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스]현대케미칼-현대오일뱅크 1.5조 자금보충 협약, 무슨일?

조회수 2020. 10. 7. 21: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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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출처: 현대케미칼 생산공장 전경./사진=현대케미칼

재계에서 ‘비운의 그룹’을 꼽자면 STX그룹이죠. 쌍용그룹의 임원이었던 강덕수 회장은 외환위기로 도산한 쌍용중공업(현 STX중공업)을 인수해 STX그룹을 일궜습니다. 강 회장은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과 범양상선(현 팬오션)을 인수해 조선과 해운 분야까지 진출했습니다. 그의 ‘야망’은 조선과 해운 분야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좌초됐습니다. 2013년 그룹이 해체되기 전 재계 순위 10위권을 유지했으니 ‘샐러리맨’의 성공 신화를 쓴 셈이죠.


STX그룹의 몰락에는 기간 산업의 위기가 있었지만, 무분별하게 사세를 확장한 것도 위기를 제공했습니다. STX그룹은 계열사의 영업활동을 위해 여타 계열사가 채무보증을 섰습니다. STX건설이 해외 건설사업을 따내기 위해 STX중공업이 연대보증을 섰고, 중국 조선소가 현지 은행에서 차입을 받기 위해 STX중공업이 보증을 서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계열사의 연쇄 부실로 이어졌습니다.

과거 국내 기업들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계열사들이 연대보증을 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대기업 집단에 속하는 회사는 국내 계열회사의 채무에 보증을 설 수 없도록 정했습니다. 기업이 무분별하게 자금을 끌어 써 연쇄부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규제한거죠.


웅진그룹은 2009년 지주사인 웅진홀딩스를 중심으로 여러 계열사에 걸쳐 1조원 규모의 채무보증을 섰습니다. 결국 보증을 해소하지 못하면서 법정관리를 신청했습니다. 대그룹의 ‘모럴 해저드’로 인해 부실 사례가 쌓이면서 규제는 강화됐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대기업집단의 채무보증 금액은 1조5000억원에 달했는데, 지난해 1081억원으로 줄었습니다. GS그룹이 360억원을 채무보증해 33%를 차지했고, KCC그룹(328억원), 두산그룹(187억원) 순으로 많았습니다.

출처: 1998년부터 2019년까지 대기업집단 채무보증 현황./자료=공정거래위원회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는 1998년 채무보증 금지제도를 도입한 이후 계열사 간 불합리한 거래관행이 사실상 근절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공정위는 “채무보증 금지가 시장 준칙으로 확고히 정착됐다”고 강조했습니다.


기업들은 채무보증 규제를 대신해 ‘자금보충 약정’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금보충 약정은 채무기업이 금융기관 등 채권자의 대출금이나 기타 약정한 채무를 갚지 못할 경우 자금보충을 확약한 모기업 또는 계열사가 채무를 대신 상환하는 방식입니다. 공정거래법이 금지한 채무보증과 유사한데, 현재 자금보층 약정을 규제하는 장치는 별도로 없습니다.


주로 건설업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서 자금보충 약정을 활용하는데, 간혹 제조업에서 이 약정을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케미칼이 적절한 사례로 보이는데요. 현대케미칼은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각각 60:40의 지분을 갖고 2014년 출범했습니다.

출처: 현대케미칼의 자금보충 약정 내용./자료=현대케미칼 감사보고서

현대케미칼의 2019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케미칼은 2조6150억원의 자금보충 약정을 산업은행 등 금융기관과 맺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중 7150억원은 2025년 만기가 도래하고, 나머지는 2029년이 보증이 만료됩니다.


현대케미칼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자금을 지원해야 합니다. 현대오일뱅크가 1조5690억원을, 롯데케미칼이 1조460억원 규모의 자금보충 약정을 선 거죠.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은 보유 지분만큼 현대케미칼의 대출금에 대해 약정을 선 셈입니다.


