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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북한에서 온 동성애 작가, 새로운 사랑의 출발선에 서다

탈북 동성애 작가 장영진 씨는 우여곡절 끝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반려자를 만나 새 출발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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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작가 장영진 씨와 남자친구 한민수 씨

탈북 작가 장영진 씨는 지난 1997년,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아내에게 어떤 사랑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그는 늘 괴로움에 시달렸지만 동성애란 개념조차 없던 북한에선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올해 62살의 장 씨는 이제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번 결혼은 예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BBC에 전했다.

장영진 씨가 남자친구 한민수 씨(가명)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봄, 어느 온라인 성 소수자 만남 사이트에서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꾸준히 연락을 지속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민수 씨는 워싱턴 근교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매일 같이 영상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갔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그와의 대화는 늘 즐거웠고,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아 석 달 정도 만남을 이어갔다.

"저는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도 됨됨이가 나쁘면 절대 만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친구는 알아갈수록 참 됨됨이가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저보다 나이는 8살 어리지만 남을 잘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러던 중 민수 씨가 그를 미국으로 초대했다. 북한에 살 때 '승냥이들의 나라'로 불리던 미국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던 장 씨는 미국행이라는 말에 어딘지 묘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당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국에서의 삶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는 해오던 건물 청소 일을 그만두고 지난해 6월,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를 메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미국 공항에서 처음 실물을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 실망감에 휩싸였다.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대화를 나눠왔던 사람이었지만 직접 만났을 때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공항에 저를 마중 나왔는데 짧은 반바지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더라고요. 옷차림을 보니 뭔가 좀 가볍고 예의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무뚝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민수 씨도 마찬가지였다. 영상 통화를 하면서 얼굴을 다 봤는데도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때를 회상하며 서로 껄껄 웃음 짓지만 당시만 해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두 사람이었다.

60대에 접어든 장 씨는 이제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민수 씨는 "형이 생각했던 느낌이랑 많이 달라서 그냥 일주일 정도 지내다가 돌아가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웃으며 그날을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한 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해진 탓에 민수 씨가 운영하던 식당이 정기적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둘은 가게가 쉬는 날이면 차를 타고 워싱턴 외곽을 함께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골에 있는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풍경 좋은 와이너리에서 와인도 즐겼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두 사람은 서로가 더욱 좋아졌고, 남은 인생을 이 사람에게 걸어도 후회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민수 씨는 장 씨에게 이곳에서 자신과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사람이 참 순수하고 착해요. 사실 형을 만나기 전까지 어떤 사람과 살아야 하는지 혼란이 많았어요. 하지만 형을 만나고 나서 확실히 결심이 섰죠. 그래서 제가 먼저 결혼 얘기를 했어요. 이대로 여기서 나랑 평생 같이 살자고요. 그랬더니 형이 바로 오케이 하더라고요."

사랑 없는 결혼

사실 장 씨는 이번이 첫 번째 결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알지 못한 채, 북한에서 중매를 통해 한 여성과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아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을 했는데 첫날밤부터 아내 몸에 손을 대기 싫었어요. 그냥 모든 게 너무 불편했어요. 제가 어릴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있는데 그 친구의 얼굴만 계속 아른거렸죠. 아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불편한지,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어요."

결혼을 하고 4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가족들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의 형이 찾아와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동안 느껴온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놨다. 여자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형은 남자로서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병원을 가보자고 제안했다.

"몸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북한에서 병원 엄청 다녔어요. 동네 병원에서 다 정상이 나오니까 나중에는 평양 간부들도 찾아온다는, 비뇨기과로 유명한 청진 국가 병원까지 갔어요. 정밀 검사와 치료를 위해 거기 한 달을 입원해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또 정상이라고 나왔죠."

그는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던 아내는 학교 교장인 아버지를 둔, 북한에서는 굉장히 좋은 집안의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자신은 학교 때부터 공부도 잘해서 늘 많은 아이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어쩌다 당신을 만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을 놔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로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당시 제가 36살이고, 아내가 35살이었는데 아직 젊으니까 내가 떠나면 아내도 다른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청진에서 그는 동네 병원과 큰 병원을 다니며 몸에 문제가 없는지 계속 검사를 받아야 했다

장 씨는 아내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냈다. 이번엔 장인어른이 찾아와 왜 이혼을 하려고 하는지 물었다. 그는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털어놓으며 아무래도 자신에게 병적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 씨의 장인어른도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함께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자고 했다. 병원에 가서 또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국가 의료원 같은 상급 병원으로까지 보내졌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성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혼은 더 힘들어졌다.

