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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나에겐 언제나 처음인

조회수 2018. 7. 15. 13: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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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교수의 인도-스리랑카 여행기 '책벌레의 여행법'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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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강명관 교수의 신간 <책벌레의 여행법>에서 골라봤습니다.


현재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가 2016년 1월 11일부터 2월 5일까지 인도와 스리랑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강 교수는 한문학자이자 독서가로서 우리 문헌과 책에 관한 책은 숱하게 써왔지만 여행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행지를 무심히 지나친 단순한 여행객'이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특유의 관찰력과 반골 기질의 사색, 통찰이 곳곳에서 번득입니다.


책벌레답게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비롯해 <간디 자서전>과 <힌두 스와라지>, ,마하바라타>, <바가바드기타> 같은 고전, 정호영의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등 인도에 관한 책 이야기도 풍성합니다.


여행의 시작과 끝의 일부를 발췌 소개합니다.

여행과 여행기


연암 박지원은 붓 한 자루, 먹 한 덩이, 벼루 하나, 종이책 한 권을 챙겨 말 위에 올라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이제 나는 태블릿 PC, 휴대용 키보드, 스마트폰을 넣은 가방을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인도로 떠난다.


20대 중반 인도에 간 적이 있다. 30년을 훌쩍 넘겨 재작년에 북인도의 레와 스리나가르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번 인도 여행은 세 번째다. 다시 30년이 흐르면 나는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아 세상에 머물러 있다 해도, 나에게 그 세상은 불륜의 사랑 끝에 다시 못 만날 연인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 붙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인도 역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여행을 어떻게 하리라 특별히 마음먹은 것은 없다. 낯선 땅은 발을 내디디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니 특별히 무엇을 챙겨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배우려고 깨치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기필코 찾아가려는 곳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시간과 상황에 몸을 맡긴 채 부평초가 물 위를 떠다니듯 돌아다닐 것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겠다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인 셈이다.


여행이란 의지로 혹은 불가피한 우연을 기회로 낯선 곳에 자신을 밀어 넣고 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행위이다. 곧 여행은 이물감(異物感)을 느끼려는 행위다. 내가 닿은 곳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거나 풍문을 통해 얻은 빈약한 정보만 있어, 낯선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움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몸을 떨 때야말로 참다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 참다운 여행이란 또 달리 말해 이븐 바투타와 마르코 폴로, 홍대용, 박지원처럼 말이나 낙타를 타고 낯선 공간을 천천히 이동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런 여행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의 속도로 이동하는 여행은 거리를 폭력적으로 좁힌다. 연암은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 강을 건넜지만, 나는 하룻밤 사이에 아홉 나라를 건널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여행은 단언컨대 참다운 여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내가 가려는 인도는 이미 여행지로서 알려질 대로 알려진 곳이다. 어지간한 정보는 책으로 영상으로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다. 숱한 사람들이 이미 그곳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나는 왜 굳이 그곳을 가려는 것인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연애와 결혼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또 그 빤한 사랑에 빠지고 짝을 맺는다. 또 헤어지기도 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그 모든 과정을 익히 알지만,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 범상한 삶을 살아가지만, 나에게 삶이란 단 한 번만 허락된 특별한 체험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한히 반복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그 삶은 처음으로 겪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도 그럴 것이다. 모든 정보가 알려졌어도 나의 몸과 마음은 그것을 아직 체험해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반복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에게 최초인 여행을 떠난다.


깊은 명상에 잠긴 수도승의 호흡처럼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본 낯선 물상(物像)과 사람들의 삶을 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 혹은 지식과 대조하면서 곱씹은 결과 얻은 새로운 깨침을 체로 거르듯 낱낱이 골라내어 정교한 언어로 엮어야 한 편의 여행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예민한 오관을 가진 사람이 날카롭게 벼린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무디다. 하여, 내가 쓰는 여행기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것들과 접촉했을 때 얼핏 떠올랐다 사라지려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을 겨우 붙잡아 글로 옮긴 것일 뿐이다.


방콕 공항에서


뭄바이 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방콕 공항에 갇혀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의자에 앉아 단조로운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보든가, 불편한 잠을 애써 청하든가, 아니면 면세점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어느 쪽도 흥미가 없다. 목적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니, 공항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이다.


멍하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피부색과 언어와 옷차림이 가지각색인 사람들이 흘러 지나간다. 공항에서 비로소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실감한다. 사람들이 공항에 모여드는 건 떠나기 위해서다. 공항은 정주하는 곳이 아니다. 흩어질 사람들,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불꽃놀이 같지 않은가. 불꽃은 사방으로 터지며 사라져 버린다. 비행기도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나 둘 다시 사라지고, 결국은 아무도 남지 않는다.


