 친구가 한 명만 있다면 굉장한 행운일 겁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이 들게 하고, 인생에 대해 그가 느끼는 즐거움을 나눠줍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일을 잠시 미루고 시간을 냅니다.
지금도 오마하에 그를 만나러 갈 때면 워런은 직접 공항까지 나를 데리러 차를 몰고 옵니다. 작은 행동이지만 제게는 온 세상과 같은 의미를 주지요. 저는 비행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립니다. 워런이 기다리고 있다가 새로운 이야기나 농담을 들려줄 거란 생각에 들뜹니다. 또 한번 그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함께 웃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워런, 우정에 감사합니다. 함께한 25년, 너무나 멋졌어요. 앞으로도 더 많은 추억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래요.

빌 게이츠의 성공담 뒤에는 성실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름도 같습니다. 올해 83세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입니다. 그는 아들이 숨가쁜 IT업계에서 정상을 향해 달리는 동안 막후에서 소리 없이 도왔습니다. 아들이 세계 최고 갑부가 되어 주체하기 힘든 부를 누리게 됐을 때는 아내와 함께 자선 사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버지 게이츠는 지난 13년 동안 재단을 맡아 관리했습니다. 게이츠 집안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재단에 상주하면서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지금은 300억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자선사업단체가 된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회장직을 맡아 관리해오다 이번에 아들 빌 게이츠가 회장직을 맡아 경영에 나서면서 공동 회장이 됐습니다. 7개월 전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에서 물러난 빌 게이츠는 앞으로 재단의 공동 회장을 맡아 자선 사업에 전념할 뜻을 밝혔습니다.




아버지 게이츠는 그동안 외부의 조명을 피해왔습니다. 재단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공식 이력 이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습니다. 이곳에 올라있는 내용에 따르면 시애틀의 변호사, 2차대전 참전용사, 비영리 자원봉사자, 세 자녀의 아버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번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를 공개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집불통 아들을 어떻게 길렀고, 아들이 어떻게 컴퓨터에 빠져들어 업계 기린아가 될 수 있었는지, 자녀에 대한 훈육과 자율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2005년 비영리 지도자들 모임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나는, 내 집에서 자랐고 내 음식을 먹고 내 이름을 쓰는, 따지기 좋아하는 어린 사내아이가 장래에 내 고용주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 집안은 대체로 화목했습니다. 아내 매리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뒀지요. 맏딸 크리스티, 중간의 아들 빌, 그리고 막내딸 리비입니다.

아이들은 보드게임이나 카드, 탁구 같은 경쟁적인 게임을 즐기면서 컸습니다. 우리는 가족만의 리추얼을 두고 지켰습니다. 가령 매주 일요일에는 같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요.

저는 아이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지만 감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뒀습니다. 우리 세대가 대개 그랬지요. 더구나 저는 변호사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에도 단어를 신중히 고르는 버릇을 어쩔 수 없더군요.

그런 저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위압적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맏딸이 그러더군요. "집에 오시면 의자에 앉아 저녁 식사를 했지만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어디 한번 안아보자'는 식으로 감정을 내보인 일은 한 번도 없었죠."

11살에 책 읽더니 질문 쏟아내기 시작

일상적인 자녀 양육은 아내가 맡아 하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시애틀 로펌에서 경력을 쌓는 데 전념했지요. 아내는 시애틀 은행가의 딸이었지요. 운동선수였고 고교와 대학시절 우등생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저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전업 자원봉사자가 됐습니다. 회사 이사회 일도 했지요.

아내는 양가집에서 자란 대로 자녀들을 모범적으로 키우려 애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하고 음악 레슨도 받게 했지요. 옷도 늘 단정하게 입도록 했고, 시간을 엄수하고, 집에 방문하는 어른들과도 잘 사귀도록 했지요. 대체로 아들은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아들 빌은 일찍부터 학습열이 높았습니다. 세계 지식대백과 시리즈(World Book Encyclopedia)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지요. 우리 부부는 아들이 원하는 책은 다 사주면서 독서욕을 북돋웠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사람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걱정도 되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파티에서 손님을 맞게 하거나 제 업무를 돕는 급사 일도 시키는 식으로 사교성을 키워주려고 했습니다.

11살이 됐을 때 아들의 지적인 성장세가 눈에 확연해지더군요. 국제 문제, 비즈니스,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순응하던 것들에 대해서도 따져들기 시작하더군요. 어른이 되려는 징후였지요.

