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하는 윤여정

조회수 2021. 5. 11. 14:46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이 글이 실릴 잡지가 발행됐을 때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가 공개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를 수상했을 것이다.(윤여정 배우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4월 25일 열린다.) 

아카데미 레이스이자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내 지역 비평가 시상식 및 미국 영화인 조합 시상식에서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어졌다. 

“<미나리>로 지금까지 몇 개의 상을 탔냐”는 질문에 배우 자신조차도 숫자 세기를 포기했다고 했을 정도다. 아카데미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획득한 상은 4월 11일 열린 BAFTA(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4월 24일 미국독립영화상의 스피릿어워즈 여우조연상이다. 

<미나리>의 윤여정이 산 연기상은 마흔 개를 넘는다. 이미 한국의 여러 매체들에서 호들갑스럽게 윤여정 특집 방송을 편성하고, 특집 기사를 쓰고 있으니 이 짧은 지면에서조차 새삼 그의 긴 필모그래피와 명연기 리스트를 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치 그 시점이 윤여정 인생 제8의 전성기인 것처럼, 2010년 무렵 그가 출연한 토크쇼에서는 마지막 질문으로 “배우로서 앞으로의 꿈”을 묻곤 했다. 영화 <돈의 맛>(2012) <고령화 가족>(2013)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에 연달아 이름을 올리며 바삐 활동했던 2013년에도 SBS 예능 <힐링캠프>는 그에게 예의 질문을 던졌다. 

윤여정은 자신은 배우로서 꿈이 크지 않았다고, 먹고 살기 위해 들어오는 모든 배역을 해야 했을 때, 나중에 하고 싶은 거만 골라서 하면 소원이 없겠다 했는데 지금은 꿈을 이룬 상태라고 답했다. 그리고 “대사가 안 외워져서 계속 NG를 내고 민폐를 끼치게 되면 연기 그만해야지”라고 대답했다. 

이때 그 누구도 8년 후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레드카펫을 밟게 될 거 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10년 전에도 ‘모든 감독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배우’로 경력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석되던 윤여정은 매년 더 멀리 가더니 이제는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배우가 되었다.

누군가의 페르소나

배우 윤여정을 분석하는 글에 꼭 언급되는 이름들이 김기영 감독, 김수현 작가, 노희경 작가다. 그리고 그를 김기영의 페르소나, 김수현의 페르소나, 노희경의 페르소나라고 소개한다. 정작 본인은 “나 김수현 작가랑 몇 작품 안 했다.”(JTBC <뉴스룸> 인터뷰 2015. 3.25)며 손사래를 치고 가장 힘들었던 드라마가 <사랑이 뭐길래>(1991)라고 설명하지만 말이다. 

이혼한 그를 어디서도 불러주지 않자 친분이 있던 김수현 작가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촌스럽다니, 안 되겠다. 나라도 써줘야지.”라며 드라마에 불러줬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윤여정은 하던 박사 공부를 작파하고 가부장적인 집으로 시집가겠다는 딸 지은(하희라)을 뜯어말리는 엄마 한심애 역할을 맡았다. 

<사랑이 뭐길래> 스틸
식탁에 같은 반찬이 두 번만 올라와도 목소리가 달라지는 까다로운 시어머니에 효자 남편, 시이모님들까지 봉양하느라 허리가 휘는 이 여자는 혼잣말이 많다. 
온종일 대가족 식사 준비에, 시어른들 간식 준비까지 하느라 쉴 틈이 없는 이 캐릭터는 주로 집안일을 하면서 혼자 꿍얼대기 때문에 윤여정은 동작하다 대사를 까먹을 까봐 실제로 다리미질을 하거나 식탁에 수저 놓는 시늉을 하면서 죽기 살기로 대사를 외웠다고 한다.  
노희경 작가는 “왜 나한테 좋은 엄마 역할을 안 주냐”고 묻는 윤여정에게 “저한테 선생님은 엄마가 아니라 여자”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역할(<화녀> <에미> <바람난 가족> <돈의 맛> <죽여주는 여자> 등),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거만 봐도 흐뭇해하는 친근한 할머니 역할(<굳세어라 금순아> <넝쿨째 굴러온 당신> <계춘할망> <미나리>)로 윤여정의 얼굴을 기억한다. 두 성격 모두 윤여정이 가장 잘하고, 잘 해낸 연기가 맞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는 “왜 나한테 좋은 엄마 역할을 안 주냐”고 묻는 윤여정에게 “저한테 선생님은 엄마가 아니라 여자”라고 대답한다. 

