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다시 시작한다면 고전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조회수 2016. 7. 8. 23: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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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가을 '회상기' 출간한 유종호 전 예술원 회장 인터뷰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해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유종호 전 예술원 회장과의 인터뷰입니다. 원로 영문학자이면서 우리 문학 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해온 유 전 회장은 최근 산문집 '회상기'를 출간했습니다.


'도둑처럼 닥친'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여름과 가을에 몸소 겪은 일들에 대한 정치한 기억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잡지인 '현대문학'이 2015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했던 '회상기-나의 1950년'을 따로 묶어 책으로 냈습니다.


유 전 회장은 앞서 1941~1949년 기록인 '나의 해방 전후'와 1951년을 회상한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3부작이 완간된 셈입니다.


이번에 나온 '회상기'에서는 1950년 6월 26일 저자의 고향인 충북 충주읍 시골 용산리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잇따라 일어난 갖가지 일들이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일거에 맥고 모자와 고무신으로 하향 평준화하던 거리 풍경, 머리 위 제트기의 공포와 그 실체, 한밤의 적기가 노래와 행진, 폭격의 이모저모, 전쟁이 종결 단계라는 소문에 고개를 젓는 인민군 군관, 국군 수복 후의 사회상과 비명에 간 사람들 등 실제 그날 그때 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장면들이 소설처럼 그려집니다.


개인적인 회상이지만 우시 사회의 최대 격동기를 복원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물론이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픔과 희생을 기억하는 달 6월을 맞아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이메일 질문을 받은 후 꼼꼼하게 적은 긴 답을 보내왔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대한 체험과 견해, 그리고 문학과 삶에 대한 오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전문을 소개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근황을 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공적인 일이나 계획도 좋고 사적인 일상의 근간을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본시 고령자의 건강이란 대중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력이 약해서 독서 속도가 더딥니다. 또 군데군데 부실한 부위도 있지요.

그러나 젊은 날에는 생각도 못 했던 80고개를 넘고 보니 모든 게 장수에 따르는 세금이라 생각하게 돼요. 부친은 50대 중반에 돌아갔고 모친은 90을 넘겼는데 허리는 굽었지만 정신은 정정했어요. 모친만큼은 돼야 효도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문화재단의 <열린 연단; 문화의 안팎>에서 하는 토요 강연을 매주 청강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 정규적인 일입니다.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강연이라서 지적인 자극을 많이 받습니다.

2014년과 15년 이태 동안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직을 맡은 것이 마지막 공직이었지요.
출처: 현대문학 제공
출처: 현대문학 제공
-최근에 일련의 회고록을 내셨습니다. '그 겨울 그리고 가을' 이번에 '회상기'까지 세 권으로 '완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전체적인 계획을 염두에 두고 써오신 건지요? 다른 시기에 대해 더 쓰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평생을 교단에서 월급쟁이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1개월 정도의 계획은 모르지만 장기간을 내다보는 계획은 잘 되지 않았어요. 따라서 이 책도 전체적인 계획 하에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자기 경험을 정리하고 자기 정의를 도모하려는 잠재적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삶을 엮으면 소설 몇 권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한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직접적인 계기는 학생들이 해방 이전의 일제 시대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을 알려줄 세대적 책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해방 전후』의 첫머리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대학원 학생이 “저항 시인 윤동주가 왜 창씨개명을 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일제 시대 말기에 관부 연락선을 타려면 창씨를 해야 된다는 것은 일본인 책에도 나오지요. 그보다 창씨는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필수였어요.
또 창씨와 친일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요. 최남선, 유진오, 한상룡 같은 이는 세상에 친일 인사로 알려져 있지만 창씨 하지 않았어요. 또 일제 시대 하면 일본 헌병이 한국인을 마구 발길질하는 영화 장면의 연장으로 생각들을 하더라구요.

삼일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 정치를 표방하면서 헌병이나 헌병 보조원은 치안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어요. 내가 일본 헌병을 본 것은 해방 후의 일입니다.

해방 이전의 한국이 어디까지나 조선총독부가 관장하는 일본 영토의 일부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 대한 몰이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 분위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공식 용어는 <일제강점기>로 되어있지만 우리는 해방 이후 줄곧 <일정시대><일제시대>라 해왔어요. 공식 용어의 경직성을 피하기 위해 일제 시대라 했지요.)

