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곳이? 이국적 풍경을 자랑한다는 '묘지'

조회수 2020. 6. 22. 14: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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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곳, 묘지 산책

볕 좋은 어느 오후, 삶과 죽음 사이를 산책한다. 저마다의 사연이 적힌 묘비들, 산 자가 들고 온 생화 한 다발이 죽은 자 앞에 놓였다. '생과 사'라는 묵직한 화두를 품고도 그저 호젓한 곳. 여기는 합정동 144번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이다.


130년의 시간, 근현대사의 흔적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이 처음 조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여 년 전인 1890년 7월이다. 13,224㎡에 이르는 면적에 17개국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현재 이곳에 묻혀 있다. 그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나 독립 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들이며 대부분 외국인이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근대사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묘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간행해 일제에 대항하는 기사를 썼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연세대학교 전신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버슨 일가의 가족 묘지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 잡지 속 외인묘지

한참 가노라면 당인리역에 다다른다. 키장다리인 숲이 반월형으로 둘러싸인 언덕이 있으니, 이곳이 외인묘지다. (중략)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오래 발간된 조선 잡지인 <삼천리>에도 외국인 묘지 관련 기사가 등장한다. 1938년 08월 01일자 잡지에 실린 ‘서울 외인묘지, 당인리를 찾아서’ 기사에서는 ‘묘지 전체의 명랑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이곳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은 명랑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한강 개발 붐이 일었던 1970년대는 강변북로와 서울지하철 2호선 건설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불편해진 접근성, 주변 환경의 쇠락으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 


하지만 이후 단순한 외국인 공동묘지가 아니라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의 현장이라는 각성이 일고 나서야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게 불과 15년 전 일이다. 현재는 도심 속의 숨은 명소로 꼽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한 소설가가 말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고. 130년의 시간을 두 발로 디뎌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도심 속 묘지 산책. 여기는 합정동 144번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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