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에 책방이 생겼다

조회수 2020. 3. 13. 19: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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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여서 매일 희망을 본다

오늘은 성매매 집결지에서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 선미촌을 소개하겠습니다. 전주시청 뒤편에 위치한 선미촌은 전주 시민들에게는 오랜 기간 터부시된 공간이었습니다. 밤이면 유리창 너머에 붉은 등을 켜는 성매매 업소가 모여 있는 이 동네는 서노송동이나 물왕멀길이라는 지명보다는 선미촌 혹은 시청 뒤 홍등가로 불려왔습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학원가, 보도만 건너면 병원과 시장이 있고 200m 부근에 대형 쇼핑몰도 들어섰지만, 밤이 되면 거짓말처럼 도심의 가로등은 꺼지고 붉은 등만이 형형하게 빛을 내는 선미촌.


현재는 전주시가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성매매 업소 집결지의 낡은 건물들을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로 사업명이 바뀌며, 거리를 바꾸려는 노력은 느리게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예술촌이라고는 하지만 예술의 흔적은 전무했던 선미촌에 처음 예술다운 것이 생겨났는데, 바로 책방 ‘물결서사’입니다. 성매매 업소 건물에 책방이 들어선다는 것부터 이미 범상치 않지만 이 책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욱 심상치 않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곱 명의 예술가가 운영하는 책방, 물결서사(전북 전주시 완산구 물왕멀2길 9-6)를 찾아봤습니다.  


(왼쪽부터) 임주아(시인), 최은우(화가), 장근범(사진작가), 김성혁(성악가), 고형숙(한국화가), 서완호(화가), 민경박(영상 작가)

Q1. 서로 분야가 다 다른데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요. 전주시에서 예술가들에게 제안해서 만들어진 책방인가요?

서완호 책방의 하드웨어는 장근범 작가가 만들고, 책방 안의 내용은 같이 채웠어요.  

김성혁 시에서 제안한 게 아니라, 그 반대예요. 일단 물왕멀길이 전주시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포함된 동네이긴 한데, 여기 모인 작가들은 이 안에서 꾸준히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전주시가 매입하고 활용하지 못하던 공간을 저희가 대안 공간으로 책방을 해보겠다고 시에 제안했어요. 

Q2. 굳이 선미촌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임주아 선미촌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작업해온 장근범 작가가 저희에게 이곳에 문화 공간을 만들고 함께 예술을 채워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선미촌이 예술가들이 모여서 무언가 해볼 만한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아서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은 이 곳이 오랫동안 성매매 업소 집결지였기 때문이잖아요. 한옥마을이나 객사 같은 공간은 이미 전주시에서 중심이고 무언가가 새로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곳은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저희에게는 더 끌리는 곳이었어요. 

Q3. 그렇다면 예술 공간으로서 시작한 게 왜 책방이었나요.

임주아 신기하게도 책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책을 사든 안 사든 책방은 다들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주민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미촌에 사는 걸 부끄러워하는 주민들이 많으세요. 누가 ‘어디 사세요’ 물어보면, 그냥 ‘전고(전주고) 근처요’ 이렇게만 말씀하신대요. 

그런데다 어디 들를 만한 문화공간 하나 없으니 자기 동네인데도 애정을 갖거나 사랑을 줄 수가 없죠. 책방 만들기 전에 “선미촌에 뭐가 생겼으면 좋겠냐”고 주민들에게 여쭤보니 ‘책을 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Q4. 동네 주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 프로그램들도 운영하고 있던데요.

임주아 옆집에 만신이라고 여자 무당분이 사시는데, 낮에는 고물을 주우러 다니시고 동네를 반장님처럼 돌아다니세요. 저녁에는 신당에서 신을 모시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고물 줍는 일을 하시는 건데, 그게 저희랑 비슷해요. 저희도 창작자로 살아가기 위해 투잡하면서 밥벌이를 하니까요. 이분이 매일 저희한테 오시는데 이야기꾼이세요. 자기 살아온 이야기,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듣고 있으면 정말 재밌거든요. 이 분을 모시고 인생 이야기를 듣는 주민 발굴 프로젝트도 했어요. 

Q5. 동네 주민들로서는 낯선 젊은이들이 와서 책방을 열었으니 신기했을 것 같아요.