우리 유소년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해방과 육이오였어요. 그래서 『나의 해방 전후』와 이번의 『회상기 - 나의 1950년』과 그 전의 『그 겨울 그리고 가을 - 나의 1951년』을 쓴 것이지요.

그 다음 시대는 경험자가 많고 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정해진 계획은 없습니다.
출처: 현대문학 제공
-옛날의 일들을 굳이 세세하게 떠올리고, 어떤 면에서는 제3자의 거명과 관련 사실의 거론으로 인한 위험을 무릅쓰고 책으로 쓰신 것은 어떤 생각에서인지요?
내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과거를 될수록 충실하게 복기해서 후속세대에게 알리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이상 제3자의 거명은 불가피하지요. 안 그러면 그건 기억이 아니라 창작이겠지요.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충실성을 지향했고 의도적인 왜곡이나 변개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점에 관한 한 장담할 수 있습니다. 과오나 착오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50년 전 60년 전 일에 어찌 착오가 없겠어요.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불가피한 오류 이외의 의도적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회상기』를 낸 직후에 어떤 독자의 전화를 받았어요. 육이오 때 유행성 결막염 때문에 오래 고생했고 그 때문에 충주읍내에 있는 동인(同仁) 병원엘 갔으나 의사가 부재중이어서 헛걸음을 친 얘기가 나옵니다.

그 병원의 의사가 정씨 성을 가졌고 안경을 쓴 깔끔한 얼굴이었다고 적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읽은 옛 동인 병원 의사의 따님이 아버지가 안경을 쓴 것은 맞지만 성은 정씨가 아니고 서씨라며 전화한 것이에요. 그 정도의 착오가 있다고 해도 내용에 큰 차이는 안 생기지요.

그 따님은 당시 여덟 살이었는데 아버지는 인민군이 후퇴할 때 군의관으로 데리고 가서 영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아버지 서형수(徐炯洙) 씨는 나주가 고향이었고 그쪽의 외가에서 컸다는데 당연히 고생이 많았지요.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충주를 늘 그리워했는데 한 번 가보니 옛날 집이 찾아지지 않았다고 해요. 우리 사회가 그 동안 얼마나 변했습니까? 늘 그리던 충주가 무대임을 신문기사를 통해 알고 『회상기』를 사보았다는 것이지요.

두 살 위의 오빠는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9월에 고국 방문을 한다니 그때 둘이서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육이오가 남긴 이산의 슬픔이나 상처는 이렇게 도처에 널려 퍼져 있어요.
출처: 현대문학 제공
-별도의 일기나 기록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대화 내용까지 다 기억하실 수 있는지 신기했습니다. 기억력이 각별하신 건가요?
초등학교 5학년 우리 나이 열한 살 때 해방이 되었어요. 그 나이에 일기나 메모를 썼을 리 없고 써두었다 한들 남아있겠어요? 육이오는 중학 4학년 때 맞았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지요.

다만 내가 수시로 기억의 필름을 돌린 것은 사실이지요. 해방이나 육이오나 너무나 강렬한 경험을 강요했기 때문에 되풀이 그 기억을 반추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21세기가 되고 60대 후반이 되어 『나의 해방 전후』를 쓰고 나서는 잊지 않도록 메모를 하였습니다. 우선 나는 내가 70까지 살 줄을 몰랐어요. 기대를 못한 것이지요.

대화체는 서술에 속도를 부여하기 위하여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모든 것을 서술체로 하면 답답하고 따분하지 않겠어요? 사건과 경험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읽기 쉽게 대화체로 한 것입니다.

