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스터디 손주은의 '나의 스타트업 도전기'

조회수 2017. 5. 26. 08: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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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장사에서 시작해 메가스터디 그룹의 회장님이 되기까지.
글로벌스타트업컨퍼런스2017의 강연을 진행 중인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

한 시대를 풍미한 사교육 강자. 인강의 전설. 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아니 그 전후라 할지라도 손주은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한국에선 학교수업보다 사교육이 더 파급력이 센 게 현실이기 때문이죠. 만약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 그의 회사인 메가스터디는 압니다. 웬만한 부모님 세대도 아십니다. 자녀를 위해 사교육비를 직접 지출한 당사자기 때문이죠.

그가 5월23일 코엑스에서 열린 ‘글로벌 스타트업 컨퍼런스 2017’에 등장했습니다.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이 맡은 세션 주제는 ‘스타트업, 겁먹지 말고 도전하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인터넷 강의’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시하고, 창업부터 시작해 한 업계를 평정해본 사람이죠. 그런 당사자에게 듣는 도전 이야기는 그 자리에 모인 스타트업 도전자들에게 어떤 조언들보다 격려가 됐습니다.


손주은 회장은 여느 연사자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손에 쥔 물건이 달랐죠. 손에는 무선 프리젠터가 아닌 보드마커가, 뒤에는 화이트보드가 같이 등장했습니다. 순식간에 컨퍼런스장 분위기는 스타트업 도전의 입시설명회가 된 마냥 고조됐는데요. ‘손주은은 왜 창업을 했을까?’ ‘어떻게 해서 이런 길을 걸어오게 됐을까?’. 손주은 회장은 자신이 겪었던 도전의 순간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현장 도전자들과 경험을 나눴습니다.

그는 PPT 대신 화이트보드에 직접 보드마카로 써가며 강의하듯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1987년 2월26일


그의 창업 스토리는 몇 가지 날짜로 기억됩니다. 그중 첫 시작이 되는 날이 바로 1987년 2월26일입니다. 때는 그의 모교 서울대학교의 졸업식 날. 아직 2학기가 남은 재학생이었던 그는 이날 1만원의 사업자금으로 졸업식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고 15만원의 매출을 달성합니다. 단순히 수완 좋은 성공 CEO의 사업재능 뽐내기가 아닙니다. 그에겐 인생에 닥친 첫 경제위기 극복담입니다.


손주은 씨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결혼부터 먼저하고 어머니가 얻어주신 신림2동 방 2개짜리 집에서 살았죠. 학생이라 돈을 못 버니 두 동생들을 자신의 집에 하숙 살게 해서 생활비를 보탰는데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월24일 부인에게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활비가 3만원 남았다.’ 하루 이틀 죽을 쑤며 고민하니 스치는 게 학교 졸업식뿐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울대가 졸업식을 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해서 2만명 수준의 사람들이 몰렸죠. 그런데 날씨는 꽤 추웠습니다. 그날 현장에 가서 커피를 팔면 틀림없이 대박이 나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출처: (사진=flickr.CC BY.lakefire15)

손 회장은 부인에게 1만원을 받아서 커피 믹스와 종이컵을 샀다고 합니다. 동생과 친구들도 아르바이트비를 준다고 불렀고요. 이웃집 커피포트도 긁어모아 10개를 빌렸습니다. 그렇게 당차게 나간 서울대학교 졸업식장 밖에서 그를 맞이한 건 줄지어 서 있는 이동식 커피카트들이다. 프로판가스에서 물 끓이고 토스트까지 파는 장사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졸업식장 내부로 들어가서 1시간30분 만에 준비한 커피를 완판하죠. 기분이 좋아 신림2동에서 동태찌개를 먹은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날 만난 서울대 학우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네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예전에 살던 하숙집 아주머니에게도 가서 된통 혼이 났다고 하네요. 서울대생이 커피장사나 하고 있는 행색이냐는 겁니다. 화가 난 하숙집 아주머니가 과외 학생 한 명을 소개시켜줬다고 합니다. 이때 만난 제자 덕에 손주은 회장은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유튜브에서 ‘손선생 쓴소리 동영상’을 검색하면 나오는 첫 제자와의 이야기가 이때 만난 이 학생이라고 하네요. 순진한 마음에 돈이 필요해서 했던 첫 번째 사업 도전은 단 하루의 화려한 성공과 새로운 길을 줬습니다.

1991년 9월15일


첫 번째 제자가 어떻게 손주은을 메가스터디 그룹 회장을 만들어 줬을까요. 1987년 대학을 졸업한 손주은 대표는 앞으로 2년간 1억원을 벌어서 독일로 철학 공부를 떠나겠다는 계획을 가족들에게 밝힙니다. 당시는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졸업할 때쯤 학과 사무실에 가서 원서에 이름만 쓰면 대기업 특채가 결정되는 특채 원서가 있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손 회장이 철학 공부에 대단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직장에 다니는 삶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갖던 와중에 나름대로 세운 계획이었을 뿐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손 회장은 본격적인 사교육 시장에 진입하게 됩니다.