면세점은 들뜬 소비욕을 충족시키는 곳이다. 나는 그곳과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간을 죽이기 위해 서성대고 기웃거린다. 넘쳐나는 상품들 중 오직 술 한 병을 바랄 뿐, 나머지는 나에게 소용없는 것들이다. 1766년 1월 담헌 홍대용은 북경의 상가에 흘러넘치는 상품들을 보고 인간의 양생송사(養生送死)에 소용없는 사치품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을 읽었는지 초정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산백운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근엄한 유학자 담헌에게 기본적인 의식주와 유가적 예(禮)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 이외의 것들은 모두 불필요했을 터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초정은 그 지점을 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의식주로만 충족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가 옳은 것인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는 소비상품을 대량 생산한다. 인간의 역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진보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 목적지는 거대한 쇼핑몰(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일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오직 쇼핑몰을 향한 진보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품이 흘러넘쳐도 화폐가 없으면 소비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개인의 현실적 목표는 화폐를 획득하는 것이고, 최종 목적은 상품의 소비가 된다.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공식은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에 생겨난 관념이다. 화려한 면세점에 흘러넘치는 저 물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한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은 얼마나 소비해야 행복한 것인가?


면세점에 파는 상품들 중 화장품이 가장 흥미롭다. 인간은 뇌가 들어 있고 시각 청각 후각 기관과 호흡하고 음식을 섭취하는 기관이 위치한 타원형 부위에 매우 큰 관심을 쏟는다. 그 부위의 성능이 아니라 크기, 형태, 상호 비례적 관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거죽의 멜라닌 도포 상태, 탄력성 등이 절대적 관심의 대상이고, 그 관심을 부추기고 돕는 것이 화장품이다. 화장에는 인간의 어떤 욕망이 장착되어 있는 것일까?


돌아와서


허리 아래까지 내러오는 큰 배낭을 메고 멀리 인도까지 간 것은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노동으로 축적된 피곤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달아나듯 떠난 것이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메기라면과 삶은 달걀로 끼니를 때우고, 밤기차와 야간버스를 타고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린 적도 많았지만, 몸을 짓누르는 듯한 일의 무게로부터 벗어난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졌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낯선 경광(景光)과 문화를 접해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높은 곳에 올라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삶의 무의미함을 새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혹은 스쳐 지나가는 낱말과 문장들을 붙잡기도 했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가 산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첩!)에 나만 아는 방식으로 메모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짬을 내어 정리했다. 태블릿 PC와 롤 형태의 키보드를 가지고 갔는데, 메모한 내용을 정리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문제는 계속 옮겨 다녀야 하고 일정한 시간에 숙소에 들 수 없다는 것, 숙소에 들어서도 워낙 지쳐 메모를 정리할 시간조차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행 도중 수첩에 계속 메모를 하다가, 어디라도 쉴 만한 곳이 있으면 기차 안이고 식당이고 카페고 할 것 없이 태블릿 PC를 꺼내놓고 메모를 옮겨적었다. 숙소에 들면 바로 침대에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그날의 메모를 정리했다. 메모를 했다 해도 큰 줄거리만 적은 것이어서 그날 즉시 옮겨두지 않으면 자잘한 기억은 쉽게 휘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괴로웠던 것은 워낙 싼 숙소들에 묵었던 탓에 대부분의 경우 간단한 테이블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아 의자를 탁자로 삼은 경우도 있었고, 전화기를 올려놓는 작은 나무 상자 같은 것을 침대 위에 올리고 태블릿 PC를 두드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조차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메모할 생각이 없었다면 범상하게 그냥 스치고 지났을 것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게 되었던 것이다(혹 여행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여행기를 써볼 것을 정중하게 권한다).


정말이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귀국 후 인도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고 도서관에 없는 책은 사들이기도 했다. 여행 전 네루의 <세계사 편력> 등 인도에 관한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기도 했지만 여행지에서 본 것들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 책들을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다.


서두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에는 새로운 정보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깨침도 없다. 내가 한 모든 이야기는 성인과 현인, 시인과 작가와 학자 나와 같은 수많은 범인들이 이제까지 말해온 것들의 범위 안에 있다. 그러니 나에게 무슨 새로운 깨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청년이라면 자신이 살던 익숙한 곳을 뒤로하고 낯선 시공간을 향해 떠나는 것이 정해진 이치다. 젊음을 소진한 그는 어른이 되어 깨침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여행 역시 사람에게 깨침을 가져다주는 법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미 젊은이가 아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감각이 무디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기이했던 시절, 가벼운 바람에 날아올라 저 먼 허공으로 사라지던 민들레 꽃, 뜨거운 돌 위에 멈추어 있다가 다가가면 포르르 날아가던 영롱한 무늬의 길앞잡이 담쟁이덩굴에 덮인 푸른 벽돌 담, 그런 것들이 찬란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이성의 눈짓 한번, 말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지던 그런 예민한 감각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런 감각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면 아마도 나는 세상에 보기 드문 시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냥 돌아왔다.


밖으로 나가보면 겉으로 보이는 경광과 문화는 다르지만, 그 안쪽의 사람살이는 세상 어느 곳도 다른 것이 없는 법이다. 나와 내가 삶을 누리는 한국 사회와는 사뭇 달라서 희한한 것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신비한' 인도, '인크레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는 보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다르지만, 21세기의 인간들이 예외 없이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 이곳과 저곳의 삶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만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결국은 짧은 여행이 아닌가.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다. 원래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나는 지금 낯선 여행자에 와 있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 걷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나의 여로(旅路)에 선 것이다.

나는 왜 조선의 여성을 파고 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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