대화체도 가령 인민군 진주 후에 부친에게 출근을 독촉하러 온 전문학교 졸업생 동료 교사가 “자고로 역사에서 남북이 싸워 북이 진 적이 없다”고 한 것 등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 얘기를 여러 계제에 친구나 지인에게 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 속담에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재주 한 가지는 타고난다는 것이지요. 나는 달리기도 더디고 운동을 못 했어요. 또 친화력도 사교성도 없었어요. 그런 처지에 설사 기억력이 조금 낫다고 해서 별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스스로 노력해서 개발한 국면도 있습니다. 또 조그만 소읍에서 자랐고 작은 학교를 다녀서 교사나 동기생 이름을 많이 기억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출처: 현대문학 제작 2007년 동영상 캡쳐
-'나의 해방 전후'에 이어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은 1951년을 다뤘고 이번 책 '회상기'는 1950년 6.25 발발 직후 여름 두 달과 가을의 일을 적었습니다. 특별히 이 시점을 집중해서 쓰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까도 말했듯이 내 어릴 적의 가장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알리고 싶었고 또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란 조지 산타야나(1863-1952,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우슈비츠의 어느 건물에 허술한 현판처럼 붙어있고 『그 겨울 그리고 가을』 서두에도 적어놓고 있지요.
-'회상기' 본문 중에 "해방 전후 좌파 지식인에 대해 일부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쓰셨습니다. 민주화 과정에서는 물론 지금도 지식인 사회의 좌우 대립 문제는 뿌리 깊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겪고 지켜봐 오신 원로로서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소방관이 순직하면 주변 인물들이 그를 천사표 모범 시민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이고 인지상정입니다. 해방 전후의 좌파가 결과적으로 불행한 길을 갔기 때문에 일종의 추모의 정도 가담해서 얼마쯤 미화되고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해방 전후』에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얘기한 것이지 추상론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또 이번 책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당시 지식인의 지적 수준이 민망한 것이었다는 게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나의 귀납적 결론”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초중등학교 학생이 어떻게 아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도 교사를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실력 없는 교사를 잘 알아보지요. 지방에서 초중등학교 교사라면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초고속으로 발전했습니다. 교육 수준의 향상이 대표적이지요. 그러나 지식인 사회가 진영 논리로 갈라져 있고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소아병>입니다.

사회인류학도로서 조선조를 연구하여 『한국의 유교화 과정』이란 노작을 낸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조선조가 성리학적 이념의 토대 위에 세워진 송나라보다 더욱 철저한 성리학적 사회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의 원리주의적 수용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사이엔 원리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관용의 정신과 유연성이 사고나 세계 이해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현대문학 제작 2007년 동영상 캡쳐
-우리 근현대사는 여전히 뜨거운 갈등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를 살아온 세대이자 지식인으로서 증언하려는 데에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소회가 깔려 있을 것 같습니다. '회상기' 머리말에는 "근자에 우리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부정 일변도의 역사관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고 쓰셨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아니면 노년에 이르니 삶을 좀 더 너그럽게 보게 됐다는 건가요?
가령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란 관점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20세기 한국 역사는 그 이전의 한국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어요.

또 평가란 비교 없이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없어요. 고려조는 몽고의 침략에 맞서서 완강하고 눈물겨운 저항을 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말았고 그 후 왕위 계승이나 관제 등 매사에 간섭을 받았습니다. 충열왕(忠烈王) 이후엔 고종, 원종 같은 칭호를 할 수 없어서 전부 왕이 되었습니다.

몽고 조정에 바치는 공녀(貢女)를 비롯해서 그쪽의 요구나 수요에 맞추어 젊은 여성을 구하기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이나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과 같은 관아를 두기까지 했어요. 일본 원정 시에 쿠빌라이가 고려조에 명한 선박 제조와 병사 요청은 거의 살인적으로 무리한 요구였어요.
한창 때 원 나라 서울에 가서 산 고려인이 3만을 넘었다고 되어있습니다. 모두 엽관 행위와 밀고와 같은 매국적 행태를 위해서였지요. 그 말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조선조에 와서도 세종 세조 때 까지는 반짝 잘 나갔으나 임진왜란, 병장호란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치욕의 역사였어요. 두 번 모두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씩 당했어요. 그 후의 당쟁과 민란은 분통터지는 일이었지요. 한말 직전의 망국적 행태는 말할 것도 없고요. 20세기 한국사도 이런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거에 비하면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피폐한 국토의 상징이던 붉은 산을 한 세대 안에 푸른 산림으로 만들었고 산업화를 통해 우리의 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습니다. 20세기 말 30년은 역사상 유례없이 우리가 중국 본토보다도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했던 시기입니다. 그걸 부정할 수 있겠어요?

