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오늘의 큐레이션]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믿을 수 없다"

조회수 2016. 7. 20. 22: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현대 심리학 "내면의 성찰도 확실한 앎을 자신할 수 없어"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볼 만한 글을 소개하는 북클럽 오리진의 [오늘의 큐레이션]입니다.


오늘은 철학자의 글입니다.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에는 '스톤(The Stone)'이라는 오피니언 코너가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시의에 맞는, 혹은 시간을 초월한 주제를 두고 생각을 교환하는 사이버 지식 포럼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정신의 문제라든가, 우주와 존재의 기원, 도덕 가치의 근거, 동물의 권리 같은 인문학적인 주제에 대해 정상급 학자들이 첨단의 생각들을 풀어 놓습니다.


지난 18일자에는 알렉스 로젠버그(Alex Rosenberg, 1946년생) 듀크대 철학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정신도 알지 못하는가(Why You Don't Know Your Mind)'입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싶을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 전반은 물론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 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지식(knowledge)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진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이 그 지식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이른바 인식론의 문제입니다. 이를 두고 철학사에서는 크게 경험주의(empiricism)와 이성주의(rationalism)가 맞서왔습니다. 전자는 우리가 관찰과 감각적 경험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후자는 직관과 내적 성찰을 통해서만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성주의의 근대적 기초가 바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입니다. 하지만 이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여러 도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반론의 차원이 다릅니다.


경험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이전까지 미지와 신비의 대상으로 남아있던 것들이 하나둘 풀려난 결과입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 의식의 영역까지 뇌과학의 부상과 더불어 연구가 깊어지면서 드디어 '블랙박스'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글은 그 연장선상에서 경험과학의 입장에서 나온 최신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AI)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인간의 두뇌조차 마지막 신비의 아우라를 잃게 될지 관심이 고조된 요즘입니다. 최근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어느 지점까지 가 있나 한번 일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철학이나 심리학에 관한 기본 이해가 없을 경우에는 어떤 부분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 아닌 에세이여서,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대체로 일반 독자들도 내용을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래에 원문도 함께 링크합니다.

NYT 스톤 기고문 원문 바로가기

출처: @JerzyGorecki

우리는 타인의 정신(mind)을 결코 진실되게 알 수는 없다고들 흔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머리 속을 들어가볼' 수는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자신의 정신을 아는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어보는 경우가 드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이라면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정신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하지만 착각입니다.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은 크게 따져보지는 않은 채, 자기 생각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식적인 믿음을 공유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적어도 몇몇 아주 중요한 결론에 대해서는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성찰(introspection)을 통해 확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확신의 대상에는 가령 존재라든가, 영혼의 비물질성(그리고 불멸의 가능성),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한 자각, 의미와 도덕적 가치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이 '스톤'(뉴욕타임스에서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블로그) 코너에서 개리 거팅(Gary Gutting, 1942년생) 노틀데임대 교수는 위에서 말한 사상적 전통이 현대 철학에 와서 어떻게 계속해서 '초월적' 혹은 '순수' 의식에 대한 탐색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해보였습니다. 이 순수 의식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경험에 충만한 중요성을 제공한다는 거지요. 토머스 네이걸(Thomas Nagel, 1937년생) 뉴욕대 교수 또한 이 코너에서 똑같은 근거를 가지고 경험 과학을 압박했습니다.


우리가 '정신의 눈'이라고도 부르는 이 내적 성찰(Introspection)은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최선의, 어떤 경우에는 유일한 권위라는 엄청난 확신을 줍니다.


왜냐 하면 우리 모두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 관해서는 직접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정신 속에서,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안다고 확신합니다.

출처: @geralt

하지만 오늘날 인지 과학과 행동 과학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들은 그런 확신을 점점 침식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각종 미디어에는 우리의 인지와 감정, 감각을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얻은 연구 결과들이 실리는데, 직관에 반하는 것들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발표됩니다.


이런 결과들의 다수가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자각에 이끌려 믿고 있는 기대와 가정, 편견들과는 일관되게 배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지 과학과 신경영상(神經映象, Neuroimaging), 그리고 사회심리학에서 진행한 통제된 실험 결과들을 보면, 우리가 하는 행동의 실제 동기와 우리가 확신하는 믿음의 정당화, 우리 감각 기관의 정확성에 관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할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은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1916~2007) 같은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나오기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리벳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의도할 때 드는 의식의 느낌은, 행동을 낳는 뇌 처리 과정이 있은 후에야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후에 행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통념이 틀렸다는 뜻) 1980년대에 처음으로 그가 이런 사실을 발견한 이후 같은 연구 결과가 수백 번 반복되거나 더 정교하게 재현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외과의사 로렌스 바이스크란츠(Lawrence Weiskrantz, 1926년생)는 '블라인드사이트(blindsight, 맹시: 시각 자극 처리에 대한 의식적 경험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극을 처리하는 현상)'를 발견했습니다. 색에 대한 의식적인 감각은 없이도 대상을 색으로 식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눈 먼 원숭이들, 그 다음에는 일부 눈이 먼 사람들한테서도 그런 능력이 확인됐습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이런 연구를 보면, 우리가 시각적인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때조차도 행동은 시각 정보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정신이 오판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을 현혹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그런 중에도 철학은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데카르트 철학의 관점을 대체로 견지해왔습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제1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에서 말하기를, 우리 자신의 정신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다른 어떤 믿음보다 신뢰할 만하다고 했지요.

