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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싫습니다', '못합니다' 박원순 피해자가 말하지 못한 이유

한 공공기관에서 비서 생활을 한 B씨도 기관장님의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업무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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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련 변호사가 13일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출처뉴스1

'지난 4년 동안 뭐 했나', '왜 이제야 신고를 했나'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피해자 A씨에 대해 나온 질문들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관련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종종 이런 질문들이 등장한다. 2018년 3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가 피해 사실을 대중에게 처음 알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BBC 코리아는 김지은 씨의 변호를 맡았던 서혜진 변호사와 전·현직 비서 등을 인터뷰해 그들이 왜 즉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핵심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뚜렷한 수직적 권력 관계 때문이었다.

'기분을 좋게 하는 것'

"비서의 업무 성격은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피해자 A씨를 지원하는 여성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16일 서울시 진상조사 추진에 대해 내놓은 입장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러면서 "비서의 평가와 교체 여부 역시 이를 중심으로 정해졌다"고 말했다.

이는 김 씨가 올 3월 출간한 자신의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쓴 내용과 일치한다. 그는 처음 수행비서직을 인수·인계받을 때, 비서의 중요한 역할은 "지사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라고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김 씨는 책에서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형화된 권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이라며 "그가 누군가를 자를 때는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한마디면 됐다"고 별정직 인사에 있어 도지사의 절대적 권한을 설명했다.

지난 3월 나온 책 '김지은입니다'는 최근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올랐다

출처뉴스1

한 공공기관에서 비서 생활을 한 B씨도 BBC 코리아에 기관장의 허가 여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 속에서 기관장의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업무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관장의 심기가 불편할 경우,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 똑같은 업무가 반복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기관장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면 좋아하는 과일을 깎아 준비하거나, 좋아하는 식당을 점심 때 예약하고, 식사 후 다같이 산책을 하러 가는 등 기분을 풀어 드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기분이 좋아지신 뒤, 모두의 업무가 원활해졌을 때 '일을 잘한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다들 비슷하게 일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중견기업에서 비서로 근무하는 C씨도 임원이 예민하다 느낄 때는 비서팀에서 "오늘 예민하시다. 주의하자"라고 말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사가 예민해 아주 사소한 일에 화를 낼 때도,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죄송하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싫습니다', '못 합니다'라고 할 수 없을까?

한국비서협회는 비서라는 직업을 "경영자 또는 관리자가 그들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비서의 자격, 업무, 권한 등을 명시한 표준화된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보니 비서 업무에서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업무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사적인 요청에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안희정 전 지사 재판 당시, 서울서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가 재판부에 제출한 공소장에서 검찰은 "(김지은 씨가) 안희정 전 지사를 수행할 때 지사의 기분을 절대 거스르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지사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업무 환경이었다"고 적었다.

서울대 도서관에 고 박원순 전 시장 피해자 응원 대자보가 붙었다

출처뉴스1

B씨는 역시 기관장의 지시에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거부로 기관장의 기분이 상했을 때, 그가 자신뿐 아니라 주변 동료나 상사를 불러서 혼내는 등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공적 조직에서 '싫습니다' 혹은 '못 합니다'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그런 건 힘든 축에도 안 꼈다' 등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또 비서의 경우 서비스직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이직할 때 레퍼런스 체크가 중요한데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돌까봐 또 두려워하게 됩니다."

상대는 권력 그 자체

김지은 씨의 변호를 맡았던 서혜진 변호사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 이사)는 안 전 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잇단 성 추문을 지적하며 불과 2년 4개월이라는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들의 공통 핵심은 바로 '권력'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왕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단체장, 광역시장이 각각 성폭력과 성추행의 가해자였던 것이고요. 피해 여성들은 그들의 업무를 정말 지근거리에서 직접적으로 보좌하는 여성 비서였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매우 비슷해요. 그리고 이 피해자들이 모두 업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피해를 보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고요."

김 씨는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안 전 지사를 상대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를 한다는 것, 즉 그에게 "지금 당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안희정 개인만을 향한 외침이 아닌 그의 정치적 지위와 그가 관계 맺은 수많은 이에게 맞서는 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이는 현실로 드러났다. 피해 사실을 알린 이후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김 씨는 2차 피해를 지속해서 당했다. 지난해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된 후 지금도 온라인에는 '꽃뱀설'이 돈다. 그는 아직까지도 '왜 4번이나 거절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는 질책을 받고 있다.

김지은 씨가 피해 사실을 대중에 알린 뒤 약 11개월 만에 안 전 지사의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출처뉴스1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전문가들은 '박원순'이라는 이름 자체가 A씨에게 엄청난 위력이었던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 변호사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미쳤던 영향력은 엄청 나다"면서 "피해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쥔 박원순 시장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 자체도 (A씨에게) 엄청나게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성폭력 피해자 상당수가 이러한 관계 내에서 피해를 겪는다고 지적했다. 서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1년에 100명 넘게 보지만 대부분은 이런 관계에서 피해를 입는다"며 "그런 면에서 (박원순) 사건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박원순'이고 또 그가 사망해서 특별한 사건이 됐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여성가족부가 2018년 기준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지난 3년 동안 '직장에서 한 번이라도 성희롱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한 사람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이 중 성희롱 행위자의 직급은 상급자가 61.1%로 가장 많았다.

매뉴얼도 '시장'에는 적용 안 돼

A씨의 근무처인 서울시의 성폭력 매뉴얼은 '수준급'이었고 나름 '피해자 보호'에 방점을 뒀지만, 문제는 박 전 시장이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의 최종 책임자였다는 점이다.

미투 사건으로 한층 강화돼 발표된 '2018년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서울시 직원이 성폭력 피해를 겪으면 여성권익담당관이나 인권담당관에게 신고를 할 수 있다.

시민인권보호관은 30일 이내에 조사를 마무리해야 하고, 성희롱·성폭력이 인정되면 가해자 의무교육과 피해자 구제절차가 진행된다. '2차 가해'역시 1차 가해에 준해 징계하도록 했고, 익명 제보 제도를 도입하도록 했다.

박 시장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시민운동계 대표 인물로 떠올랐다

출처뉴스1

하지만 성폭력 사건 처리의 최종적인 관리·감독권은 시장에게 있고, 시장이 가해자일 경우에 대비한 조항이 전혀 없었다. 중앙정부 역시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폭력을 감독할 권한이 없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13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가 서울시 내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단순 실수로 받아들이라'며 피해를 사소하게 여겼다"며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시장이 승인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17일 여성가족부 긴급회의에서 민간위원으로 참석한 후 "지자체 조직 안에서 성비위가 발생하면 최종 결재자가 지자체장인 것이 개선돼야 하는 부분"이라며 "관련 매뉴얼을 바꿔야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한 설문조사에선 민간 사업체보다 공공기관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 더 많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공기관 재직자 가운데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람은 16.6%로 민간사업체(6.5%)보다 2.5배 많았다.

또 전체 성희롱 피해자의 81.6%가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는데, 그 이유(복수응답)로 49.7%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31.8%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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