그 과정에 야기된 억압과 부자유와 막심한 희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 아닌 것이 없다”는 벤야민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역사를 정치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민주 정치를 도입하여 실험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도외시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특정 정치 세력을 배타적으로 칭송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령 전 세계가 칭송하는 산림재생 하나만 보더라도 박정희는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고단하게 살아온 생활인으로서의 실감입니다.

젊은 날 경부선을 타보면 좌우 양변이 붉은 산의 연속이었었습니다. 절망감을 안겨주었지요. 50년대에 내한한 미국의 산림학자는 이대로 가면 한반도는 30년 내에 사막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당시의 신문을 찾아보면 나올 것입니다.

내 땅이라곤 단 한 평도 없는 처지이나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거진 수풀을 보면 가슴 뿌듯해지면서 내 자신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산림재생이 단순히 온 국민이 나무심기에 참여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1961년 12월 산림법이 공포되면서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녹화사업이 시작되었고 그 일환으로 화전민 이전 사업이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42만명에 달하는 화전민을 산림 밖으로 이주시키는 사업인데 그것은 1979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화전민들이 설득과 호소에 순순히 살림터를 떠나겠어요? 화전민을 그대로 두고 산림녹화가 가능하겠어요?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고 할 의향이 없으면서 독재라고 매도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학자나 저널리스트의 눈에는 영미의 지도자 아닌 모든 외국 지도자는 독재자였습니다. 심지어 샤를 드 골(1890-1970, 프랑스 대통령)도 독재자라 했습니다. 그들의 매도를 앵무새처럼 따르는 것은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내가 이전의 생각을 고쳐먹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사람은 나이 먹음에 따라 보수화되니 그런 면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란 쉽게 바꿔지는 게 아니지요. 동구권에 이어 소연방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고 이에 따라 조금은 변화된 눈으로 역사와 세계를 보게 된 탓도 있고요.

시야를 넓히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국가를 다녀보면서 선전과 실상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도 실감하게 되었고요. 세계가 복합적이고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문학적 상상력의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또 부정 일변도나 편향된 비판 일변도의 지식인의 행태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도 부분적 이유가 되겠지요.
출처: 현대문학 제공
-선생님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머리말에서 젊은 날의 '사적 울분과 사회적 공분의 감정'을 언급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데서 연유한 울분이고 공분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번 책을 보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부친의 소위 부역으로 1년간 수입이 없었고 그 와중에 1.4 후퇴를 맞아 미군부대 재니터(janitor, 잡역부) 노릇을 하면서 신산을 겪었습니다. 그후 내가 대학 졸업하던 해 1월에 부친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심화(心火)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 자가진단을 하고 정부를 원망했지요. 대학원에 첫 학기 등록만 하고 중퇴했는데 그 때문에 뒷날 받게 되는 수모와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 생계를 장남인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사적 울분이란 그러한 국면을 말하는 것이고 사회적 공분은 이번 책에도 나와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육이오 전후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를 염두에 둔 소리입니다.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지 않아요? 물론 나이 어린 공화국의 취약한 행정 능력이나 무경험 탓에 많은 비능률과 민원이 야기된 것은 참작해야 하겠지요.
출처: 현대문학 제작 2007년 동영상 캡쳐
-'회상기'를 보면 '보도연맹 처단'에 대한 언급이 조금씩 스치듯 나옵니다. 그동안 남북 대치 상황을 이유로 전쟁 당시 남한 정부(군경)에 의한 부당한 폭력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이 부분은 더 아시거나 기억나는 부분이 없는지요?
육이오 때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처리했고 전시의 혼란 속에서 정확한 인원 등을 기록해 두었을 리 없지요. 진보계 학자들은 20만에서 50만이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금 과장된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10월부터 조사 활동을 한 후 2009년 최종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거기 따르면 1950년 6월에서 9월까지 정부 주도로 희생된 희생자수는 4934명이라 되어있으나 이것은 너무 적은 수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수자는 희생자 연고자의 신고를 받고 확정한 것인데 시간도 많이 지나고 또 신고한다고 살아 돌아 올 리 없으니 신고를 기피한 데서 온 결과라고 추정됩니다.

