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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강제징용자의 아들은 왜 '일본 할머니'의 삶을 기록했을까

경주에는 일제 시대 조선인과 결혼했던 일본 여성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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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사연이 가득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7월 20일 쏟아지는 비를 뚫고 카메라를 든 남성이 경주의 한 요양원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일본 태풍 소식을 알리는 NHK 뉴스가 흘러나왔다. 벽에는 눈 덮인 후지산 그림이 걸렸고, 장식장에는 기모노를 입은 소녀 인형이 놓여있다.

그 앞에는 한 무리 할머니들이 조용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한일본인 처'. 이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조선인을 만나 결혼해 한반도로 왔지만, 대부분 해방 후 남편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다.

또 한국 전쟁 중 남편을 잃고 혼자 남은 이들도 있다.

사진작가 김종욱(60)은 15년째 이곳 '나자레원'에서 살아남은 재한일본인 아내들의 사진을 찍어왔다.

김종욱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아들이다

출처BBC

강제징용피해자 아버지

그가 이 일본 할머니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 고 김상진 씨(1923~2017)는 15살 때 일본 나가사키 다카시마 탄광으로 강제 징용됐다. 수백 미터 갱도에 들어가 숨도 쉬기 어려운 곳에서 탄을 캐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인을 시켜 자신을 비롯해 같은 조선인을 고문했다.

"그 현장을 보며 아버지는 깨어있어야 하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해요. 광복 후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셨고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는 김종욱 작가가 재한일본인 처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고 오히려 기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역사의 모든 면을 기록해야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무조건 기록해라. 내가 일본 갔던 거나, 위안부 할머니나, 일본 할머니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노. 모두 동시대 있었던 일이다"며 작업을 독려했다.

또, 김 작가는 "아버지는 식민지 역사의 피해자로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며 "역사 청산 역시 이를 토대로 시작된다고 믿으셨다"고 했다.

의문의 죽음

그가 처음 재한 일본인 아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십 대 때로 거슬러 간다.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의성에서 소문 하나가 돌았어요. 처지를 비관한 여성이 동네 기찻길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여자가 '일본인 아내'였다고 혀를 찼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죽음을 선택했을까'라는 의문이 어린 그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이후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한 그는 경주 나자레원 할머니를 만난 뒤 과거의 사건을 회상했다.

그는 재한일본인 처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이 마치 사명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나자레원 측은 일본인 아내들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설립 때부터 계속 '왜 일본 사람을 도와주냐'는 항의를 받았다.

하지만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김종욱 작가의 모습에 특별히 그에게만 나자레원의 문을 열었다.

처음 할머니들은 그에게 거리감을 뒀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있어도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정기적으로 할머니들을 찾아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일 년여를 보내니 언제부터인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사연을 먼저 풀어내는 할머니들이 생겨났다.

"할머니들이 욕을 하다가도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카메라를 끄고 말했지요.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우세요'하고요."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

1940년 당시 일본 공장과 탄광 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소수지만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 유학생들도 있었다.

1959년 일본 외무성 발표에 따르면 종전 직전 일본에 살던 조선인은 200만 명이 정도로 추산된다.

전쟁 중이었던 일본 남성들은 당시 상당수 전쟁에 징집된 상황.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만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본 역시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두 나라 간 결혼을 권장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해방 직후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여성이 5,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에서 일본인 아내로 사는 건 쉽지 않았다.

"할머니들 대부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어요. 맞기도 하고 내쳐지기도 하고 너무 힘들었다고 해요"

광복 후 반일 감정 때문에 이들은 존재를 감추고 살아야 했다.

"제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사셨던 할머니가 계셨어요. 자신이 일본 출신이었다는 걸 감추고 사셨고, 세월이 지났어도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

갈 수 없는 고향

일본인 아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외교 단절 상태였기에 일본으로 가는 정식 배편도 없었고, 어렵게 돌아가더라도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 앞에 설 용기가 없었다.

또 자녀가 있는 경우는 더 어려웠다. 김 작가의 카메라 앞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요네모토 도키에 할머니는 '자식이 당기는 힘이 너무 커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일 양국 모두 '잊힌 얼굴'을 반기지 않았다.

김종욱 작가는 지난 2008년부터 서울과 도쿄에서 전시회를 기획해왔지만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전시회 타진을 했는데 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도 계시는데 왜 일본 할머니들 사진을 전시해'였어요"

마음의 짐

김 작가는 재한일본인 아내 가운데 '가해 국민'이라는 마음의 짐을 지고 죄인처럼 살아온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고 할머니들은 토로했다.

"한국에 와서야 여러 사실을 알고 평생을 죄책감을 가지고 그 감정을 치우려고 노력했던 할머니들이 많았어요"

요네모토 도키에 할머니가 한국 고아 4명을 입양해 기르고, 적십자사에서도 평생 봉사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일러줬다. 무의탁 노인, 군부대나 감옥도 위문을 가기도 했다. 이노우에 아야코 할머니 역시 부모 없는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썼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재한일본인 처'

김종욱 작가가 2004년 처음 나자레원을 방문했을 땐 27명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9명의 할머니만이 생존해 있다.

김종욱 작가가 찍은 사진은 이제 할머니들의 마지막 생전 모습으로 남았다.

그 때문에라도 김 작가는 할머니들의 사진을 남기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전쟁의 피폐함이 자국민이건 타국민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키에 할머니는 저한테 '김 선생, 우리 이야기를 널리 퍼뜨려 주세요'라는 부탁을 하며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전쟁으로 가장 크게 피해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약자들이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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