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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을 만나다

조회수 2017. 11. 17. 15: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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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이 모였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 어느 시에 쓰인 서러운 문장이다. 살다 보면 가기만 하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오지 않아야만 아깝고 그리워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아마 사람들이 레트로를 사랑하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남긴 유산이니까.


레트로에 매혹된 소년과 레트로로 불리는 시절을 살던 소년들을 ‘카세트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카듣사)에서 만났다.


카페 운영자(송재훈, 닉네임 ‘비로새긴낙서’ 이하 비낙)에게 ‘워크맨’은 학창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제활동을 시작한 후 워크맨을 이제라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워크맨을 사게 됐고 고장난 워크맨을 사서 고치고 쓰는 것이 취미가 됐다. 그는 지난해 10월29일 카페 ‘카세트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의 모임’ 문을 열었다. 카페 개설 초기에는 워크맨 관련 게시판만 있었지만, 회원 수가 증가하면서 음반 카테고리도 만들어지고 LP, 턴테이블까지 아날로그 음향 전 부문을 고루 다루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카페 멤버 수는 2095명이다.


카페 부매니저(김기정, 닉네임 ‘제이’)도 운영자 비낙과 비슷한 이유로 카세트 테이프를 듣게 됐다. 그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세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3년 전부터 수집을 시작한 그는 플레이어 기기를 400-500대 정도 보유하고 있는데, 이중 90%가 워크맨이다.

“학창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워크맨이 붐일 때 구매하지도 못하고 부러워하며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고 첫 워크맨, 아이와(AIWA) JX505를 구매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잊고 살다 중년이 되고 보니 못 살던 시절 가지고 싶었던 워크맨의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서 (취미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부매니저 제이는 아이와(AIWA) 마니아다.

카세트 테이프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우리가 흔히 아는 카세트 테이프는 1963년 네덜란드 필립스가 개발한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로, 작은 플라스틱 갑 안에 3.81mm 자기테이프와 2개의 테이프 릴이 내장돼 있다. 테이프의 재질에 따라서 노멀, 크롬, 메탈 테이프 등으로 나뉜다. 노멀 테이프는 어학용, 일반 녹음용으로 쓰인다. 가장 널리 보급된 테이프 종류다. 크롬 테이프와 메탈 테이프는 하이파이용이다. 크롬은 노멀에 비해 잡음이 적다. 메탈은 ‘가장 진보된 고급 테이프’로, 노이즈 리덕션 사용 시 오픈 릴 테이프의 음질 수준을 구현한다고 한다. 카듣사의 회원등급제도 ‘노멀<크롬<메탈’ 순으로 돼 있다.

출처: 블로터
소니 워크맨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려면 워크맨, 카세트 데크, 붐박스 등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참, 워크맨이라는 용어는 잠깐 짚고 넘어가자. 1979년 소니는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Walkman, 자유롭게 걸어다니며 음악을 듣는다는 뜻으로 지어졌다)’을 출시했고 곧이어 카세트 테이프의 시대를 새롭게 열었더랬다. 이후 사람들은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자연스럽게 ‘워크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다. 


기사에서도 편의상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워크맨’으로 통일하도록 한다.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사실 카세트 테이프를 사랑하는 건 고달픈 일이다. 대체로 일반 가요는 크롬 테이프로 발매된 경우가 많고, 테이프 보관법 자체도 변덕스럽고 예민하기 때문이다. 더 오래, 자주 듣고 싶어도 아끼던 테이프가 늘어질 수 있어 못 듣는 이들이 많다. 이젠 스트리밍 서비스로 언제 어디서나 변치 않는 음원을 들을 수 있는데 왜 굳이 까탈스러운 카세트 테이프를 구하고 찾아서 듣는 걸까.

출처: 블로터
토토의 음반.