당시의 인구 수, 추정 연맹원 숫자, 지역적 차이 등을 고려하면서 엄밀히 산정하면 좀 더 근사치에 가까운 숫자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말을 따르면 오제도와 같은 보도연맹 관계자들은 연맹원이 대략 33만명이라고 추산했다고 합니다.

서울 지역 같은 데서는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가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나서 남부 지방에선 삼십육계로 불행을 면한 이들도 있었지요. 희생자 숫자와 관계없이 매우 불행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주도하의 희생자는 자주 얘기하지만 인민군 치하의 희생자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어요. 가령 대전 지방에서는 인민군 후퇴 시 많은 지방 유지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고 지방마다 그러한 사례는 많을 것입니다. 대전의 참혹한 현장은 21세기 들어서서 매몰해 버렸다고 합니다.
출처: 현대문학 제작 2007년 동영상 캡쳐
-'회상기'를 보면 전쟁 발발 후 벌어진 국군의 후퇴와 수복 과정에서 '부역'의 문제가 나옵니다. (압권은 마흔다섯 나이의 교사인 부친과 열여덟 중학생 제자 군인(이승주)이 재회해서 나눈 대화 장면, 그리고 영어 담당 백준기 선생의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발언 아닌가 합니다.) 이승만 정부의 전후 획일적인 부역자 처리 문제가 민심 이반의 한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했습니다. '부역'과 '청산'의 문제는 일제강점기와 관련해서도 우리 사회의 뜨거운 쟁점입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이 부분은 유병진 판사의 『재판관의 고민』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번 책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둠으로서 중언부언을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복 직후의 백 선생 발언은 당시 남하했다 돌아온 사람들이 대체로 느꼈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라 생각된다. 남행길에 오른 이들은 그들대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이고 전황의 진행도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거기서 유래하고 축적된 울분을 부역 동료들에게 발산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중학생의 눈에도 그것은 헌병이나 경찰관은 모르지만 교사가 동료에게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표피적 현실 파악의 천박성보다도 역지사지하는 심성의 전면적 결여가 문제다.


백 선생의 반응은 또 부역자를 바라보는 이승만 정부의 공식 태도와도 동일한 것이다. 자기반성 없는 당시의 기계적 획일적인 부역자 처리는 이승만 정부의 중요 실정(失政)의 하나이며 공적에 비해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고 적절한 초기 대응을 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소수 극렬파(極烈派)를 제외한 부역자에게 사면령을 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억울한 사람과 불만 세력의 수효도 현격하게 줄고 국민의 지지도도 현저하게 높아졌을 것이다.


그릇 큰 선각자이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현실적 통찰력을 갖춘 인물임을 인정하는 것과 심정적으로 공감・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른바 친일 문제도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일 문제에 관해서도 우선 일제 시대에 대한 연구와 상황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15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것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입니다. 희망적 관측의 형태로 언젠가는 해방의 날이 오리라고 막연히 기대한 사람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전망하고 기대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희망적 관측은 우리가 말하는 미래 예측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통일의 구체적 형태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상황에 대한 개괄적인 그림과 또 어느 정도의 시기적 판단을 갖추지 않은 미래 예측은 허황되고 몽상적인 희망적 관측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것은 국내 거주자라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실감일 것입니다.

대부분 국내 거주자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점진적으로 꺼져버린 시기에 8• 15가 왔을 뿐 아니라 그 해방은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라는 타력에 의해서 초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을 위해 이렇다 할 기여를 한 바 없는 국내 거주자들에게 당연한 자괴감과 죄책감을 안겨준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괴감과 죄책감은 완강한 자격지심으로 굳어지고 그것은 흔히 그렇듯이 몇몇 과잉 반응으로 분출되고는 하였지요.

이렇다 할 행동적 기여가 없었던 터라 반일적(反日的) 혹은 민족주의적 정치 실천에 대한 과도한 중요성 부여와 소위 친일행위자에 대한 광범위한 규탄이 그것입니다.

정치 실천에 대한 중요성 부여는 그것 자체로서는 크게 문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말미암은 문화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상대적 평가절하가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행위자에 대한 규탄은 당연한 것으로 거기에 원론적인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매국 행위로 작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수령한 적극적 원조급과 일제 말기의 피동적 생계형 행위자를 일괄처리하고 규탄하는 것은 형평성을 잃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식민지 체제에서 초기의 반일 실천자가 친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나, 엄격히 말해서 국내 잔류 인구 치고 완전히 친일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는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도 문제입니다.