첫 번째 제자가 좋은 성과를 이뤄낸 덕에 학생을 모으기는 쉬웠습니다. 이때 손 회장은 또다시 도전을 합니다. 주변 학생 풀을 보유하고 있는 학부모들에게 연락해 전과목을 월 25만원에 다 가르쳐줄 테니 5명을 모아달라고 하게 됩니다. 금방 모다고 하네요. 심지어 10명. 손 회장은 이 10명을 데리고 목숨을 건 특훈을 합니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는 실험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가장 집이 넓은 학생 집에 가서 9박10일간 지옥훈련도 불사했다네요. 이때의 상상할 수 없는 도전들은 이후에도 비즈니스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못할 게 없다’는 식. 


2년간 1억원을 벌려 했는데, 2년간 2억원을 벌었습니다. 손 회장은 깔끔하게 독일 유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학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특유의 수완과 입소문으로 무리 없이 잘 운영해가던 중에 1991년 9월15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부인과 아들, 딸이 탄 택시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들이 일주일 만에 죽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딸을 잃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손주은 회장은 닥치는 대로 수업만 했습니다. 그는 딸을 잃은 당일 저녁부터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60시간 가까운 수업 시수를 채웠다네요. 일반 공립학교 교사들이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수업을 하는 걸 감안하면 4배 가까운 시간입니다. 1991년 9월15일 이후 운명적인 고통을 잊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출처: (사진=flickr.CC BY.Doo Ho Kim)

1997년 2월2일


손주은 대표가 36살이던 1996년 무렵에는 한 달에 4천만-5천만원을 벌었습니다. 정신없이 운명적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이 과정에서 계속되는 윤리적인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10년간 해온 일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입니다. 결국엔 사교육 시장에서 집에 돈은 많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쳐서, 공부는 잘하는데 돈은 좀 부족한 애들을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회윤리적으로 악이라는 고민을 떨칠 수 없었다네요.


1997년 2월2일, 손주은 대표는 사교육의 불평등에서 희생당하는 애들까지도 들을 수 있는 대중 강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위 부잣집 아이들만 대상으로 하던 수업을 접고 일반 학원가에 진출합니다. 모두가 이해를 못 했다고 하네요. 학원가의 텃세도 셌답니다. 전공과목만 수업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도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를 전공했는데요. 역사만으로는 학원수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과목 전체를 묶어서 통합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10개 반을 개설했는데 7개는 폐강, 나머지 3개 반에 총 8명이 등록했습니다. 한 달에 5천만원 받던 사람이 첫 달에 32만원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손주은 대표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윤리적인 고민을 해결하면서 떳떳하게 살려고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기적같이 8명이 5개월 만에 2천명이 됐고, 그다음에 5천명으로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한 번 뒤통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대치동 사교육으로 아파트값이 폭등하던 시절, 기존에 하던 윤리적 고민이 또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다시 한 번 사교육의 지역적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 현실이 싫어졌다네요.

세션을 경청 중인 컨퍼런스장 모습

2000년 7월12일


지역에 관계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강의가 뭘까. 이 고민은 손주은 회장으로 하여금 또 한 번 크게 도전하게 합니다. 문득 홈쇼핑을 보다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학생이 학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학원이 집으로 오는 시대가 충분히 열리겠구나. 그때 생각한 게 인터넷 강의입니다. 마침 당시 유니텔에서 음성강의를 잠깐 했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크게 와서 놀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손주은 대표는 2000년 7월12일 인터넷 강의 전문 기업 메가스터디를 창업합니다.

손주은 회장이 진행했던 온라인 강의 화면 갈무리

동화책은 여기서 닫힙니다. 그 후로 메가스터디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손주은 회장이 강조했던 건 ‘도전’ 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 커피장사를 했던 순간, 1988년 혼자 전 과목을 가르치겠다는 무대뽀 발상, 한 달에 5천만원을 벌다가도 집어던지고 나와서 통합사회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도전, 동영상 강의를 추진하던 순간까지. 손 회장은 도전의 순간마다 어쩌면 순진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손 회장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사회에 진 빚부터 갚는 중입니다. 사교육 시장에서 돈을 벌며 남들보다 노력에 비해 쉬운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윤민 재단. 1992년 잃었던 딸의 이름입니다. 죽은 자식들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며 타인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지었죠. 윤민창의투자재단은 손주은 회장이 300억원을 출연해 만들었고, 지난 4월 9개 스타트업을 선발해 초기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손 회장은 또 하나의 도전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올해 10월쯤을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저처럼 작은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다”라며 “그러나 그 중심에 순수하고 착한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들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고, 또 인생을 위해 충분히 해볼 만하다”라며 이날의 격려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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