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지기 친구의 집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버스 정류장을 동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찾아보라고 하면 그는 아마 패닉에 빠질 거예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안내 팻말 하나 없었거든요. 최근에야 도로에 ‘버스’라는 글자가 세로로 긴 뿔처럼 칠해졌지요. 내리쓰기로 쓰인 그 글씨는 종종 묘하게 보여요. ‘벗’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은 것처럼(벗) 읽힐 때면 저는 특별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요.
오늘은 내 친구 지민이와, 지민이의 가장 친한 친구인 경미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경미가 고양이 ‘솜이’와 만나게 된 묘연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거든요. 경미와 지민이는 서로 둘도 없는 벗이에요. 아니 글쎄,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시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그러니까 옛날 옛적 호랑이, 학교 앞 떡볶이 먹던 묘연한 시절에…
Q.
둘이 오랜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언제 처음 만났어?
A.
지민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으니까, 10년지기네?!
경미 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지 몰랐어.
Q.
학창 시절에 친했다고 해도 졸업 이후까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는 게 쉽지는 않잖아.
A.
경미 확실히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 어떤 시기에 더 자주 연락하고 어울리지만,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멀어지고 마는. 지민이와 난 졸업 후에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어. 정기검진을 하듯 종종 건강한지 확인하고, “지민아… 너 술 안 마셔…?” 하고 물어보고.
지민 결국 같이 술 마시자는 이야기잖아.(웃음) 나는 경미가 가족 같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엄마 같아.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때, 인생에 큰일이 있거나 아무한테도 말 못 할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 때, 경미에게 말하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거든.
경미 우리는 성인이 되고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했는데도 자주 만났어. 술도 많이 마시고. 술은 각자 독학(?)했는데 서로가 서로한테 배웠다고 해. 난 지민이 너한테 배웠어.
지민 난 경미 너한테 배웠어. 우리가 술을 잘못 배웠어.
Q.
둘 사이에 쌓인 세월이 긴 만큼, 지금까지 여러 과도기를 함께 겪어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불안할 때 버팀목이 되어주는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아주 든든할 것 같아.
A.
경미 지금도 과도기를 함께 보내고 있지. 난 지금 대학원생이자 아직 뚜렷한 내 위치를 찾기 전이고, 지민이도 교사가 되기 전이니. 지금은 둘 다 준비하는 때야.
지민 맞아, 나도 곧 대학원 생활이 끝나고 임용고시생이 되거든. 그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커. 나는 활동적이고 놀기 좋아하는데, 내 관심사가 공부와 연관되어 있지 않으니까. 좋은 결과야 내가 열심히 하면 나오는 거지만 그 과정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야.
경미 할 수 있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지민 얼마 전에도 경미가 내게 용기를 북돋워줬어. 요즘은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하니까, 친구들과 연락도 뜸해지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무거운 얘기를 할 수 없잖아. 그런데 경미라면 가능해.
경미 우리가 10년 동안 딱 한 번 싸운 적이 있다? 치고받고 악담하는 진흙탕 싸움이 아니라, 서운한 부분이 있었다고 장문의 카톡을 보내면, 그만큼 장문의 답장이 오는. 그리고 그게 새벽까지 오랫동안 이어졌어.
지민 그렇게 대화가 건강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서로 위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Q.
오늘은 경미가 최근에 키우게 된 고양이 솜이를 보러 온 거잖아. 솜이를 키우면서 전과 달라진 점이 있어?
A.
경미 아주 많아, 내가 말하는 건 빙산의 일각이야. 난 오래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한 생명을 내가 책임질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고, 감당해내야 하는 부분들을 생각하니까 엄두가 나지 않은 거지. 워낙 좋아하니까 오히려 더 못 키우겠더라. 함께 사는 가족의 의견도 중요하고. 그러다 고양이를 임시로 보호했는데, 작은 생명이 나와 우리 가족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사무치게 느꼈어. 그때 결심했지. 준비도 되어 있었고. 묘연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아. 솜이를 만나 데려오기까지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있거든. 솜이가 와서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고, 나도 달라졌고. 그냥 솜이를 보면 더없이 행복해.
Q.
경미네 집 곳곳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져.
A.
경미 내가 아홉 살 때부터 이 집에 살았거든. 학창 시절을 모두 같은 집에서 보냈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내 키가 피아노보다 작았어. 그래서 엄마가 집에 들어오실 때 피아노 뒤에 숨어 있고는 했지. 어릴 때 내가 그린 그림이나 내 사진도 버리지 않고 액자에 끼우거나 벽에 붙여뒀어. 대체로 처음 둔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집을 가득 채웠네. 내 성장 과정이 모두 담긴 곳이야. 내 방 한쪽 모서리가 둥근데, 어릴 때부터 그 점이 좋았어. 엄마는 커튼 달기 힘들다고 싫어하시지만.(웃음)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이고, 도심 같지 않은, 한적하고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지지. 침대에 거꾸로 누워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내리쬐는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낮잠 자는 걸 즐겨. 솜이도 나만큼 창문을 좋아하는 게 신기해.
Q.
고양이만큼이나 우리 인간에게도 자기 영역을 알고 지키며 가꾸는 건 중요한 것 같아.
A.
지민 나는 집에 있을 때 집 전체를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방만 내 집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이 내 방이니까. 그래서 부엌이나 거실에서 오래 시간을 보낼 때면 오빠한테 “아, 나 집에 가고 싶다.”, “나 집에 갈게.” 이렇게 말하기도 해.(웃음)
경미 코로나19 때문인지 방의 의미가 더 커진 것 같아. 원래는 잠자고 쉬는 공간이었는데, 요즘은 하루 종일 방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니까 내 일상 그 자체지. 원래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집에만 있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더라. 솜이도 있고.
Q.
나중에 각자 결혼하면 가족 여행도 같이 가고, 아이들도 둘처럼 친한 친구로 만들자고 약속했다는 게 재미있어. 그때가 되면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 것 같아?
A.
경미 그때도 지금처럼 누군가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 물론 나도 안락하게 느껴야겠지만. 지금 이사를 간다면, 솜이가 뛰어놀기 좋은, 솜이를 위한 집에 가고 싶어. 요즘 집에 오래 있으니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사진을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집이면 좋겠어.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록을 자주 하는 편이거든. 그리고 조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집집마다 또는 공간마다 조명을 달리 쓰잖아. 밝아야 할 곳은 밝고, 조도가 적당해야 할 곳은 적당하게 조명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
지민 나는 어릴 때부터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고 싶었어. 왜냐하면 경미에게 함께하고 싶은 존재가 고양이라면, 내게는 강아지거든. 우리 엄마 철칙이 개는 개를 위해서 꼭 마당에서 키워야 한다는 거야. 집의 형태로서도 내가 원하는 나만의 공간으로 가꿀 수 있는 영역이 많아서 좋을 것 같아. 사모예드 한 마리와 작은 동물 한 마리,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길 바라.
글/ 조은식
사진/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