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초록 지붕집' 찾은 덕후의 여행기

조회수 2020. 8. 26. 14: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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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머치 해서 사랑스러워, 빨강 머리 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안 좋은 해충은? 그건 바로 대충이라는 벌레야.’ 자수성가한 중년 CEO가 했을 법한 이 말을 한 사람은 동방신기의 유노윤호다. 그는 열심히 사는 캐릭터로 ‘열정 만수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힘들 때는 자신을 유노윤호라고 여기면 이겨낼 수 있다는 ‘유노윤호 세뇌법’도 유행시켰다. 20대 사이에서 유노윤호는 롤모델이라기보다 흥미로운 밈으로 소비된다. 최근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은 그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일단 힘이 들어간 것은 멋지지 않다. 패션에서는 ‘꾸안꾸’를 세련되다 한다. '힘 빼기의 기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모티콘 같은 상업디자인도 단순하고 키치한 것을 선호한다. 애쓰는 건 멋지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세대에게 ‘과하다’와 ‘부담스럽다’는 평가는 최악이다. 대화할 때도 TMI(Too Much Information)인지부터 걱정하니까. 


유노윤호를 떠올렸던 건 한 후배와 대화하다 나온 말 때문이었다. 후배는 요즘 10대, 2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웹소설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웹 소설 주인공들은 고생 안 해요. 승승장구만 해요. 조금이라도 위기가 생기면 독자들이 안 읽겠다고 협박하거든요.” 주인공은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건 물론이고 능력이 다재다능을 넘어 도깨비 수준이며 어떤 고난도 겪지 않고 살짝 엮이더라도 금세 이겨낸다고. 다들 힘드니까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가 보다 생각을 하다가 쓸쓸해졌다. “그러면 우리가 좋아하던 '달려라 하니' 같은 스타일은 한물간 이야기가 돼버렸네. 나 어릴 때는 그게 대세였는데. 아! 그러니까 요즘 유노윤호 같은 캐릭터를 재밌다고 하는 거구나. 노력 안 해도 성공하는 주인공만 보다 보니 신선해서.” 


초록 지붕 집에서 만난 앤

애쓰고, 실패하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이야기는 정말로 한물가버린 걸까. 하지만, 하지만.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냄새와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게 어떤 생명력이 있을까? 나는 전이나 지금이나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캔디형 캐릭터가 좋다. 애쓰고 실패하는 캐릭터여서 특히 빨강 머리 앤을 사랑했다. 앤과 관련된 것을 읽기만 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아 2012년엔 캐나다에 있는 앤 마을에도 갔다. 책을 쓴 루시모드 몽고메리 작가가 살았던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는 나 같은 덕후들의 성지다. 해마다 앤 덕후들이 소설 속 배경이 된 앤의 집, 작가가 일했던 우체국, 작가가 결혼했던 곳, 작가의 무덤 등을 직접 보려고 찾는 곳. 홀로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20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비행해서 달려간 곳에서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다녔다.


그린게이블즈 뮤지엄 근처를 다닐 때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인이냐고 물어왔는데 처음에는 동양인이면 다 그렇게 보이나 싶어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빨강머리 앤'애니메이션의 유행으로 이 마을은 거의 일본인이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만난 한 중년의 일본 여성은 앤에게는 섬나라 사람 특유의 씩씩한 기질이 있어 많은 일본인이 공감하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에서 앤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고. 그 말을 들으니 앤처럼 희망하면 무언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는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앤이 가진 힘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내는 강인함에 있는데 이 가치는 더 이상 젊은 세대에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어떤 캐릭터를 좋아할 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로 대단해 동경하는 경우와 자기와 동일시하며 감정이입 하는 대상. 요즘은 전자인 캐릭터를 선호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앤이 대단치 않아 좋았다. 어릴 때 고아가 되었고, 입양된 곳에서도 처음에 남자가 아니어서 거부당하고, 빨간색 머리카락을 가져 놀림당하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아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고, 외로워서 친구에 집착하며 당돌하고 수다스러워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아이. 커서는 대학 진학을 하려 했지만 집안에 닥쳐온 불행 때문에 포기하고 취업을 하는 앤. 

