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뷰 본문

BBC News | 코리아

국가가 공인한 그리고 국가가 체포한 간첩

"이중간첩은 첩보계에서도 굉장히 더러운 말이다. 하지만 강력한 의지와 신념이 없으면 유혹 당할 수 있다"

18,154 읽음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흑금성' 박채서(64)씨는 시멘트 골격이 드러난 촬영 스튜디오에 들어서며 "감옥 같다"고 웃었다.

6년 동안 3.3m²(약 1평) 남짓한 독방에서 생활한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19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비밀 공작원으로 일했던 그는 2010년 북한에 군 기밀정보를 넘긴 혐의로 수감됐다. 그리고 2016년 5월 31일 만기출소한 그는 "지금 알려진 게 전부가 아니다"며 이제 내 입은 자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공작'은 그가 노트 4권에 쓴 수기를 토대로 언론인 김당 씨가 서술한 동일제목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했다. 영화 '공작'은 개봉 12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는 최근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한때는 국가가 공인한 국가 기밀 공작원에 있었고, 국가가 공인한 간첩이었다"며 "비록 간첩 혐의자로 체포돼 법의 잣대에 의해 그렇게 (낙인) 찍혔지만, 국가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비밀리에 활동했고, 더욱이 폐쇄 국가 북한이 주 활동무대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검증하긴 어렵다. 또, 그가 보고한 내용이 국정원 자료로 보관돼 있지만 언제 기밀이 해제될지 미지수다. 일각에서 그가 이중간첩이 아닌지, 김정일을 실제로 만났는지 등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다.

군인 박채서, 공작원 흑금성이 되기까지

대북 공작활동 당시 고려항공 트랩에 오르는 박채서 씨. 박씨는 북한에서의 시간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출처김당 제공

Q.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첩보 활동이 가능했?

당시 한국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극소수였다. 들어가도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대북 첩보 활동 대부분이 재외 교포들을 활용해서 간접적으로 이뤄졌던 이유다.

첩보 활동을 하려면 우선 북한을 자유롭게 들락거려야 되고 들어가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에는 수뇌부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활동의 자유가 생기고 첩보도 수집할 수 있다.

그러면 반대로 나도 한국에서 그와 격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대통령 측근들과 연구소, 재단 등을 만들어서 같이 활동했다. 일종의 나를, 나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다. 이후 장성택 집안하고 연결되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Q. 북한이 시험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을 설명해달라. 어떻게 대응했나?

말 한마디부터 행동하는 것도 항상 주시하고 시험당한다고 봐야 한다. 내가 신분을 숨기고 적한테 포섭되는 것인데, 언제 상대가 나를 인정하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솔직히 답해주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느껴야 한다. 나도 반대로 측정을 한다. 예를 들어, 내 가방 속 책 혹은 방 안의 어떤 물건을 놓을 때 나만이 알게끔 틀어 놓든지 교묘하게 표시해 놓았다.

근데 위치가 달라졌으면 누군가 내 소지품을 뒤졌다고 본다. 근데 어느 순간 그런 것이 차츰차츰 옅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아예 안 한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완전히 신뢰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유일한 스파이?

육군 대위로 복무하던 시절의 박채서

출처김당 제공

Q.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는 더 긴장을 텐데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물론 들어갈 때 여러 가지 교육을 받는다. 손 씻고, 소독하고 준비도 시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절차고 다행스럽게 김정일 위원장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게 해 준 것은 겉으로는 나를 격려해준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나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더 큰 의미는 "나에 대한 검증이 끝났다, 이제 안착을 했다"로 봤다.

김정일 위원장은 같은 말을 되풀이 안 한다.

말할 때 술술 얘기를 하더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놀랐다. 나는 김정일은 상당히 사고의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봤다. 그 당시 남북관계가 좀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Q. 북한 측 인사들과 함께 오랫동안 일하면서 어떤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나? 영화에서는 그렇게 나온다

그런 감정에 빠지면 공작 못 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적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면 안 된다. 그 체제를 이해하고 좋아해도 안 된다.

우리의 적이고 유사시에는 이들과 총 들고 싸우고 서로 죽여야 한다는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공작원 생명이 끝난다. 이해하게 되고 동정심을 갖게 되면 거기에 맞는 첩보보고서를 쓰게 된다.

제일 위험한 것이고 금기사항이다.

'이중간첩은 더러운 말이다'

1997년 5월 평양 김정일 동상 앞에서

출처김당 제공

Q. 일각에서는 이중간첩이라고 한다. 왜 그런 말이 나왔다고 생각하나?

이중간첩은 첩보 세계에서도 굉장히 더러운 말이다.

실제 (북한으로부터) 물질적인 제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북한에서 보위부는 전문 공작 기관이 아니다. 그 당시 가장 센 공작기관은 노동당 조사부였다. 조사부의 베이징 총책임자로 이임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한테 현금 100만 달러를 제시하며, 자신들과 공작을 하자고 한 바 있다. 당시 100만 달러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강력한 의지와 신념이 없으면 유혹당할 수 있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요새 많이 오르내리는 특활비라는 것이 공작자금이다. 공작원이 계획에 의해서 그 돈을 가지고 나간다. 하지만 공항을 떠난 순간 감사도 없고 영수증 처리도 없다. 그 돈을 쓰고 결과만 가지고 오면 된다. 그것만 가지고도 내가 평생 살 수 있는 자금을 축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공작원이 신념으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운명, 신념, 미래

박채서와 당시 보위부 연락책 리철 참사

출처김당 제공

Q.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도와 북풍 공작을 막는데, 당시 어떤 '신념'을 갖고 그랬나?

내가 결론 내린 것은 간단했다.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은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 되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답이 나왔다.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저한테 지시가 날아온 것은 북한 수뇌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대선에 개입하는지 파악해 오라는 것이었다. 또 반대로 북한에서는 남쪽의 성향에 대해서 듣고 싶어 했다.

그런 과정에서 보니까 국정원(당시 안기부)은 어디를 밀었고 청와대는 어디를 밀었고 나왔는데 이게 다 달랐다. 최소한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의 뜻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적어도 국민의 대통령을 뽑는 데 국민이 방해는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고 그 사람이 무슨 말 하는지 직접 들은 적도 없다. 그가 쓴 책도 본 적 없다. 사람을 보고 한 것이 아니고 상황을 판단한 것이다.

광고사업 계약서에 서명하는 아자커뮤니케이션 박기영 대표와 북한의 금강산관광총회사 방종삼 총사장의 뒤에서 지켜보는 박채서

출처김당 제공

Q. 이제 대북사업을 안 한다고 했지만 '만약 이 사람이 부르면, 이런 일이라면 북한에 간다' 생각은 없나?

천만금이 생겨도 이제는 안 한다. 두 차례에 걸쳐, 1998년 그리고 2010년에 처남댁,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친구들까지 다 조사를 당했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너무 고통을 당했다.

이번에 책과 영화를 통해서 관련 사건에 대해서 재조명할 수 있게 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참 고맙다.

국가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후회하진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열심히 했고 나름대로 보람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인생을 내 가족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한다.

글: 김형은, 영상: 최정민

작성자 정보

BBC News | 코리아

    실시간 인기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Please try again in a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