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화 '미나리' 리뷰

조회수 2021. 3. 4.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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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섬세하다. Wonderful! <미나리>를 소개하는 해외 기사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찬사다. “원더풀”은 영화의 만듦새를 향한 상찬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속 대사를 빗댄 은유다. 손녀, 손자를 돌봐주기 위해 머나먼 미국 아칸소까지 날아온 할머니 순자(윤여정)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미나리 씨앗을 아칸소 시냇가에 심는다. 금세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를 신나게 뜯으며 할머니는 손자 데이빗(앨런 김)에게 식물의 효능을 설명해준다.


“데이빗아,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아플 때 약도 된단다. 미나리는 원더풀이야. 미나리 원더풀!”

할머니와 나

어디에 옮겨 심어도 강인하게 살아남는 이민자의 푸른 생명력과 인내를 은유하는 미나리는 영화에서 한국 할머니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 아버지 제이콥(스티븐 연)에 의해 재발견된다.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아칸소 농장으로 이주한 1980년대 한국계 이민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다. 낯선 나라로 이민을 가본 적이 없거나, 80년대에 아칸소 시골 농장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미국의 관객들이 이 영화에 “원더풀”이라며 온갖 상을 수여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울타리 안에서 느껴지는 정서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엄마 모니카(한예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은 일곱 살배기 소년 데이빗의 눈길에서 시작된다. 아이는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대지를 바라본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미국의 시골 풍경. 이삿짐을 푸는 엄마는 어딘지 뿔이 나 있다. 10년간 매일 병아리 ‘똥구멍’을 보면서 암수를 감별해 모은 전 재산을 낯선 땅에 ‘올인’하는 대책 없는 남편이 미덥지 않다.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자 모니카는 한국의 엄마 순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50에이커의 쓸데없이 넓은 땅 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삶이 외로웠던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준 어머니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는다. 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


한편, 할머니 때문에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는 데이빗은 한국 할머니가 질색이다. 냄새나는 한약을 억지로 먹이고, 다른 미국 할머니처럼 쿠키도 안 구워준다. 할머니는 영어도 요리도 못하고 레슬링을 즐겨 본다. 무엇보다 낯선 한국 냄새가 나는 할머니와 한 방에서 자는 것도 고역이다. 영화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할머니가 미워 죽겠는 철없는 손자 데이빗이 심술을 부리고, 그런 그를 사랑럽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장면들이다. 

할머니에게 짓궂게 군 벌로 회초리를 가져오라는 아빠의 불호령에 시들시들한 이파리를 꺾어 온 데이빗의 행동에 박장대소하며 “그래, 니가 이겼다!”라고 외치는 대사는 배우 윤여정의 애드립이다. 

실은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활력을 띠기 시작하는 것은 할머니 순자가 등장하고부터이다. 훈계를 늘어놓거나 타인의 삶을 평가하지도 않으면서 삶의 지혜를 툭툭 내뱉는 순자는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딸을 조용히 위로한다. “너무 애쓰지 말아라.” 미나리를 심은 냇가에 갑자기 나타난 뱀을 쫓아내는 손자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데이빗아, 눈에 보이는 게 보이지 않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미국 이름 데이빗을 할머니는 내내 “데이빗아~”라고 부른다. 그게 마치 사랑의 다른 언어인 것처럼.

이것은 누구의 기억인가요

<미나리>는 관객이 이 가족 속으로 조금씩 녹아들 수 있게 공간이나 사람을 응시한다. 그시선은 카메라의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주로 소년 데이빗의 눈을 통해 보인다. 

한국계 이민 2세대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감독은 아칸소의 작은 농장에서 자랐다)로 알려진 만큼 데이빗의 시선은 곧 어린 시절 감독의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인의 노스탤지어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의 이야기처럼 읽히는 이유는 카메라가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람이나 상황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 고요하면서도 부드러운 시선은 이내 아이들의 동그란 볼에,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 아버지의 담배 연기에, 어머니의 눈물 위에 내려앉아 말끄러미 가족을 지켜본다.

한국 관객에게는 이국적인 미국의 이동식 트레일러, 가족의 거주지는 ‘나의 어린 시절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아니다. 지직거리는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는 70년대 히트곡인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가 흘러나온다. 

80년대가 배경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옷차림이나 공간 디자인은 어떤 국적이나 시대성이 희미하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가 경계 없이 섞여 있는 이 ‘아름답고 원더풀’한 영화는 사실 미국 제작사와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감독이 만든 영화다. 이 뛰어난 미국 영화에 영어보다 더 많은 한국어 대사가 나오고, 전 세계 관객 중 한국 관객에게 더욱 친근하게 해석될 ‘한국적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낯선 곳에 떨어져 부족한 영어로 더듬더듬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교회의 모니카에 내가 대입되거나, 집안에 드리워지는 불길한 징후를 알아채고 방에 숨어 종이 비행기를 접는 남매의 모습은 어떤 이의 유년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라고 언제나 강인할 수만도 없으며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요원하다. 가족은 함께이기에 더 외롭기도 하다. 그렇지만 같은 꿈을 꾸고,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함께 산다. 부모가 나에게 준 ‘미나리’는 그런 것이고, 현재에도 그것은 유효한 구원이라고. <미나리>는 그런 확실한 희망을 손에 쥐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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