캠핑과 서핑, 레트로 문화를 좋아하던 이준호 씨는 클래식 카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의 세계에 입문했다. 90년대 클래식 카를 사고보니 테이프 데크만 있어 음악을 들으려면 테이프로 재생해야 했다. 오랜만에 들은 카세트 테이프의 음질은 그에게 ‘의외로’ 괜찮게 느껴졌다. 이준호 씨는 인터넷을 뒤져 ‘전설의 붐박스’로 불리는 소니 ‘CF580’을 구매했다. 그렇게 기기를 사고, 기기에서 들을 수 있는 테이프를 사다보니 그는 어느 새 카세트 테이프 자체에 빠지게 됐다.

메탈을 좋아한다면.
출처: 블로터
서태지 모음.
안 듣고 모으기만 하시는 거예요?
좋아서 사놓고 안 듣는 거, 모순이죠? (웃음)

그는 음악이 듣고 싶으면 스트리밍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듣는다. 테이프가 두 개 생기면 하나를 까서 듣기도 한다. 이유를 묻자 “다시는 똑같은 제품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애착이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테이프가 수명을 다 하면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테이프 마니아들은 같은 테이프를 두 개, 세 개씩 산다. 청음용, 소장용, 그리고 스페어용이다.


가지고 있는 소장품 중 가장 듣고 싶은 음반은 ‘블랙사바스’라고. 그는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열어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출처: 블로터
소니 CF 590S. 맑은 연주곡에 적합하다.
출처: 블로터
JVC사의 RC717W. 투박한 게 매력이다.
출처: 블로터
어깨끈까지 있는 풀 세트다. 샤프의 ‘JC-25’.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불편함도 마니아들에게는 음반 자체의 구성과 아이디어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도 LP나 카세트 테이프와 같은 아날로그가 가진 매력이다. 최근 국내외 뮤지션들도 LP나 카세트 테이프 한정판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한편 동일한 카세트 테이프를 재생해도 재생 기기마다 음질이 다르다. 기기만 수집하는 이들도 많고, 음악 취향만큼 기기에 대한 취향 역시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다. 워크맨을 사랑하는 제이 부매니저는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 ‘아이와(AIWA)’의 마니아다. 그는 “아이와는 소니나 타 메이커보다 디자인과 사운드가 차별화돼 있고, 특히 아이와의 음장 시스템은 아날로그 음악에 더 몰입되게 만들어준다”면서 “과장해서 말하자면 포터블 오디오라 말하고 싶다. 카세트 데크에 ‘나카미치’가 있다면 워크맨에는 아이와 PX1000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운영자 비낙이 좋아하는 모델은 아이와 ‘JX707’. 그는 “음장효과인 DSL을 ‘ON’ 시켰을 때 오디오에서 듣는 배음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는 티악 오카세 같은 희귀 수집품도 보유하고 있다.

아이와의 ‘JX707’.

그러나 운영자 비낙은 “아무리 좋은 명기라도 자기 듣는 귀에 안 맞으면 명기가 아니다”라며 “자기 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기가 곧 명기다”라고 강조했다.


카세트 테이프는 추억의 전유물이 아니다


꼭 ‘그 시절’의 추억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를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다. 김민준 씨는 4년 전 학습만화에서 워크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집에 워크맨이 있냐고 묻자, 그의 아버지는 먼지 쌓인 워크맨 3대를 꺼내줬다. 그중 한 대에는 구매한 날짜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999년 9월5일, 세운상가 대동전자.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기 6년 전이었다.

출처: 블로터
“각지고 옛날 느낌이 나는 빈티지 디자인이 좋아요. 예전부터 이런 게 끌렸어요. 지금은 그나마 찾아보면 구할 수 있을 텐데 나중에는 옛날 것들이 다 사라져서 그때는 구할 수 없겠죠. 카세트 테이프는 스마트폰으로 듣는 것과는 다른 테이프만의 멋이 있어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좋고, 말로 표현을 잘 못하겠네요.”

그는 용돈을 모아 동묘나 신설동 풍물시장에 간다. 테이프는 평균적으로 한 장에 1천원, 워크맨은 5천원 정도다. “운 좋으면 2천원 아래로 구할 수 있어요. 워크맨 3대랑 즉석카메라를 6천원 주고 산 적도 있어요.” 내년 중학교에 들어가는 김민준 씨의 일주일 용돈이 딱 5천원이다.

