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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마다 기획전 열린다는 색감천재 감독은?

조회수 2020. 8. 6. 19: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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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를 예찬하다 / 글 김소미
출처: <클레르의 무릎>(1970)

나는 프랑스 영화를 통해 여름휴가의 낭만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제대로 가져본 적 없으나 분명히 감각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이상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의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영화 속 여름은 특별하게 기억된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여름은 우연과 신비의 계절이다. 도시살이에 지친 인물들은 잠시 일상을 탈출해 새로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골 혹은 해변으로 훌훌 떠난다.


휴양지의 혼란

출처: <해변의 폴린느>(1983)

여름을 향한 감독의 사랑은 데뷔작부터 시작됐다. 로메르의 첫 장편 '사자자리'(1959)는 남들 다 가는 바캉스를 가지 못한 채 파리에 남아 8월을 보내는 남자 피에르의 이야기를 그린다. 


'해변의 폴린느'(1983)에선 열네 살이 된 주인공 폴린느가 늦여름의 해변을 떠돌며 사촌 언니 마리온과 주변 남자들의 사랑놀음을 엿본다. 기대와 달리 볼품없는 어른들의 관계에 환멸을 느끼지만, 폴린느에게도 첫사랑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출처: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인 '녹색 광선'(1985)의 델핀은 이혼 후 여름휴가지에서 로맨틱한 만남을 기대하는데, 정작 여행은 내내 지리멸렬하기만 해서 고통스럽다.


'여름 이야기'(1996)의 가스파르는 무려 세 명의 여자 사이에서 자기감정을 놓고 우물쭈물하느라 계절이 지나가는 줄도 모른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에서는 친한 친구가 휴가를 떠난 사이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 블랑쉬가 나온다. 연인이 있는 인물이 새로운 이성에게 매혹을 느꼈다가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로메르 영화의 오랜 패턴과 마찬가지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여러 선택 가능성을 탐구한다. 

계절을 붙잡을 수 있다면

출처: <녹색 광선>(1985)

로메르의 영화에서 문학적, 철학적 지성으로 다져진 뛰어난 이야기만큼이나 빛나는 것이 바로 계절의 한때를 온몸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특유의 생동감이다. 유명 휴양지 해변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어느 외진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로메르의 카메라는 7~8월의 빛과 초록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그의 영화에서 살아 숨 쉬는 여름의 이미지 중에서도 걸출한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두 개의 장면을 호명하고 싶다. 첫째는 누가 뭐래도 '녹색 광선'의 엔딩 신. 델핀과 그의 (미래의) 연인이 나란히 앉아 석양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 장면은 델핀이 주변에 모인 동네 할머니들과 대화하고, 전설 속 녹색 광선을 보기 위해 바닷가를 소요하는 시간이 거의 실시간의 기록처럼 담겨 있다. 


이 ‘기다리는 얼굴’을 붙잡고 있는 카메라와 그 시선을 공유하는 관객은, 우리가 마음먹고 일몰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분초를 다투어 온 세포를 시각에 집중한다. 

출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1987)

두 번째로 꼽을 영화는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1987)이다. 네 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의 첫째 챕터 ‘블루 아워’는 시골에 사는 레네트와 도시 출신인 미라벨의 짧은 전원생활기다. 야생화와 잡초가 무성한 풀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식탁을 놓아두고 즐기는 두 여성의 즐거운 만찬 장면은 언제 떠올려도 넉넉한 부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정말 놀라운 정적이야. 파리에선 이런 거 꿈도 못 꾸거든!” 아이처럼 감탄하는 미라벨에게 레네트는 자연의 비밀을 하나 발설한다. 


동이 트기 직전, 1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온 세상이 신비한 푸른빛과 완전한 고요로 물든다고. 제각기 낮과 밤을 책임지는 동물들이 그 찰나의 시간 동안만큼은 모두 잠들어 있다고. 신비에 심취한 두 여자는 이 블루 아워를 직접 느끼기 위해 때를 기다리지만, (로메르 영화답게) 전날까지도 들리지 않던 요란한 트럭 소리가 끼어들어 허탈한 실패를 맛보고 만다.

감각하고 반응하기

출처: <녹색 광선>(1985)

계절감이란 결국 먹고, 마시고, 걷고, 배회하고, 기다리고, 만지고, 웃고, 놀라고, 춤추는 온갖 사소한 행위와 감각을 통과해 비로소 형상화된다. 다시 '녹색 광선'으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에서 회자되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화면에 녹색 광선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본 순간 환희를 터뜨리며 순간 온몸을 꿈틀거리는 인물들의 진솔한 리액션에 기인한다. 


사실 영화에 담긴 녹색 광선은 특수효과를 사용한 것이다. 2010년 에릭 로메르가 타계한 이후 '포지티브'의 기자 아드리앙 공보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보내온 글에 재밌는 일화가 담겨 있다. 인터뷰를 잘 하지 않기로 소문난 여든아홉 살의 로메르가 인터뷰 주제를 ‘해변’으로 정했다고 하자 뜻밖에도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에릭 로메르는 '녹색 광선'의 엔딩 신 촬영일이 실제로 녹색 광선을 볼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조건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때마침 멀리서 도착한 촬영기사가 많이 피곤한 상태임을 고려한 로메르가 촬영 시간을 미뤘고, 우연히 포착한 그 최적의 순간은 결국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 고약한 엇갈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만약 실제로 녹색 광선을 포착한 화면이 있고, 녹색 광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광선이 반짝 빛난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들의 얼굴을 잡은 화면이 있다면 우리는 어느 장면을 더 오래 기억하려 들까. 절묘한 풍경화와 인위적인 인물화 중 우리 삶에 더 가까운 것은 어느 쪽일까. 

출처: <여름 이야기>(1998)

신기하게도 인간이 계절을 기억하는 방식은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지난해 여름의 최고기온이 36℃였다고 떠올리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훅 하고 땀내가 끼쳤던 한낮의 거리와 불쾌하기 그지없던 감각을 기억한다. 


그 어떤 신기루 같은 자연의 조화도 나 혹은 너의 존재로 환원되고, 계절이라는 당연하고 관습적인 명제는 철저히 경험적인 세계로 탈바꿈한다. 계절에 관해서라면, 에릭 로메르 영화의 마술은 바로 이런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전환의 순간에야말로 여름은 감정과 반응의 배출구로서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휴가 기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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