갤런 스트로슨(Galen Strawson, 1952년생) 텍사스대 교수는 최근 이곳 '스톤'에 발표한 글에서 수 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의 확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의식의 경험이 무엇인지 안다. 왜냐 하면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적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그는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에서 궁극의 본질적 특성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이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경험 과학은 우리의 내적 성찰과 의식이 자신을 아는 지식의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단히 인상적인 증거들을 계속해서 쌓아왔습니다.


철학자들이 의지하는 내적 성찰과 의식은 인간 이외에 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원천으로서도 둘 다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그릇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 오판의 가능성은 데카르트가 저지른 또 다른 실책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동물들은 정신적인 삶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인 구달을 비롯한 영장류 동물학자들이 세심하게 현장 관찰을 한 결과를 보면 영장류도 '정신의 이론'을 발달시켜 왔음을 보여줍니다.


이들도 다른 개체의 장래 행동에 관해 (때때로 정확도가 높은) 추측을 하기 위해 '정신 읽기(mind reading)'에 들어갑니다. 정신 읽기는 심리학자들이 다른 동물들도 행동에서 선택을 낳는 과정에서 협력하는 욕구와 믿음 같은 것(=정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정신은 어떻게 생겨났나


과거 오랫동안 진화가 진행돼 오던 중에 어느 시점 이후, 유기체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개체가 위협적인 행동을 취할지 여부를 예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혼자서는 달성할 수 없는 결과를 얻기 위해 다른 개체와 상호 조율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런 환경은 정신 읽기를 강력하게 선택하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인지 능력의 변이가 이런 적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처럼 미약한 종은 사바나의 거대한 동물군 속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신 읽기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정신을 아는 데 있어서도 아주 불완전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타인의 행동(언어 행동을 포함)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믿고 바라는지에 대해 결코 정확하게는 분간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그의 머리 속까지 들어가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우리의 예측은 종종 대단히 불분명하고 자주 틀립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정신 읽기란 것도,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하는 다른 적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설계의 문제'에 대한 불완전한 '신속하고 조악한' 해결책일 뿐입니다.


정신의 이론을 갖춘 덕분에 우리는 차츰 먹이 사슬의 정점까지 오를 수 있었고 그런 정도까지는 충분히 좋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렇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의 상당 부분은 정신 읽기가 자리잡고 난 후에 인간의 언어 사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두뇌의 조직과 기능을 들여다보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한 조사와 자폐증 연구, 유아의 '잘못된 믿음' 감지 실험 결과들을 보면, 정신 읽기는 우리의 두뇌에서 상대적으로 잘 배치된 모듈입니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선천적인 것이지만 고장이 날 수도 있습니다. 고장의 원인은 종종 유전적인 것이며 유아 발달 기간에 식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자의식도 실제로는 위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정신 읽기 능력이 우리 자신의 정신을 겨냥해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의식이라는 것도, 정신 읽기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추측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와 똑같이 온갖 오류와 추정, 직접 증거 결여의 문제를 갖고 있어서 현혹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일찌기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우리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때 보게 되는 것은 이미지들뿐입니다. 또한 듣는 것이라고는 묵언의 음향(silent speech-sounds)뿐입니다.


이런 감각(이것과 더불어 감정)이야말로 자의식의 유일한 내용물이며, 내적 성찰을 통해 우리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입니다.


내적 성찰에 사용되는 자료들은 타인의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그리고 때로는 미각)을 통해 제공받는 감각 자료들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정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는지를 파악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욕구와 믿음을 파악하려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 자료들-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말 대신에 이미지와 묵언-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그만큼 훨씬 더 잘 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타인의 정신과 자신의 정신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정보의 양에 있을 뿐입니다. 원천 자료나 자료의 질적 차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 결코 직접 접근할 수 없습니다. 피터 캐러서스(Peter Carruthers, 1952년생) 매릴랜드대 교수가 처음 주장했듯이, 자의식이란 우리 안쪽으로 방향을 돌려놓은 정신 읽기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마도, 흄 같으면 내적 성찰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준다고 답했을 테지요. 하지만 그런 설명은 실험 과학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 증거의 일부는 fMRI를 활용한 연구 결과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자폐증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연구 결과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타인의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결여된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 동기를 자각하고 자술하는 데에도 한계를 보인다는 점에서, 정신 읽기의 모듈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 역시 타인의 정신 읽기와 자신의 정신 읽기 능력 둘 다 결여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이 두 능력이 별개의 것이라면 적어도 일부 자폐증 어린이들과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이 중 한 가지 능력이 없더라도 다른 능력은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geralt

우리가 다른 사람의 정신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읽는다는 사실은 인지 과학이 의식과 작동 기억(working memory)-우리가 뭔가를 계산하고 결정하고 '정신 앞에 즉각 떠오르는' 선택지 중에서 고를 때 가동하는 이미지와 묵언의 두 과정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봐도 명백합니다.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의식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이란 오로지 감각의 양식에서만 비롯하되, 이런 감각 정보를 토대로 행동하는 '실행적'-결정과 '감정적'-느낌의 체계에 이르는 '포괄적 광대역'의 양태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의식이라는 것도 우리가 타인이 행동하고 있거나 장차 행하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감각 자료 이외에는 활용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발견들이 함축하는 결론은 심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요성은 비단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에게 직접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1인칭 시점이란 것은 없다는 겁니다. (자신의 의식조차 타인의 정신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감각의 내용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가 끼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글쓴이 알렉스 로젠버그(Alex Rosenberg)


미국 듀크 대학교 철학 교수. 과학과 사회 프로그램에 속하는 신경과학의 사회적 철학적 함의를 위한 연구소의 공동 소장을 맡고 있다.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의 두 번째 소설 '옥스퍼드의 가을(Autumn in Oxford)이 8월 출간될 예정이다.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