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사사로운 것이 주는 다정한 위로

조회수 2021. 4. 22.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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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니?” 아침마다 눈뜨면 하는 일이 생겼다. 베란다 창문 앞에 나란히 자리 잡은 선인장과 몬스테라에 안부 묻기. 무심한 인간이 살면서 식물에게 말을 걸게 될 줄이야. 인사도 하고 잎사귀도 만져주며 ‘내가 널 많이 아껴.’ 소심한 구애를 한다. 그렇게 짧은 의례를 마치고 나면 괜스레 좋은 사람이 된 것 같고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래, 이 ‘아이들’(아이들이라니!)을 데려오길 잘했어!’라며 자신을 칭찬하기까지에 이른다. 

식물에 관해서라면, ‘죽이는 재주’가 있었다. 원체 살아 있는 걸 집에 들이지 않기도, 못하기도 하는 성질머리, 주변머리라 그나마 시도할 수 있는 게 식물이었다. (무심한 인간에게도 기회를 내주는 식물의 이 관대함이라니!)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고무나무는 말려 죽였고, 잔향이 좋다며 쓰다듬을 때는 언제고 금세 잊은 로즈마리도 보냈으며,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풀들은 부지불식간에 안녕했다. 

마음이 배배 꼬일 때나, 사는 게 도통 마음 갖지 않을 땐 고의로 악의적으로 식물에 물을 주지 않기도 했다. 못났다. 어디서 뺨 맞고 어디다 화풀이였나. 잔인하다. 타들어가는 건 내 마음이니 네게 물은 줄 수 없다는 못된 심보로 다른 생명 귀한 줄 몰랐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면 초록은 언제나 옳다며 식물을 탐했다. 식물도감과 식물에 관한 책들을 사들여 읽고 산책길 플라타너스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봤다.

다시 식물을 들인 건 지난해 여름. 제법 키가 큰 두 대의 선인장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일과 사람에 단단히 치여 몸과 마음이 허물어져가던 8월. 오직 시간만이 흐르길 기다렸고,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시간이 흐른다는 것뿐이었다. 

외롭고, 불안한 메마른 마음과 일상에 생명의 기운을 들이고 느끼고 싶었다. 숨 쉬는 생명체를 곁에 둔다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을까 싶었다. 홀연히 기적처럼 돌파구가 열리길 기다리면서. 교감하고 싶어서. 그렇게 쌍둥이처럼 우뚝 솟은 두 대의 선인장을 데려왔다. 

사막에서 길 잃은 사람에게는 수분 많은 선인장은 늘 귀한 것이었다고 하니 내게도 적절한 때에 와준 셈이다. <식물 이야기 사전>(찰스 스키너, 2015, 목수책방)을 읽다 보니 페루의 마법사들은 선인장 가시로 부두교의 주술적인 힘을 발휘해 멀리 있는 표적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데 썼다고 하더라. 

내 식대로 해석해보면, 내게 온 선인장은 누굴 헤치는 공격용 대신 호신용,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부적 정도로만 두면 되겠다. 

그리고 올봄, 몬스테라를 맞았다. ‘이상한’, ‘기이한’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momstrum에서 온 이름처럼 기이한 힘으로 매일 분방하고 저돌적으로 무럭무럭 잎을 내고 있다. 

특히 아침이면 지난밤의 순환 활동 끝에 제 안에 있던 수분을 밖으로 내밀어 방울방울 물방울을 잎사귀에 매달아둔다. 귀엽고 기특하고 무엇보다 ‘나 살아 있어요!’라는 그들의 신호에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런 날 작은 화분에 담긴 더 작은 식물 하나를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아직 내 곁에 남았다. 내 기억 속의 식물들은 대부분 그렇게 내 생의 기록과 같다. 하나의 식물 속에는 그 식물을 데려올 때의 마음과 데려오려고 마음먹게 한 어떤 사연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키우는 모든 식물들은 대부분 어느 날의 내 마음들이다.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이승희, 폭스코너, 2021)

선인장에는 지난여름의 내가 있다. 8월의 마음이다. 몬스테라에는 이번 봄의 내가 들어 있다. 3월의 기록이다. 식물과의 거듭된 이별 끝에 다시 식물을 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지났다. 반려란 그런 것인가 보다.
식물을 (사는 게 아니라!) 데리고 와서 (그간 나는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지만) 돌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식물에 기대어 나 또한 돌봄을 받고 싶다는 것, 그런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누군가의 곁에서 내 곁을 내주는 방도를 찾는 과정. 아직까지 잘 자라주는 그들과 함께 내 마음의 상태와 동세를 더 잘 관찰하고 싶다. 

지난해 식물을 들일 때쯤부터 이곳저곳이 아팠다. 마음의 병이기도 했고 구체적인 몸의 통증이기도 했다. 지금은 수술 후 회복 중이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며 호들갑을 떨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어졌다. 몸과 마음, 돌봄과 의존, 우연과 필연, 관계의 지속과 단절에 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와 관련된 생각거리들을 글로 말로 풀어내보고 싶다.

식물을 들이고 식물에 마음을 쓰며 반려되기를 질문하게 된 것도 내 나름의 다르게 살기의 일종인 것이다. ‘식물 키우기?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묻는다면 거창할 거 하나 없는 일이지만 충분히 거창한 일이기도 하다고 답해야겠다. 매일 안부를 묻고 주변을 서성이며 잘 자라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란 얼마나 대단한 애정인가.

돌봄과 의존, 홀로서기와 홀로 된다는 것은 점점 더 나이 들어가는 특히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임박하고 중요한 화두다. 근래 다시 본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2016)은 이전과는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왔다. 파리의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50대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앞에 산적한 난제.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는 남편의 고백, 나이 든 엄마를 돌보는 일의 버거움, 더는 젊지 않은 자신과 철학이 던지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다.

관계는 끝을 향하고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은 피할 길 없다. 그때 그런 나탈리 곁을 맴도는 생명체가 하나 있다. 나탈리가 임시로 맡게 된 엄마의 반려묘 ‘판도라.’ 나탈리는 판도라를 데리고 자신의 제자인 파비앵(로만 코린카)이 머무는 숲속의 작은 공동체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판도라가 숲속으로 종적을 감췄다가 한참 만에 나탈리 앞에 나타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심지어 집 고양이인 줄로만 알았던 판도라가 야생 생쥐를 잡아서 온 게 아닌가. 나탈리가 판도라를 부둥켜안는다. 

자기 곁에 있던 모든 게 지나갔다고, 사라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 기특하게도 나탈리 앞으로 돌아온 판도라다. 이 장면이 더 큰 감정적 파고를 만드는 건 영화에서 나탈리가 처음으로 다른 존재와 깊이 살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탈리 앞에 다가온 것과 다가올 것 중 판도라는 뜨겁고 묵직한 실체로서의 존재다. 그런 판도라, 귀하디귀하다.


글/ 정지혜, 사진출처: Unsplash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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