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고 싶진 않지만 아이는 너무 예뻐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싫었다
오빠 있는 집의 그릇된 특성을 따라, 집에서 ‘기집애가’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인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기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내게 긍정적으로 느껴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친구가 결혼한 그해에 ‘(구)남친(현)남편’을 만났고, 4년 후 내가 먼저 프러포즈를 해서 결혼하게 됐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노키즈존을 좋아했던 나
나는 ‘아가’나 ‘동생’을 볼 기회가 잘 없었다. 아기를 예뻐하는 어른들을 보면 질투가 났고, 아들의 돌고래소리를 들으면 몸서리가 쳐졌다. 울음소리나 칭얼대는 소리가 들리면 허겁지겁 이어폰을 끼어 귀를 막았다.
노키즈존이라는 팻말을 보면 먼저 마음이 편해졌고,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차기도 했던 것 같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옹졸하고 부족한 인간이었다.
호르몬의 장난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 나는 아이가 너무 예뻐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에서 저자 사카이 준코는 이것을 호르몬의 영향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마 나는 느즈막히 아이에 대한 감수성이 생긴 모양이다.
사랑해서 낳지 않기로 했다
힘들고 포기하는 것도 많겠지만 아이와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친구들을 보면 참 예쁘고 좋아 보인다. 가끔 남편과 우리가 아이가 있었더라도 행복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훌륭한 주 양육자가 될 자신은 없어서 낳지 않겠다는 결심은 내게 유효하다. 우울의 기복이 심하고, 체력도 약한 내가 부모, 특히 ‘엄마’가 되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너무 예뻐 어떨까 상상해보다가도, 그 상상은 곧바로 무너진다. 조카를 예뻐하는 정도에서만 끝날 마음인 건지도 모른다. 콘텐츠를 게시하는 지금. 이미 어린이날도 지난 후지만 어쨌든 아가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