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이 우리 언니였으면 좋겠다던 90년대생이 영화 만들었다

조회수 2020. 12. 11. 22: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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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

“일랜시아 왜 하세요?” “그러게요….” 박윤진 감독은 운영진이 사라진 게임에 함께 접속한 유저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박 감독은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으로 2002년부터 넥슨의 클래식RPG 게임 '일랜시아'를 플레이해온 유저이자 만들어진 지 7년 된 길드 ‘마님은돌쇠만쌀줘’의 마스터다.


‘망한 게임’, ‘넥슨이 버린 자식’ 등의 악명이 붙은 게임 '일랜시아'.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은 박윤진 감독은 현실 속 바닥난 성취감을 '일랜시아'에서 획득하는 유저들을 만나고, 결국 자신이 오랫동안 이 게임에 접속하는 이유를 찾아낸다. 


그리고 말해준다. 왕국 '일랜시아'는 우리에게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박윤진 감독

아주 오랜만에 '일랜시아'에 다시 접속하니 생각보다 유저가 많더라. 대부분 무언가 팔거나 사기 위해 채팅을 하고 있었다. 최근 유저가 늘어난 상황인가.

장사하는 분들은 예전부터 있던 유저들인데, 오히려 줄어든 편이다. 영화 개봉 소식 이후 복귀하는 분들은 무언가를 사고팔기보다는 게임을 즐기는 데 중점을 두는 것 같다. 한 명이 여러 캐릭터를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유저가 정확히 어느 정도 있는지 파악하긴 어렵다.


‘길드원’ 등 '일랜시아' 유저들에게 어떻게 다큐멘터리 출연을 독려했나.

생각보다 수월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니 다들 신기해했고,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게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길드원뿐 아니라 일랜시아 공식 카페에서 처음 보는 유저들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장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게임을 처음 만들 때 넥슨 측이 예상한 '일랜시아'의 수명은 2~3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크고 작은 게임들이 만들어지고 방치되는데, 게임의 기대 수명은 유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다른 게임과 비교해 '일랜시아'의 스토리가 아주 웅장하지는 않다. 유저들이 즐길 스토리와 해야 할 일이 채워진 기간이 3년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최근 나온 게임들은 유저가 벗어나지 못하게 할 일을 수백 개씩 준다. 숙제(퀘스트)가 쌓이다 보면 어려워지니 그것을 한 번에 통과할 캐시 아이템을 내놓고, 이런 방식으로 게임 회사가 돈을 버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수명은 ‘이 세계를 즐길 기간’이다. 최근 ‘언제나 여름방학’이라는 모바일 게임을 해봤는데, 30일간의 방학이 끝나면 처음으로 돌아간다.(웃음) 원하면 평생 방학을 보낼 수 있다. 어떤 유저는 500일째 방학을 즐기고 있기도 하다. 게임의 수명은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수명은
‘이 세계를 즐길 기간’이다.

'일랜시아' 속 세계가 변하지 않는 동안 현실에서 유저들은 고민이 많아졌고, 다양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성장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한 무렵에는 우리는 왜 일랜시아를 떠나지 못하는지 궁금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가 게임 안에서 무언가를 채우고 있고, 그게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특히 2030세대가 일상에서 소진한 에너지를 '일랜시아'를 하며 충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의 결핍을 게임 속에서 충족하는 유저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나.

누군가는 관계를 맺길 원하고,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자 했다. 길드원들을 직접 만나서도 “이젠 게임이 없어도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데, 왜 이 게임을 할까?” 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우리 또래 사람들이 어떤 결핍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전에는 이것을 ‘우리’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인식했는데, 촬영을 하며 왜 우리 세대는 이런 감정을 겪어야 하는지, 또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생각을 확장하게 됐다.


‘마님은돌쇠만쌀줘’ 길드엔 가입 조건이 있나.

굉장히 까다롭다.(웃음) 쉽게 가입하고 탈퇴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 달에 몇 번 이상 접속해야 한다는 규칙 등이다. 오래된 길드가 별로 없다 보니 이곳에서 게임에 정착하기 위해 도움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다큐멘터리의 많은 부분을 채팅창의 대화가 차지한다. 이 부분을 관객이 낯설어하지 않을지 우려는 없었나.

게임 화면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요새 대면해서 대화하는 시간보다 모니터를 더 많이 보는 하루도 있지 않나. 캐릭터가 있는 메신저 채팅창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명상 음악 같은 '일랜시아' BGM 대신 신나는 K-팝이 흐르면서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일부러 구현한 모습인가.

영화를 기획하기 전부터 이런 모습을 자주 촬영해두었다. 게임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보니 다른 재미를 찾아낸 거다. 편집해서 길드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렇게 노는 모습을 캡처해서 그 아래에 내레이션을 달아 웹툰처럼 구성했었다. 나는 ‘랜툰’이라고 부르는데(웃음) 그야말로 덕질이지.

유저 ‘레렐’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재접속을 약속한다. 게임에선 약속이나 신뢰 관계가 맺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풍경이다.

온라인에선 관계를 맺기 더 조심스러운 면이 있고, 상대적으로 평등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현실에선 신뢰가 깨진다 해도 다른 요소로 복구할 수 있겠지만, 온라인에선 약속이 전부이기 때문에 믿음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게임 속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 약속이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앞으로도 나와 여기서 잘 지낼 거지?’ 하는 마음도 담기는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기울이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체를 바꿀 순 없겠지만, 내가 있는 곳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팅버그(특정 캐릭터를 만나면 게임이 종료되는 현상)를 고치기 위해 넥슨을 직접 찾았고, 노동조합 ‘스타팅 포인트’ 측과 대화하면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듯 보였다. 게임과는 달리 현실에서 매크로를 돌릴 수 있는 인원은 제한적인데, 각자가 '일랜시아' 같은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예전에 관객과의 대화(GV)에서 한 관객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그때도 똑같이 대답했는데, 당연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현실에서 매크로를 돌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 같고,(웃음) 못 돌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엔 학교와 아르바이트 하는 곳, '일랜시아'만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노조원들을 만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하게 됐다.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기울이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체를 바꿀 순 없겠지만, 내가 있는 곳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Unsplash

길드마스터로서 앞으로 어떻게 <일랜시아>를 즐길 생각인지 궁금하다.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나와 ‘부길마’(부 길드마스터)는 길드원들과 어떻게 놀아줄지 항상 고민한다.(웃음) 최근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원래 있던 OX 퀴즈를 비롯해 <일랜시아> 안에서 ‘방탈출’도 가능하다. 이 안에서 함께 새로운 추억을 쌓고 싶다. 또 현재는 인원 제한이 있어 한 길드에 50명까지만 가입할 수 있는데, 길드원이 대부분 꽉 차서 아쉽다. 넥슨에서 인원 제한을 조금 풀어주면 좋겠다. 현실에서 <일랜시아> 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만큼 우리라도 뭉치고 싶다.(웃음)


글/ 황소연, 사진, 김슬기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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