고명한 민족지도자가 해방 직전에 수통스러운 기록을 남겼다는, 최근에 공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된 사실은 치지도외할 개인적 사안이 아니라 당대 이해를 위해서 누구나 유념해야 할 사안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시 구체적 사안과 증거를 두고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중일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켰습니다.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한국현대사 5』에는 지원자 수와 입소자의 수가 적혀있습니다.

연도 지원자 입소자
1938 2,946 406
1939 12,348 613
1940 84,443 3,060
1941 144,743 3,208
1942 254, 273 4,007
1943 303,294 6,300
___________________________
802,047 17,594
6년간에 802,294명이 지원하고 17,594명이 입소하였습니다. 경쟁률이 45,6 대 1입니다. 지원 자격은 연령 17세, 신장 160센티미터 이상인 소학교 졸업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자 중 결격 사유가 없는 자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침략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일본군을 지원해서 상당한 경쟁률을 뚫고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된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중에는 일찌감치 전사하여 선전 자료가 된 리진샤꾸(李仁錫) 상등병도 있었습니다. 충북 출신의 이 불행한 청년은 하도 많이 홍보되어 초등학교 때 들은 그의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그가 지원병에 간 것은 물론 식민지 당국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지만 이렇다 할 일자리가 없는 농촌에서 하나의 일자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그에게 민족의식이나 식민지 상황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1939년에 지원자가 급증한 것은 한발로 흉년이 든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경쟁률이 심했기 때문에 혈서 지원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지원병으로 가는 것은 일종의 취직이었지요. 식민지에서도 사람은 먹고 살아야하고 혼인도 해야 하고 효도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고려와 고민 없이 획일적으로 분류하고 규탄하는 것은 최근 화제가 된 어떤 세도가의 칼춤 비슷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원병도 성격 상 친일행위자라 하겠지만 사실상의 희생자입니다. 과거의 생계형 친일행위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 보이는 말은 곰곰이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판단함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전에 쓰신 에세이집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에서 "축약된 역사 서술 속에 숨어 있는 추상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구체적 세목으로 한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 문학의 본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추상의 폭력'이라고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고 계신 어떤 것이 있는지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지요. 근자에 문경수란 재일교포가 일본의 유명 출판사에서 낸 『한국현대사』란 책을 본 적이 있어요. 2005년에 나왔으니 꽤 된 셈이지요.

외국 환경운동 사상가가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말하는 산림 재조성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또 산업화만 하더라도 250페이지에 이르는 책에서 <중화학공업화 - 한강의 기적>이란 소제목 아래 불과 1.5페이지를 할애했을 뿐이요.

기술 내용도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대체로 그때그때 신문을 장식한 불행하고 불편한 사실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다대수 구성원이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가 하는 중요한 사항은 소거(消去)하고 대소 사건만을 다룬 정치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생략의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상의 폭력이란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한 사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찌기 평론가 김현은 "1960년 이후 내 나이는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의 생각에 비춰볼 때 지금 인생 후반에 와서 차이나 연속성을 느낍니까?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무엇이며 더욱 공고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령 젊을 때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 안 피웁니다. 달라진 것이죠. 그러나 술은 그제나 이제나 멀리 했으니 연속성을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변한 면도 있고 안 변한 면도 있어요. 진취성이 없어서인지 젊은 시절에 좋아했던 문학이나 음악을 여전히 좋아하고 취향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뀐 것은 세계와 현실의 복잡성에 대한 감각이나 의식이 더 민감해졌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공감하지 못했던 가령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러시아 작가)의 “나는 역사의 오페라 대사를 믿지 않는다”라던가 “비뚤어진 결의 인간 본성에서 무엇 하나 반듯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칸트의 말에 끌린다고나 할까요?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눈은 경험에 의해서 계몽된 바가 많으니 크게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문학의 전락: 무라카미 현상에 부쳐'(단행본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에 재수록)라는 글에서 "하루키의 책은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쓰셨습니다. 하루키는 그때에 비해 인기는 더 높아진 듯하고 해외에서도 노벨상 수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입니다.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이른바 '만인 작가의 시대'를 맞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고 싶어서입니다. 선생님의 문학관이 비교적 이른바 '전통적 엘리트주의 문학'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오늘날 도전받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지금 생각하시는 좋은 문학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거기에 값하는 국내 현대 작가로는 누구를 꼽을 만한지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정도가 아니라 미구에 수상자가 되리라 예상됩니다. 무라카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탄생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탄생만큼이나 개연성이 있고 그럴 경우 21세기 세계의 한 징표가 될지도 모릅니다. 무(無)교육보다 더 곤혹스러운 반(半)교육된 다수가 세계의 주류가 되었으니까요.