실망하는 것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20대엔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라는 질문을 종종 들었었다. 부러워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보기 불편하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세상이 생각하는 공평함은 다 같이 마라톤에 출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출발 순서를 다르게 하거나 보조 장비를 주는 공정함이 필요하다. 평균 이하 조건을 가진 사람이 평균 이상의 조건을 가진 사람과 경쟁할 때 같은 노력을 해서는 비슷할 수 없었다. 나의 동력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었고 시간을 쪼개고 몸을 혹사시켜 평범해 보이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을 만나 웃지만 돌아오는 길은 외로웠다.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내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부풀어 있을 때 앤을 만났다. 비슷한 유년을 보낸 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을 독파해나갔는데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박혔다. 잘 웃는 사람은 사실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누구나 자신만의 어둠을 한 움큼씩 쥐고 살 수밖에 없으며 그건 없앨 수 없고 다만 덮어두고 관리할 수만 있다는 것. 앤, 네 말이 옳다고 믿으면 너처럼 밝아질 수 있어? 행복해지고 싶어서 앤의 말을 외웠다. 덕분에 일찍 애어른이 되느라 잃어버린 소녀의 마음을 찾았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앤에게 서서히 마음을 주기 시작했듯이, 상처받기 싫어 기대하지 않으려는 마릴라 아주머니에 가깝던 나의 마음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말하는 앤에 가까워졌다. 인생에서 한때 ‘나는 앤이야.’ 생각했던 ‘앤 세뇌법’을 통해 울퉁불퉁한 시기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며 견뎠다. 가까이에서 감사를 전하고 싶어 캐나다 앤의 마을에도 찾아갔던 것이다. 

힘 빼고 사는 게,
더 힘이 들어간다

지금의 눈에서 보면 앤은 멋없다. 요즘 트렌드인 시크함과는 거리가 멀다. 예쁜 옷을 입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며 한껏 꾸미려고 하니까 촌스럽고, 심하게 긍정적이어서 지켜보기 애잔할 정도다. 자주 감탄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투 머치 인포메이션’을 남발하는 수다스러움은 친구였어도 멀어질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앤은 유일한 앤이 아니고 다이애나를 따라 하는 앤일 뿐이겠지.


현실은 너무 채도가 높아서 자주 압도되나 감정이입 하는 캐릭터를 하나쯤 통하면 감당할 만해질 때가 많다. 대리만족할 수 있는 캐릭터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자기의 인생에 대입하고 듣고 싶었던 말을 한껏 들을 수 있는 캐릭터를 하나쯤 가지는 것도 좋다. 너만 힘든 것은 아니니까 힘내라는 말을 대단한 사람이 하면 짜증나지만 비슷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증거로 하면 믿고 싶어지니까.


하나 더, 과한 것을 지양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자신을 너무 검열할 필요는 없다. ‘쌩얼’처럼 보이지만 예쁜 메이크업은 신부 메이크업만큼의 시간과 노고를 요하고, ‘꾸안꾸’로 입는 사람들의 옷장에는 화려하게 입는 사람들의 옷장만큼이나 많은 옷이 있기 마련이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대명사인 피카소도 초기에는 사실주의에 기반 한 전통적 그림을 그렸다. 힘 빼고 사는 것에도 힘들이는 만큼이나 노력이 필요하며 힘을 주어본 사람들이 느슨해질 수도 있다. 과한 것을 빼는 건 쉽지만 없는 걸 채우기는 어렵기에, 힘주어서 기대하고 도전하고 사랑하면서 많이 실패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다. 우리는 남들의 결과만 보니까 쉬워 보인다고 부러워하지만 그들 모두 빠짐없이 뒤에서는 울고 있다. 이건 업계 비밀인데… 열심히 살 필요 없다는 말을 믿는 건 자유지만 그 말 하는 사람들, 다 열심히 살았었다? 


정문정

쓰는 사람.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냈다. 인스타그램 @okdom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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