현대케미칼은 혼합자일렌(MX) 공장과 HPC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투자금을 모으기 위해 산업은행 등 대주단에서 자금을 빌렸습니다.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현대케미칼을 세운 것도 BTX(벤젠, 톨루엔, 자일렌) 공정의 원료인 혼합자일렌을 공급받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산업은행 등 대주단에서 자금보충 약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맺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현대케미칼의 자금보충 약정은 공정거래법에서 금지한 채무보증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하지만 현행법에서 규제하지 않는 만큼 법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논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채무보증을 받을 수 없게 된 기업들이 ‘우회수단’으로 자금보충 약정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대기업집단이 채무보증을 받을 수 없도록 한 현행법의 규제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거죠.


지난해 1월 대법원은 자금보충 약정을 채무보증으로 봐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판결을 유보했습니다. 대법원은 2012년 웅진홀딩스가 하나금융투자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면서 “자금보충 약정이 공정거래법상 탈법행위에 해당하는지는 별론으로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적법성 여부는 이번 소송에서 다루지 않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하지만 원심에서는 자금보충 약정이 공정거래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습니다.


당시 소송은 2011년 웅진캐피탈이 서울상호저축은행의 지분 인수에 필요한 자금 700억원을 전북은행과 하나캐피탈에서 빌리면서 불거졌습니다. 웅진캐피탈은 자금을 빌리면서 자금보충 약정을 체결했고, 원금을 상환 못할 시 웅진홀딩스가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웅진캐피탈은 대출금을 갚지 못했고, 웅진홀딩스는 약정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송으로 비화됐는데, 웅진홀딩스는 자금보충 약정이 공정거래법에 위배되는 만큼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웅진홀딩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에서 자금보충 약정의 ‘시시비비’는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자금보충 협약은 공정거래법에 위배된다’는 원심의 판결로 볼 때 위법 시비는 여전히 남아있어 보입니다.


공정위도 2012년 웅진홀딩스 사태를 계기로 삼성 등 63개 대기업집단의 자금보충 협약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섰습니다. 자금보충 약정이 대기업집단의 자금 조달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는 공정위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대기업집단의 자금보충 약정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공시 의무가 없는데다 규제를 하지 않고 있어 공정위도 정확한 규모를 파 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2012년과 비교해 자금보충 약정 규모는 증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기식 전 민주당 의원이 공정위로부터 제출받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대기업 집단의 자금보충 약정 규모는 21조8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이중 계열회사에 대한 자금보충 약정 규모는 5조1000억원이었습니다.


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현대케미칼에 약정한 규모가 2조6000억원에 달하는 만큼 늘어났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금융위원회의 실무진들도 자금보충 약정 규모를 공시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2017년 11월 증권선물위원회 제20차 의사록에는 실무진의 입장이 담겨있습니다. 


김용범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 5명의 위원이 참석했습니다. 한 위원은 “자금보충약정은 연대보증이므로 지분율과 상관없이 전체를 책임지도록 되어 있어 재무제표에는 전액을 기재하여 공시하는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프로젝트파이낸싱 계약의 자금보충 약정을 언급한 것이었는데, 자본시장의 투명성을 고려하면 공시를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이렇듯 정부와 법조계에는 자금보충 약정이 채무보증과 유사해 연쇄부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케미칼의 자금보충 약정이 현대오일뱅크 등 계열사의 부실을 유발할 것으로 보는 건 비약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현대케미칼의 부채비율은 88.5%, 유동비율은 246.3%로 재무구조가 우수합니다. 현대케미칼은 지난해 매출 3조6359억원, 영업이익 1061억원을 기록했습니다. 623억원의 순이익을 냈습니다.

출처: 현대케미칼 및 대주주 재무구조./자료=사업보고서

현대오일뱅크의 부채비율은 171%, 유동비율은 84.4%로 재무구조가 안정적이진 않습니다. 롯데케미칼의 부채비율은 26.7%입니다. 정유업은 현금창출력이 우수한 업종으로 현대케미칼의 자금보충 약정이 모기업과 대주주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만기도 5년 이상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유업과 석유화학업종의 미래를 섣불리 예단할 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비록 채무자의 재무구조가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자금보충 약정을 무작정 장려할 수는 없습니다. 공정위 또한 이를 고려해 자금보충 약정을 맺은 기업들에게 문제점들을 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채권자인 산업은행이 자금보충 약정을 제안하고, 채무자가 이를 수용하고 있으니 법의 미비함을 적절하게 활용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By 리포터 구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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