북한에서는 '합의 이혼'이라는 개념이 없고 반드시 인민재판을 통해서만 이혼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혼이 허용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대 북한법제연구센터 박정원 교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법에는 이혼 사유가 포괄적으로만 명시되어 있다"면서 "배우자가 사랑과 믿음을 배반했을 경우, 혹은 그 밖의 사유로 부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 재판부에서 이혼 결정을 내린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족 간의 문제나 부부간의 개인적 사유로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북한에서 가장 확실한 이혼 사유는 북한 내의 신념이나 체제에 반하거나 출신 성분을 속였을 경우 등에 한정돼 있다. 무엇보다 집단주의를 바탕에 둔 북한 사회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대가정'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이혼은 결코 개인의 문제만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인민재판소에서 왜 이혼을 하려는지 물었어요. 저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를 댔어요. 하지만 재판관은 그건 이혼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저렇게 똑똑하고 좋은 여자를 버리고 도대체 어떤 여자를 찾으려고 하냐며 안 된다고 했어요."

잊을 수 없는 첫사랑

이혼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북한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남자가 떠나버리면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만큼, 이것만이 아내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탈북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일이지만, 아내는 자신의 바람대로 새로운 연상의 남성을 만나 재혼을 했다. 비록 아내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그는 아내를 여전히 인간적으로 멋진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아내는 굉장히 수재였어요. 평양 중앙대학에 갈 수도 있었을 만큼 똑똑했죠. 아담한 키에 예쁘장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북한에서는 과목 중에 수학 선생이 제일 인기가 많은데 자질도 뛰어나서 애들이랑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어요."

그러나 사실 그의 탈북 결심 뒤에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첫사랑, 선철이 때문이었다.

"제가 선철이를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꿈에 선철이가 보이곤 해요."

장 씨는 어린 시절 한 동네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선철이를 유난히 좋아했다. 지금은 그게 사랑의 감정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친한 동무니까 늘 그렇게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한 번은 성인이 되고 나서 선철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적이 있어요. 둘 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을 때였죠. 술이 잔뜩 취했는데 시간이 밤 12시가 넘었길래 위험하니까 그냥 여기서 자고 가라고 붙잡았어요. 북한에는 방마다 난방이 다 잘 되는 게 아니라서 저희 부부가 자는 따뜻한 방에 이불을 하나 더 펴줬죠."

하지만 그날 밤, 장 씨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철이가 옆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선철이가 자고 있는 이불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새벽 무렵, 그는 아내가 곤히 잠든 것을 보고는 몰래 이불에서 빠져나와 선철이의 곁으로 갔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지금도 그때 기분이 생생해요. 제가 선철이 가슴에 손을 살짝 얹었는데 선철이는 코만 엄청 골면서 자고 있었죠. 이게 사랑이라는 생각은 못 했고 뭔가 너무 야속했어요. 그냥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비록 '동성애'라는 개념은 몰랐지만, 자신은 선철이를 이토록 좋아하는데 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장 씨는 모든 것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북한 땅에서 사는 게 더 이상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날 밤의 기억은 그의 탈북 결심을 더욱 굳히게 했다.

"나름대로 좋아하는 마음을 많이 표현했는데 아마도 선철이는 그냥 오랜 친구니까 이렇게 좋아하나 보다 생각했을 거예요. 북한에는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든요. 지하철에서도 빈자리가 없으면 동성끼리 서로 무릎에 앉아서 가기도 해요. 동성끼리 서로 안기고 그래도 그저 진한 우정이나 동지애 같은 걸로 생각하죠."

휴전선을 넘은 그의 험난했던 탈북 여정은 당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결국 그는 첫사랑의 아픔과 사랑 없는 결혼에서 벗어나 휴전선을 넘었다. 처음엔 중국을 통해 탈북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중국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다시 북한으로 숨어들어와 비무장지대를 직접 넘어 한국 땅을 밟았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DMZ를 넘어서 탈북하는 경우는 지금도 매우 드물다.

"어쩌다 보니 제일 어려운 구간을 통해서 왔어요. 제가 지나온 곳이 6.25 전쟁 당시 지뢰를 많이 묻어놓은 곳이었는데 만약 알았으면 그 길로 안 왔을 거예요. DMZ를 넘다가 1만 볼트에 감전도 됐었고, 인민군 잠복 초소도 8곳이나 지났어요."

천신만고 끝에 휴전선을 넘어 한국으로 온 그에게 당시 안기부 조사관은 살아서 나온 게 천운이라는 말까지 했다. 중국으로 넘어갔다 다시 북한에 건너가 DMZ를 넘은 그의 험난한 탈북 여정은 당시 한국의 뉴스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성 정체성을 찾다

사실 불행한 결혼 생활의 '이유'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병원행은 한국에 와서도 계속됐다. 그가 탈북한 97년 당시에는 한국에도 동성애란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처음 한국에 와서 안기부 조사를 받았을 때 그는 너무 개인적인 사연을 털어놓기가 민망해 탈북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은 직업과 좋은 집안의 아내까지 있는 그가 왜 탈북을 했는지 설득되지 않았고, 그는 5개월 넘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결국엔 솔직하게 다 얘기를 했어요. 탈북 이유가 확실하지 않으면 한국 국민이 될 수 없거든요. 그랬더니 조사관이 한국은 북한보다 의학이 더 발달했으니까 여자가 싫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같이 큰 병원을 가보자고 했어요."