시청자인 내게 윤여정은 엄마도 여자도 아니다. 딕션이 정확한 카랑한 목소리로 윤여정이 체화하는 역할들은 왠지 어느 동네엔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대본에는 인물에 대한 특별한 전사가 없었을지 몰라도 윤여정은 인물을 수십 년 자기의 삶이 있었을 법한 사람으로 만든다. 

윤여정이 연기하면 선역도 악역도 아닌 그저 있을법한 다면적 인물이 된다. 까다롭고 얄미운 역할에도 그 인간 특유의 사연과 사랑스러움을 불어넣는다.

<목욕탕집 남자들> 스틸

대사량 많기로는 지금 봐도 혀를 내두를 <목욕탕집 남자들>(1995)의 혜영이 바로 그러했다. 대가족의 둘째 며느리이지만 힘든 일은 얄밉게 쏙 빠지려 들고, 맘에 안 드는 며느리를 구박하며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치는 여자. 시도 때도 없이 시를 낭송하는 통에 남편이 진저리치며 “제발 그것 좀 그만”하라고 외치면 “이거조차 못하게 하면 나한테 죽으라는 소리예요. 당신은 날 사랑해주지도 않으면서 자유까지 속박하려 드는군요”라고 응수한다. 

오십을 바라보면서도 “여보 날 좀 사랑해줘요. 난 사랑이 고프”다고 갈구하며, 집안 행사가 있는 날에는 몸에서 반찬 냄새가 나는 게 싫다며 드레스를 차려입고 훌쩍 길을 나서버리는 얄미운 작은 어머니가 바로 혜영이라는 사람이다. 

<목욕탕집 남자들> 스틸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이기적이고 우아한 척하는, 입이 방정이라 분란을 일으키는 이 얄미운 캐릭터를 윤여정은 대장정 끝에 시청자가 사랑하도록 설득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쓸쓸함, 청승, 찌푸린 미간과 처진 어깨와 포즈 등. 그것은 타고난 분위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영리한 설득이다. 

동네에 30년 된 목욕탕 위층에 홈드레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어떤 여자가 매일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시를 낭송하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도록 연기한다.

<화녀> 스틸

정작 배우 본인은 자신은 연기를 일로 했을 뿐 메소드 연기가 뭐냐고, 나는 애들 데리고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악착같이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그 ‘악착’을 영상에서 읽어내지 못한다. 그저 매번 윤여정이 너무 쉽게 그 작품으로 쓱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씨네21> 봉준호 감독과의 대담에서 봉준호 감독이 ‘어떻게 쓱 여유롭게 그 인물이 되냐’고 묻자 윤여정은 “난 어릴 때부터 오버액팅 하는 게 싫었어요. 근데 나도 성의 없게 하는 게 아니야. 마르고 닳도록 외워서 해요. 나도 여유롭지 않다니까. 진짜 열심히 하는 거.”라고 답했다) 

<네 멋대로 해라> 스틸

어린 자식 버리고 집을 나가 여러 남자를 전전하고, 그 자식이 커서 소매치기해서 준 돈으로 치킨집을 차리고도 “난 복수가 주는 돈 받을 거야. 나도 잘 먹고 잘살 거”라고 악다구니 치는 짙은 화장을 한 이 엄마를(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윤여정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 내용을 모르고 유튜브 용으로 잘린 5분짜리 장면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그 인물에 동화되어 같이 울게 된다. 살기 위해, 직업 정신으로 무장한 윤여정이 50년간 스크린에서 TV에서 연기를 해왔기에 우리에게는 각자가 기억하는 윤여정의 표정들이 있다. 

지난 발자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저 내 앞에 주어진 ‘미션’을 열심히 할 뿐이라고 답하는 윤여정이기에 오스카 이후에도 그는 그저 다음 작품을 준비하러 홀연히 떠날 것이다. 


글/ 김송희

출처: http://www.bigissue2.kr/
샵(#)빅이슈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