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흑역사가 봉인된 오키나와 구 해군사령부 방공호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남국의 바다를 가진
동양의 하와이 오키나와
오키나와 나하공항과 그 앞 바다,
나하 시내를 굽어 볼 수 있는
토미구스쿠 언덕 지하에 남아 있는
조금 무겁고 역사적인
장소인 구 해군사령부 방공호
태평양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원폭 투하의 빌미를 제공한
엄청난 전투와 참혹한 만행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오지마에서 끔찍한 교훈을 얻은
양 진영은 각자 강화한 전략으로
곧바로 오키나와전투를 맞이했다.
오키나와를 치고 일본 본토로 상륙해
미국은 전쟁을 끝낼 계산이었다.
일본의 전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고
전승에 1도 효과가 없을 것을 알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지독한 소모전을 통해
미군을 괴롭혀 본토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최대 규모의 카미가제 항공기와
최대 전함 야마토의 전무후무한
항공.수상 자살 특공이 실행되었다.
어린 여학생까지 징발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했으며
전선의 일본군 총알받이로 끌려 다녔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하였고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군대는
수류탄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1944년 일본해군사령부는
지구전 수행을 위해 함포 사격에도 견딜
토미구스쿠 언덕 지하에 450m 길이의
미로같은 지하방공호를 만들었고
무모한 각오로 버틴다.
1945년 6월 4일 미군이
상륙해 일본 진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격렬히 응전하다가 힘이 다하자
6월 13일 사령관 오타 미노루 소장을 비롯
부대원들이 집단으로 자결해 버렸다.
본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한 명까지’의 저항은
오히려 미군에게 본토 상륙보다는
원폭 투하를 선택하게 만들었고
태평양전쟁은 끝장을 보게 된다.
오키나와 전투 전체 전몰자 수 : 200,656명
일본 측 : 188,136명(오키나와 주민 37,139명 포함)
미국 측 : 12,520명
전쟁의 광기 속에 총알받이로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는
본토와 오키나와 간 반목과 차별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구성 및 제작 / 디지틀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