그렇게 그는 한국에 있는 웬만한 큰 병원의 비뇨기과를 거의 다 다녀봤다. 하지만 결과는 또 모두 정상이었다. 한 병원에서는 그에게 정신과를 가보라고도 권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운명처럼, 우연히 잡지를 하나 보게 됐다.

"정확히 1998년 5월 호 잡지였어요. 그 잡지에 동성애 관련 기사가 실려있는데, 커밍아웃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미국 영화 속 동성 커플이 침대에서 키스하는 사진이 있었어요. 그걸 딱 보는데 가슴이 너무 두근거리는 거예요. 그걸 보자마자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바로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여자가 싫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잡지를 보고 난 후, 그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드디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서울 종로 등 잡지에 나온 성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들을 스스로 찾아가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성 연인과의 사랑은 생각만큼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2015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붉은 넥타이'를 첫 출간했다

"2004년에 자주 가던 게이바의 사장이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한 남자를 소개해 줬어요. 처음 만나던 날, 승무원 제복에 캐리어까지 끌고 제 앞에 나타났어요. 한두 달 정도 만났는데 해외 스케줄이 있다며 자주 연락이 안 됐죠. 그래도 눈물까지 흘리며 저를 사랑한다고 해서 진짜인 줄 알았어요."

평생의 반려자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친구는 자신의 양아버지에게 둘의 관계를 허락받았다며 셋이 함께 살 큰 집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신도 이제 남들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꿈꾸며 아파트 보증금과 통장에 모아뒀던 돈 전부를 찾아 그에게 건넸다. 모두 합해 9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돈을 건넨 이후 남자는 장 씨의 이삿짐까지 모두 챙겨 종적을 감췄고, 그는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됐다. 경찰서에 보름을 내리 찾아가 하소연을 했지만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찾아봐야 돈을 돌려받진 못할 테니 그냥 포기하라는 얘기만 돌아왔다. 그가 한국 사회에 살면서 가장 큰 배신감과 무기력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새로운 사랑, 새로운 꿈

장 씨와 그의 남자친구는 현재 정식 부부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변호사를 통해 배우자 비자를 준비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결혼 생활이 정리됐다는 증명서가 필요해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지만, 관련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두 사람은 성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다.

"한국에서 혼자 살 때는 항상 두렵고 슬프고 서글펐어요. 하지만 이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니까 그런 부분이 많이 없어졌어요. 제가 많이 예민하고 조용한 성격인데 이 친구는 성격이 낙천적이에요. 저와 반대 성격이라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이지만, 민수 씨는 자신들의 결혼이 남들이 축복해 줄 만한 일반적인 결혼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털어놨다. 물론 한국 사회와 비교했을 때, 미국에서는 동성 간 결혼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의 합법적인 결혼을 돕고 있는 미국 변호사는 특히 한국 사람이 이렇게 동성 결혼을 하는 건 자신이 아는 한 처음이라는 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결혼을 위한 출발선에 있지만 장 씨의 마음 한편에는 늘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탈북한 이후, 사랑하는 가족 6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장 씨의 탈북 소식이 한국 뉴스에 크게 보도되면서 북한에 있던 어머니와 형 부부가 추운 산골로 추방됐다. 세 사람은 돌밖에 없던 척박한 땅에 지어진 소 외양간에서 살다 결핵에 걸려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형은 농장으로 추방돼 일하다 사망했고, 누나는 자신의 탈북 소식에 충격받아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막냇동생은 군 복무를 하던 중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괴로워요. 그래서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는 것만이 내가 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지난 2015년, 그는 한국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붉은 넥타이'를 첫 출간했다. 북한 동성애자의 삶을 담은 그의 책은 출간 당시 큰 주목을 받았고, 미국 등 해외 언론에도 사연이 소개됐다. 그의 드라마 같은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현재 영문 번역 작업을 마치고 서구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책은 시골에 사는 북한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여성 소설로, 이미 퇴고해 출간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저는 북한에서도 살았고, 중국에서도 살았고 한국에서도 살았어요. 하지만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요. 한국에 와서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거든요. 특히, 저 같은 성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힘들게 사는 걸 자주 봤어요. 편견도 많았지만 제가 스스로 정체성을 밝히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았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당당하게 사는 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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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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