지금 우리 청년들 사이에서는 독자가 거의 없어 보이는 토마스 만 세대의 독자는 중산층 특유의 안온한 독방에서 사유하며 읽는 교육받은 독자였어요.

파스칼은 “가만히 방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뜻의 말을 했지요. 이런 불행한 사람들이 다수가 되고 21세기 문학의 독자가 되어 광장과 거리를 누비며 황금마차를 타고 가는 부호 작가를 환호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노벨상 수상 작가가 몇몇 후배작가들을 전혀 평가하지 않다가 작품이 세계 도처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자 “수많은 독자를 당기는 작가는 분명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말로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는 보도를 접하고 맥이 빠진 적이 있어요.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돈과 군중 앞에 장사가 없는 것 같아요. 광장의 군중을 보고 슬며시 겁이 난 것이지요. 그만큼 세계가 변하고 문학 독자의 층위도 늘어나서 판단 기준도 다양해진 것이겠지요. 현재 세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이런 나를) 전통적 엘리트주의라 해도 할 수 없어요. 어릴 적에 『좁은 문』을 읽다가 “보들레르의 14행시 한 편을 위해서는 빅토르 위고의 전부를 주어도 좋다”는 말을 접하고 그 대담성에 공감한 바 있습니다.

일본 문학에 한하더라도 가령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 「인간의 양」이나 엔도 슈사쿠의 『침묵』 한 편을 위해서는 현재 일본에서 판매를 올리는 젊은 작가들의 전부를 주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짧고 고전은 너무나 많으니까요.
우리 쪽에서는 노벨상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노벨 문학상이 훌륭한 시인 작가의 작품을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하게 한 공이 크고 그 점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위원회의 상업적 변태성과 노벨상의 민낯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톨스토이, 릴케, 조이스 같은 최상급의 시인 작가를 거부하고 펄 벅, 처칠, 옐리네크에게 영예를 안겨주는 게 저들의 점잖은 상업주의입니다.

무라카미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당한 발언을 했다고 반가워하는 젊은 독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무라카미)는 평소 사회 정의나 인권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작가에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관심에서 조금 벗어난 위안부 발언을 하는 것은 수백만에 이르는 잠재 독자를 가진 한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이란 측면이 강하지요.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인사가 노벨상을 염두에 두고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어디서 레이저 광선이 날아왔는지 슬며시 꼬리를 내린 적이 있는데 그런 전략적 발언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만인 작가의 시대” 이전에도 수천만 부가 나간 조르주 심농(1903-1989, 벨기에 작가) 같은 작가가 있고 수많은 서양 역사소설 작가가 있었어요. 추리소설가도 있고요. 그런 한편으로 릴케나 발레리 같은 고독한 시인도 있었습니다. 그게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의 세계에요.

우리 문학에서도 가령 박계주, 한인택, 정비석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었어요. 요즘 그들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 겁니다. 고작 100부나 200부 한정판을 낸 백석을 위시해서 김소월, 정지용, 박목월, 김수영은 지금도 읽혀요. 군중으로서의 독자에게 이들은 완전한 이방인이지요.
-영문학자이시지만 한국 문학에 대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발언해 오셨습니다. 지금 한국 문학에 대한 소회는 어떠신지요? 마침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상을 받아 들떠 있습니다. 많은 분석과 진단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추가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최근엔 신체적 조건도 있고 해서 우리 문학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문학 일반으로부터 관심이 벗어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젊은 시인 작가들이 많아서 앞으로의 발전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한강의 수상은 우리 문학의 쾌거이며 본인은 물론 젊은 문인들에게 많은 격려와 자극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축하의 말을 보내고 싶습니다. 새로 대두한 한강의 독자층이 다른 국내 작가에게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한강은 우수한 젊은 작가인데 또 많이 있으니까요.
-지금 디지털 시대를 맞아 문명의 일대 전환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학의 위기를 넘어 인간의 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그런 이야기는 있었지만 최근에는 기술(인공지능이니 알고리즘이니 유전자편집이니)의 발달이 위협의 실감도를 한층 높이는 것 같습니다. 다가올 미래는 과거의 문법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도 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조언을 하고 싶습니까?
조언을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석유등잔 불 밑에서 자라다가 이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전력을 활용한 전등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현기증 나는 변화 속에서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니 정신 차릴 수가 없어요.

