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병원에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조회수 2021. 3. 22. 11: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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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혜인 살림의원 원장 인터뷰

병원 가는 게 싫은 까닭은 단지 질병을 확인하는 게 두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번 처음 보는 의사 앞에서 평소 생활 습관과 지병, 먹는 약에 대해 털어놔야 하는 게 번거롭고 부끄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게도 주치의가 있다면…’이라는 바람을 곱씹고 있을 때 추혜인의 에세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만났다. 페미니즘을 토대로 조합원들이 만들어가는 의료 그리고 돌봄의 공동체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 체계를 만든 추혜인 원장은 진료실을 찾아온 환자들의 주치의인 동시에 진료실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과 의료 서비스를 잇는 연결망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왕진 가방을 들고 동네로 나서는 추 원장의 진료실 안팎 여정은 호쾌하면서도 다정하다. 

Q.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 출간된 후 살림의 조합원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A.

은평구로 이사 오고 싶다는 분이 많더라고요. 뿌듯한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해요. 책에 실은 에피소드는 대부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의 일이에요. 코로나19가 터지고 마스크를 쓰고 만나게 되면서 환자분들과 친해지고 알아가는 데 확실히 어려움이 있어요. 책에 나온 것처럼 따뜻한 관계를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겐 좀 죄송하죠. 이전에는 친한 분들이 진료실에 들어오면 포옹부터 하고 시작해서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요즘엔 전혀 못 하거든요.

Q.

살림은 ‘여성주의적 진료’를 지향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요? 

A.

일단 협동조합이라는 형태 자체가 여성주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기존 의료기관 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곳이고, 우리 힘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주민들이 돈을 모으고 힘을 모아 같이 시작한 거죠. 의료진과 관계를 맺는 방법도 다른 의료기관과 달라요. 새 주치의가 오면 환영하고 우리와 합을 맞춰야 하니까 주치의에게도 우리에 대해 알려주고 우리도 주치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일종의 리추얼(의식)이 있거든요. 그런 면이 여성주의적 진료의 밑바탕일 것 같아요. 또 직원들 사이에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요. 나이나 직책에 관계없이 존댓말을 쓰고요. 가끔 점심시간에 세미나를 하는데, 읽은 책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의료기관 직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기도 해요. 

Q.

대학 때 여성주의 활동을 하면서 공대에서 의대로 진로를 바꿨다고 들었어요. 

A.

1학년 겨울방학 때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 활동을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니까 상담을 맡을 수는 없었고, 손으로 쓴 상담 기록을 워드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건을 보게 됐죠. 누가 봐도 성폭력인데 법원에서 성폭력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아 결국 가해자가 무혐의로 풀려나거나 피해자가 무고죄로 맞고소를 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타까웠어요. 그때 성폭력 사건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보고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의사가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 의대에 갔어요. 


그런데 의사가 되고 나서 보니 전국에 성폭력, 가정폭력 원스톱 지원 센터가 있더라고요.(웃음) 그만큼 여성운동가들이 법과 제도를 만들려고 노력해온 거죠. 요즘은 해바라기센터라고 하는 원스톱 지원 센터에 365일, 24시간 전문 상담원과 경찰, 의사가 상주해요. 대단하다 싶고 이렇게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꼭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해결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지 않아도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하기만 하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니까 그 점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Q.

일반 의원을 개원하거나 대학병원에서 일하게 됐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요? 

A.

다른 데서 일하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개인 의원을 운영하는 경우엔 환자들이 병원에서 수익 때문에 비싼 검사나 치료를 권한다고 의심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기선 제가 받는 월급이 제가 올리는 매출과 상관없거든요. 매출을 많이 올린다고 해서 월급을 많이 받지 않아요. 진료하면서 제가 어떤 주사나 검사를 제안할 때 환자들도 제가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셔서 편안하게 제안을 받아들이세요. 사실 의사의 관점이 조금 다르거나 자신 있는 치료가 좀 다르면 비용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의심이 들 수 있죠. 그래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의심이 생기는 구조 자체를 피하고 싶고,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료협동조합을 택했어요. 

추 원장의 왕진가방 속 의료용품.

Q.

일반 병원의 평균 진료 시간이 일명 ‘3분 컷’이라고 하잖아요. 살림은 10분 이상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들었어요.

A.

전체적으로 보면 평균 진료 시간이 10분 이상인 것 같아요. 살림에 정신과나 산부인과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아무래도 가정의학과는 진료 시간이 좀 짧아요. 정신과는 20~40분으로 길고 산부인과도 꽤 긴 편이에요. 근데 수익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어요.(웃음) 조직이 적자가 나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이익을 내려고 무리하게 진료하기보단 사회적인 가치가 있지만 다른 의료기관에서 하지 않아서 우리가 하면 경쟁력이 생기는 부분을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여성주의적 진료도 마찬가지고요. 여성주의적 진료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안심하고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산부인과, 부인과 진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경쟁력을 키운다든지요.


저희가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도 하는데, 시작할 때는 이걸 하는 의료기관이 없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멀리서도 많이 찾아오셨어요. 이는 살림이 더 적극적으로 찾고 싶은 진료 영역이기도 해요. 인권의 관점으로 봤을 때도 필요한데 다른 많은 의료기관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지점이에요. 잘 몰라서 안 하는 경우도 있고요. 소외된 진로 영역을 개발하고 싶어요. 아, 요즘은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려고 살림의 관련 매뉴얼을 받아 가는 곳도 많아요.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해당 진료가 널리 퍼지는 데도 저희가 많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트랜스젠더분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오시는데, 사실 자기 집 근처에 믿고 갈 만한 치료 기관이 있으면 더 좋죠.

Q.

지역사회에서 연결이 끊긴 소외된 부분을 메워주시잖아요. 원장님에게 함께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A.

저는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데, 어떤 의사 선생님들은 이 동네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그분들이 잘못한다는 건 아니고, 그분들로선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는 거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동네에서 어디를 가도 수시로 각종 질환의 약에 관한 질문을 받거나, 친구 혹은 가족이 어디가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진료실에서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알아서 덜 물어보고, 저한테 물어볼 때도 “그런 건 진료실에서 물어봐야지!” 하고 막아주는 순간이 생기더라고요.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어떤 분을 봤는데 다음 날 진료실에 와서 어디가 아프다고 하시는 거예요. 어제 왜 말 안 했느냐고 하면 거기서는 말할 수 없다고, 어떻게 저를 더 피곤하게 하느냐고 마음을 써주세요. 이런 게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호혜적 돌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동네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나는 진료라는 영역을 담당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영역을 담당하는 거고, 그래서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전문은 빅이슈 244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글/양수복

사진/김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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