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이 놀랍고 기특했어요. 하지만 일상적인 양육을 맡아야 했던 아내로서는 성가신 일이 시작된 거였죠. 아들은 그전까지 엄마의 통제 본능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반항하고 고집을 피우다가 곧잘 엄마와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방 청소라든가 저녁 식사 시간 엄수, 연필 물어뜯기 같은 일로 마찰이 늘어갔지요. 가족들로서는 점점 골치덩이가 커지는 형국이었습니다.

아이는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저는 중재 역을 하려고 했습니다. 충돌하는 모자를 떼놓고 진정시키곤 했지요.

12살에 대드는 아들에게 찬물 세례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습니다. 12살 난 아들이 엄마와 언쟁 끝에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말로 말이지요.

보다 못한 내가 옆에 있던 컵의 찬물을 아들 얼굴에 끼얹고 말았습니다.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화가 폭발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지요. 아들 녀석의 대꾸가 가관이었지요. "샤워, 고맙습니다!" 이러는 겁니다. 글쎄.

우리는 결국 아들을 심리치료사에게 데려갔지요. 상담사는 아들이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결국에는 아들이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면서 최선의 대처법은 아들을 풀어주는 것이라더군요.

저는 아들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수긍이 되더군요. 저 자신이 어린 시절 비교적 자유롭게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너그러웠고, 위로는 7살 터울의 누이만 있었던 데다가 아버지는 가구점 사업에만 몰두했습니다. 더구나 일찍 집을 떠나 독립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13살에 자율의 숨통을 틔워줘

우리 부부는 아들 게이츠를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자율적인 생활의 숨통을 틔워줬습니다. 13살 소년으로서는 드물게 일찍부터 독립된 삶의 기회가 주어진 거였죠. 거기서 아들은 운명적으로 컴퓨터를 발견한 겁니다.

그 뒤로 아들은 집에서 떨어져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우리는 아들의 후원자가 돼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하버드대 4학년 때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다며 공부를 그만뒀을 때는 걱정이 되더군요. 마지못해 승낙은 했지만 다른 부모들처럼 자식이 무사히 졸업을 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아들이 회사를 시애틀로 옮겨 왔을 때는 기뻤습니다.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거처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들이 큰 미팅 자리에 갈 때는 늘 깨끗한 셔츠를 입을 수 있게 신경썼고, 매주 우리 집에서 하는 일요 만찬에도 식구가 다같이 모이도록 했습니다.

저는 작은 회사를 자문해본 변호사 경험을 살려 아들 회사를 도왔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이사회에 적임자들을 물색해서 충원했고, 1980년 아들이 대학 친구 스티브 발머를 회사에 영입하는 과정에서도 설득을 도왔습니다.

자선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던 아들 

마이크로소프트 상장 때도 아들의 걱정을 덜어주어 결국 억만장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아들이 거액의 자산으로 인한 새로운 압박과 고민이 생겼을 때 우리 부부는 아들을 자선 사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들은 처음에는 자선 사업에 미온적이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자선 기부를 권하다가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요. 그때 아들은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제 회사를 경영하고 싶을 뿐이라고요!" 아들은 당시에 자선사업 자체에 반대한 게 아니라 숨가쁜 회사 일에 대한 집중력을 늦추기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아내의 설득 끝에 아들은 회사 내에 미국 최고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를 위한 모금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 뒤에 아내를 따라 전국 유나이티드 웨이 이사회에도 가입했지요.

재산이 늘어나면서 시애틀 지역의 비영리 단체들이 기부를 요청하는 서신이 쇄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들은 회사를 퇴직한 후나 60살쯤 됐을 때에나 자선사업에 보다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었습니다.

암으로 숨질 때까지 자선 권유한 엄마

하지만 아내가 희귀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 아들의 자선 사업 계획은 앞당겨 진행되게 됐습니다. 아내는 투병 중에도 아들에게 자선 사업을 더 독려했지요. 아내는 1994년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제 나이 70세였습니다. 아내의 장례식 날 집에서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내 걱정은 말라고, 10년은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나고 나니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쯤 지나, 아들 내외와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서 있다가 제가 자선 사업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비영리단체의 기부 요청을 선별해서 지원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했지요.

일주일 후 아들이 약 1억달러를 떼내 재단을 세우더군요. 제가 운영을 맡았습니다. 부엌 식탁에서 지역 암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위한 8만달러짜리 첫 수표를 발행했습니다. 저는 의욕을 되찾았고 재혼도 했습니다.

제가 기부 신청자를 선별해 아들에게 알려주면 아들은 회신했고 저는 선정자들에게 수표와 함께 1쪽짜리 축하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재단 일은 규모가 점점 커졌고 교육과 백신 같은 분야로 확대돼 나갔습니다.

재단 일을 맡아 하면서도 저는 결국 언젠가 아들 내외가 이 일을 물려받아 전담할 때까지 한시적인 관리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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