출처: 블로터

2005년에 태어난 그에게 워크맨은 독특한 디자인, 새로운 물건이다. 워크맨이 한창 팔리던 시절의 워크맨이 그런 존재였던 것처럼 말이다. 테이프로 발매된 음반 중 김민준 씨가 알 만한 음반은 없다. 그래서 김민준 씨는 디자인을 보고 테이프를 고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만나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옥션에서 카세트 테이프 100개를 3만원 주고 샀다”면서 “그중 하나가 ‘카페무드팝송’이라는 테이프였는데, 카페무드팝송에 수록된 1번 곡 ‘Le fusil rouille’라는 샹송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라고 답했다.

손때 묻은 옛 물건들은 때로 단순한 ‘멋’을 넘어 지나간 시·공간과 현재를 이어주는 접점이 되기도 한다.

“제일 아끼는 테이프가 두 장 있어요. 40년 전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건데요, 처음에는 이걸 아버지 차 안에 있는 테이프 사이에서 찾았는데 알고 보니까 사진작가였던 할아버지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한 걸 녹음한 거예요. 1983년도인가? 정확한 년도는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14살, 제 나이였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전에 녹음한 거예요. 듣곤 아···. 우리 할아버지 목소리가 이랬구나, 생각했어요.”
출처: 블로터
송창식의 음반 위에 녹음이 입혀졌다.

김민준 씨는 “놀라웠던 게 할머니까지 이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다”라며, “디자인이 똑같은 테이프를 최근에 구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 경험은 그가 카세트 테이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그는 테이프는 늘어지면 소리가 변질되기 때문에 그 전에 할아버지의 음성을 추출해 mp3 파일로 만들어 간직할 예정이다.

출처: 블로터
김민준 씨의 시선으로 보면 달리 보이는 음반들.
처음 구매한 테이프는 뭐였어요?
어···. 제목을 말할 수가 없어요. (망설이다) 4년 전에 그냥 궁금해서 샀는데, ‘해병대 디스코’라는 테이프였어요. 해병대 군가가 트로트처럼 나오더라고요. 찾아보니까 원곡은 그런 게 아니던데, 제목 듣고 웃으실까봐···.
이것도 오래된 앨범 같아요.
네. 이건 2집이라고 쓰여 있는데 열어보니 5집이 들어있더라고요. 동아DVD 주인 아저씨가 “여기 있는 가수 다 죽었다”라고 말해줬어요.

애로사항


취미생활의 애로사항으로 이준호 씨는 ‘기기 고장 시 수리가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수리센터에서 지원하지 않을 뿐더러 일반 수리점에서도 수리를 꺼린다. 오래된 물품이기 때문에 한 군데를 수리하려고 해도 전체를 분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시간은 오래 걸리는 데 반해 부품이 모두 갖춰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수리가 어렵다. 값을 청구하기에도 애매한 데가 있다.


그래서 카세트 테이프를 듣는 이들 중에는 수리 기술을 독학으로 배워 스스로 기기를 고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수리가 돼 있고 동작이 가능한 제품은 값이 비싸다. 몇 십만원까지도 나간다. 부매니저 제이도 독학으로 워크맨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는 “하나하나 공부하고 수리에 실패도 하면서 200대 이상을 수리했더니 워크맨 수리 전문가 수준에 와 있더라”며 웃었다.


듣고 싶은 노래를 못 듣는 것도 아쉬운 일이다. 카세트 테이프를 모으는 이들은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테이프를 모으고서 수록된 곡을 인터넷에서 따로 찾아 듣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김민준 씨는 한 테이프를 보여주며 “이 테이프 3번 목록의 ‘사랑의 절정’이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온다”고 하소연했다.

마지막으로 김민준 씨에게 물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주변에 ‘영업’한다면?
좋으니까 빌려줄 테니까 한 번만 들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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