김성혁 신기해하기보다는 욕을 많이 하셨죠.(웃음) 너희가 뭔데 여기 와서 땅값 올리려고 하느냐 하고. 처음엔 좋은 소리 못 들었어요. 저희가 소통하려고 애쓰니까 시간이 지나서 맘을 열어주신 거지. 1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과 대화도 하게 됐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들도 저희를 먼저 알아보기도 하고. 예술가가 책방 운영한답시고 잘 오지도 않고, 몇 달 하다 말았으면 신뢰가 쌓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변화를 느낄 때 보람 있어요. 저희가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은 대하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요. 

Q6. 실내 인테리어도 직접 한 건가요. 

장근범 도시재생은 특정한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원래 갖고 있던 역사나 이야기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이 공간을 변화시킨 방식이 저희가 바라는 도시재생이에요. 저희는 60년 된 이곳의 흔적을 다 유지했어요. 천장도 그대로 두고, 휠체어 이동을 생각해서 문도 넓게 만들었어요. 최대한 공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저희 지혜를 활용했어요.


벽지도 원래 있던 것 위에 하얗게 칠하기만 했어요. 이 위에 지붕 자리도 일부러 남겨놨고요. 이 건물이 뜯고 보니까 덧대고 덧댄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걸 없애고 새로 만들지 않는 데 집중했어요. 보시면 동네에서 주워온 게 더 많아요. 의자나 그런 것도 이 동네에 원래 있던 거나 이 장소에 원래 있던 것들을 그대로 뒀어요. 저기 포스기도 저희 어머니가 가게(족발집)에서 쓰시던 거 가져왔어요.

Q7. 이 동네에서 친해진 사람들이 있을 텐데, 지금 선미촌의 거주하는 건 어떤 분들인가요.

고형숙  옆에 국수 가게 하시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성매매 업소 여성들에게 새벽에 국수를 배달하시거든요. 그분이랑 옆에 만신 이모. 이 두 분이랑 특히 친해요. 책방에 앉아 있으면 하루에 두세 번 오실 때도 있을 정도죠. 일요일에는 저한테 고장 난 TV를 와서 고쳐보라고 하시고.(웃음) 가서 봤는데 결국 못 고쳤어요. 그리고 동짓날에는 옆집 이모가 동지죽을 끓였다고 들고 오셔서 맛있게 먹었어요. 이모들이 정이 많아요. 저희가 회의하는 날은 국수 먹는 날이에요. 다 같이.  

Q8. 이곳이 60년 된 곳이죠.

최은우 그 때문인지 검찰청에서 오신 분이 계속 여기 어디서 본 것 같다고.(웃음)  


고형숙 만신 이모는 맨날 여기 귀신이 있다고 하세요. 저기 있구먼 하고 그냥 지나가세요.(웃음)

Q9. 서점이 서노송동 물왕멀 선미촌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임주아 ‘물결서사’라는 하나의 이름에 많은 함의가 있어요. 오늘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재생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청년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지역 이야기도 할 수 있죠, 책방 이야기, 예술 이야기. 그런 것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도 하는 것 같고. 전주에 이런 공간이 또 없으니까.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고요. 장 작가 말로는 세계 최초일 거라는데.(웃음) 성매매 업소 집결지 안에 서점이 있고, 일곱 명의 예술가가 운영하는데 예술가들의 장르가 다 달라? 이런 다양성을 책방이 품고 있다는 사실이 전 무척 자랑스러워요. 

Q10. 전주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꾸려가는 직업인이자 예술가예요. 지방 청년이라는 감각을 유지하면서 전주에서 예술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같은데, 예술가 혹은 개인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언가요.

민경박 “전주에서 예술 하기 쉽지 않죠?” 하고 물어보셨는데, 진짜 쉽지 않아요. 예술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거든요. 물이 없으니 물고기가 숨을 쉬기 어렵죠. 그나마 꿈이라면 그런 생태계를 저희 힘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김성혁 작가도 후배를 여기서 데뷔시켰는데, 저희가 여기서 자리를 잡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제 꿈이기도 하고 ‘물결서사’의 꿈이기도 해요.


서완호 한국에서는 답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계급이 나뉘어 있어요. 저는 운 좋게 해외에서 전시하면서 외국 작가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이 어디 출신이고 거기서 영향을 받아 이런 작업이 나왔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점이 부러웠어요. 우리는 서울이 아니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낙오됐다고 여기잖아요. 지금은 다들 각자도생만 있을 뿐 문화적 형태나 색깔이 없는 것 같아요. 저도 한때 자포자기했는데 지금은 내 방식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려면 기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곳에 가지 않아도 여기에서 자기 이야기를 해나갈 기반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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