유튜브의 등장으로 해방 전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일본의 전쟁 홍보 영화를 방안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어요. 착잡한 감회였습니다. 이런 세상이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1960년대에 미국의 문명비평가인 루이스 멈포드(1895-1990)가 인공위성 발사를 두고 부질없는 20세기의 피라밋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했습니다. 인공위성 발사에 드는 비용을 제3세계의 빈곤타파를 위해 쓴다면 당면한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했어요.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성 발사를 위한 기술 개발이 결국 오늘의 전자 민주주의 시대를 촉진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 못 했지요. 그런 맥락에서 일개 인문학도가 무슨 유용한 조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인간 기술의 초고속 발전에 일말의 불안을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벌써 인간이 컨트롤하지 못할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 아닌 것이 없듯이 인간의 기술 발전에는 자기파멸 잠재성이 항시 따른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핵폭탄을 생각해 보면 쉬 해답이 나옵니다.
출처: 현대문학 제작 2007년 동영상 캡쳐
-최근에 읽으신 책 중에 추천해주실 책이 있으신지요? 평소에 가까이 두고 탐독하시는 책이 있습니까?
틈이 나면 고전을 읽고 있습니다. 최근에야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읽었고 이에 따라 그의 다른 저작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의 고전 시를 읽는 정도지요. 그리스 비극 읽기를 계기로 해서 그리스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역사책을 취미삼아 읽기도 하고요.
최근 네이버 문화재단에서 관장하는 <열린 연단: 문화의 안팎>에 도편추방에 관한 에세이를 쓴 게 있습니다. 혹 참고해주시면 나의 지적 방랑을 엿보실 수 있을 것이란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에세이 '쫓겨난 사람 쫓겨난 조개껍질'

-임기 마지막 해을 맞은 오바마는 며칠 전 인터뷰에서 자신은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기업인(entrepreneur)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선생님께서는 지금 20대를 다시 시작하신다면 여전히 문학평론가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삶을 살아보시고 싶습니까?
인간이란 막강한 우연의 횡포에 속절없이 노출된 가련한 갈대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우연의 논리에 따라서 문학비평을 하게 되었지요. 다시 20대가 된다면 그때 또 어떤 우연에 노출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출발한다면 그리고 문학을 하게 된다면 고전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령 중국의 시나 그리스의 고전 비극을 연구하는 고전학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서요.
-임의로 추가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적어 주셔도 좋겠습니다.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고 장자의 나비 우화도 있습니다. 학생 시절 콘래드의 책을 읽다가 “삶은 하나의 꿈”이란 말을 그가 되풀이했다는 말을 접하고 무슨 그런 흔해 빠진 얘기를 큰 작가란 사람이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 역시 삶은 하나의 꿈이란 느낌이 듭니다. 흙수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수저도 은수저도 아닌 우리 같은 목(木)수저에게 젊은 시절은 악몽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빈주먹뿐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경제결정론은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에 대해 지금은 대견하게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우리보다 못한 나라 사람을 생각하며 보람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쪽만 올려다보고 사는 것이나 거기서 오는 비관론은 금물이라 생각합니다.

예술이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인간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우리를 우리의 현재 상태보다 더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은 예술이란 것이 행복의 약속이라는 스탕달의 말, 그리고 예감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아직 행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데 행복이라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면서 행복을 예감시키고 약속해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문학이라는 거지요. 그런 말을 좋아합니다. /2007년 현대문학 제작 동영상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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