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흑역사가 봉인된 오키나와 구 해군사령부 방공호

조회수 2018. 12. 14. 18: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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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남국의 바다를 가진

동양의 하와이 오키나와

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름다운 풍광의 오키나와 코끼리 바위

오키나와 나하공항과 그 앞 바다,

나하 시내를 굽어 볼 수 있는

토미구스쿠 언덕 지하에 남아 있는

조금 무겁고 역사적인

장소인 구 해군사령부 방공호

출처: 구해군사령부호 홈페이지

태평양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원폭 투하의 빌미를 제공한

엄청난 전투와 참혹한 만행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오지마에서 끔찍한 교훈을 얻은

양 진영은 각자 강화한 전략으로

곧바로 오키나와전투를 맞이했다.

출처: 미 육군 퍼블릭 도메인
1945년 5월 오키나와전투에서 2대대 1해병연대

오키나와를 치고 일본 본토로 상륙해

미국은 전쟁을 끝낼 계산이었다.

출처: 미 육군 퍼블릭 도메인
오키나와전투 지도

일본의 전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고

전승에 1도 효과가 없을 것을 알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지독한 소모전을 통해

미군을 괴롭혀 본토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출처: 미 해군 퍼블릭 도메인
카미가제 공격을 받은 USS벙커힐함

최대 규모의 카미가제 항공기와

최대 전함 야마토의 전무후무한

항공.수상 자살 특공이 실행되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 북부에서 미국 해군 수송기의 폭탄 및 어뢰 피해를 당한 후 침몰하는 일본 전함 야마토

어린 여학생까지 징발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했으며 

전선의 일본군 총알받이로 끌려 다녔다.

출처: 미 육군 퍼블릭 도메인
흰 깃발을 들고 있는 오키나와 여자아이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하였고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군대는

수류탄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출처: 구해군사령부호 홈페이지
구해군사령부호 요도(要圖)

1944년 일본해군사령부는

지구전 수행을 위해 함포 사격에도 견딜

토미구스쿠 언덕 지하에 450m 길이의

미로같은 지하방공호를 만들었고

무모한 각오로 버틴다.

출처: 위키미디어
구해군사령부호 사령관실

1945년 6월 4일 미군이

상륙해 일본 진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격렬히 응전하다가 힘이 다하자

6월 13일 사령관 오타 미노루 소장을 비롯

부대원들이 집단으로 자결해 버렸다.

출처: 위키미디어
구해군사령부 벙커에서 해군 장교들이 집단 자살한 수류탄 폭발의 흔적

본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한 명까지’의 저항은

오히려 미군에게 본토 상륙보다는

원폭 투하를 선택하게 만들었고

태평양전쟁은 끝장을 보게 된다.

출처: 구해군사령부호 홈페이지
오키나와 현민의 헌신적인 작전 협력에 대해 오타 미노루 소장이 해군 차관 앞으로 보낸 호소 전보

오키나와 전투 전체 전몰자 수 : 200,656명

일본 측 : 188,136명(오키나와 주민 37,139명 포함)

미국 측 : 12,520명


전쟁의 광기 속에 총알받이로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는

본토와 오키나와 간 반목과 차별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구성 및 제작 / 디지틀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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