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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나를 울게 한다

조회수 2020. 6. 2. 17: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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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문정, 그림 조예람

시골 강아지가 네 뼘쯤밖에 안 되는 짧은 목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뱅글뱅글 도는 경우를 본다. 찌그러진 그릇 옆에 방치된 똥 몇 개가 있다. 그 모습 앞에서 유년기의 어떤 심정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한자리에서 맴돌았었지. 누군가 본다면 당장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들도 얼마나 많은데 불만이냐고, 투정하지 말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애매한 불행. 쌀 없고 옷 해진 절대적 가난은 아닌데, 조금 더 나아가려 하는 순간 목이 졸려 주저앉게 되는 가난.


‘Don’t worry, Don’t cry’를 내 맘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돈 때문에 걱정이고 돈 때문에 우네.’ 월 35만 원짜리 고시원에 누워 얼룩진 천장을 보면서 ‘여기서 죽으면 얼마 만에 발견될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활비를 벌며 대학에 다니느라 그 시기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시간이 없어”였다. 돈 없는 대신에 유일한 자산인 몸으로 버티느라 에너지 음료를 많이 마셨다. 그때 저당 잡힌 체력을 아직도 못 찾아왔는데 아마 영원히 못 찾을 것 같다.  


회사에서 자리 잡고 4년제 대학 출신의 평균 연봉 이상을 받게 되면서 문득문득 억울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먹었겠구나. 가격부터 보지 않고.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배웠겠구나.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부터 고민하지 않고도. 나는 이제야 이런 세상의 초입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는 중인데 어떤 이들은 자연스럽게 살고 있구나. 그래서 나에게 자주 질문했구나. ‘넌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라고. 그게 칭찬이 아니고 의아함이었구나.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시기를 지나니 전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자유와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싫은 걸 덜 할 수 있는 자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용기. 비겁함은 보통 절박함에서 나오고, 절박함은 대개 통장 잔고와 관련되어 있다. 돈이 많아지면 집착하게 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다(엄청 많이 생기면 또 다르려나). 돈이 생겨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돈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확연히 줄은 거다. 일상의 제약이 옅어졌다. 간당간당한 잔고를 외우고 있어야 할 땐 불편했는데.


돈, 원하고 원망스러운

출처: KBS <추노>

돈이 없을 때나 생기기 시작했을 때나 갈팡질팡한 건 마찬가지였다. 원하면서도 미워하니 불화할 수밖에.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서도 돈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 부자를 부러워하면서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고 싶은 마음. 돈이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마음, 그러다가도, 어쩌면, 그게 다는 아니라도 상당 부분이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채 돈에 관한 이야기를 민망해하는 동안 어떻게 잘 써야 하는지, 받아야 하는 돈은 어떻게 요구하는지를 못 배우고 직장인이 됐다. 돈이 절실하면서도 “그래서 비용은 얼마인가요?” “더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비용이 안 맞아서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요” 같은 말은 입 밖에 내기 어려워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뉴스페이퍼>가 문학계 불공정 관행을 취재한 2020년의 기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A 시인에 의하면 원고료 지급 기한은 출판사마다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책이 출간되어 집에 책이 도착하는 날쯤이다. A 시인은 “보통 도서 도착 후 하루 이틀 사이에 고료가 입금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들어오겠지.’ 하고 기다린다.”는 말로 먼저 원고료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작가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문학계에서 금액을 언급하는 일은 무례하거나 천박한 일로 치부 당하곤 했다.’


돈에 관해 말해주지 않는 게 무례한 일인데도 반대로 여기는 일이 많다. 어릴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는데, 그때도 밀린 월급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면 사장은 어린애가 돈을 밝힌다고 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 원고 청탁이나 강의 요청이 종종 들어왔는데, 첫 의뢰 메일에서 비용을 말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가능할지 알려주면 추후에 비용을 논의하겠다 하는 곳이 대부분이고(아니 비용을 알려줘야 가능한지 알려주지요). 비용을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 봐 비용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곳도 많았다(비용을 말하지 않는 게 더 실례라고요…). 다들 돈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분위기가 관행이 된 게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챙기려 노력했다. 콘텐츠 의뢰나 협업 요청을 할 때 꼭 처음부터 비용과 지급 일정을 알려주었다. 

당당하고 정확한 밥벌이를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때는 처음부터 비용을 알려줄 것, 내가 부탁을 받을 때는 민망해하지 않고 비용을 물어볼 것. 기본이자 상식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인턴 등 경력이 적은 사람이 먼저 말하기는 어려우니 돈이 급하지 않을수록, 불이익 걱정이 덜한 선배일수록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가끔 쿠션어 없이 “비용은 얼마인가요?” 하고 물어보면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진행은 하고 싶지만 비용이 적어서 하기 힘들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렵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거절하지 않고 비용이 맞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자꾸만 비용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요구해야 불합리한 업계 관행이 바뀔 수 있고 임금 현실화에 도움이 된다.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속물처럼 보일까 봐 검열하는 동안 돈은 너무 많이 오해받았다. 떳떳한 돈에 대해서라면 당연해지자. 자립한 어른으로 자신을 지키는 돈의 엄중함에 대하여 말하자. 소설가 김훈은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 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한 것이다. 아,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김훈은 글을 마무리하며 ‘돈과 밥과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고 했다.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나와 주변을 책임지는 일상, 그것보다 더 큰 어른의 일이 어디 있을까. 정확한 대가를 요구하고 더 많은 경제적 여유를 얻어서 자유로워지기를 꿈꿔야 한다. 돈 때문에 하는 일과, 꼭 돈이 아니어도 하는 일부터 정확히 구분해야 삶에 질서가 생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이야기를 하는 데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재테크 정보만 필요한 건 아니다. 일단 우리, 울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는 연습부터 하자. 이것부터 해결해야 돈에 관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시작하는 <돈 크라이> 연재에서는 돈 때문에 자주 울었던 사람이 그렇지 않게 되면서 느낀 과정과 보이게 된 세상에 대해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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