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참혹.. 빗물과 소변 먹으며 살아간다는 사람들

조회수 2020. 9. 3. 10: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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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로힝야 민족에 대해

미얀마의 로힝야 민족은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온갖 박해와 학살을 당해왔다. 로힝야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경을 넘어, 태생적 고향인 방글라데시로 탈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그곳에서도 로힝야족은 환영받지 못했다. 방글라데시의 경제 상황이 대규모 난민을 수용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고, 국경을 맞댄 미얀마와 군사적,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 환대할 수 없었다.


유엔난민기구를 위시한 국제 구호단체에선 긴급하게 난민 캠프를 만들어 로힝야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미얀마를 탈출하는 수십만 명의 난민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설이었다. 구호단체에서 나누어 주는 쌀과 콩, 식용유 정도로 한정된 식량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부실했다. 상수도 시설은 언감생심이고, 곳곳에 지하수를 뚫어 생활용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용 인원이 너무 많아 땅은 쓰레기와 폐수 등으로 오염되었고, 오염된 땅은 당연히 오염된 지하수를 뿜고 있었다. 난민 캠프의 삶이란 한없이 지난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환경보다 더욱 로힝야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기본권의 박탈이었다. 로힝야들은 난민 캠프를 벗어날 수 없었고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머물 수 있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로힝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사람인데,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처지를 앞에 두고 나는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최선의 일이라고는 고작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고 한 장씩 출력해서 주는 것밖에 없었다.


1년에 한 번은 난민 캠프에 방문해 사진을 찍어주기로 스스로 다짐했는데, 올해는 코로나 19 여파로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그들에게 다시 가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다시 넘겨보았다. ‘히스모따라’의 사진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20여 년 전, 갓난아기였던 히스모따라는 엄마의 등에 업혀 국경을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곤 지금까지 난민촌에서만 지냈다. 그녀에겐 난민촌이 인생의 전부이고, 기억의 전부이자, 세계의 전부다. 어릴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한쪽 다리의 성장이 멈추었다고 한다. 그녀는 거동조차 불편한 것이었다. 

NGO 활동가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유난히 호들갑을 떨며 일행을 맞이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평생을 난민촌에서만 지냈을 그녀에겐 이방인 친구들이 그저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안타까운 처지와 달리, 우리를 맞이하던 그녀의 표정은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본 사람들의 표정 중에 가장 맑고 환했다. 


그저 당당해 보였고 이 세계를 한없이 긍정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것이 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로힝야를 떠올릴 때면 히스모따라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코로나 19 사태가 가뜩이나 질곡 많은 로힝야들을 비껴가기를 기도한다. 부디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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