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 지망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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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0일은 아주 ‘유명한’ 인물의 생일입니다. 2차대전, 유대인, 가스실. 누구를 떠올리게 되나요.
네! 히틀러지요. 히틀러가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 제법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나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는 젊은 시절 미술대학에 지원했으나 연거푸 낙방해 화가의 꿈이 좌절됐고 우여곡절 끝에 정치로 방향을 틀게 됐습니다. 때문에 후세의 많은 이들은 그의 어린 시절 꿈이 이루어졌더라면 끔찍한 비극을 막아내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곤 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북부 도시 린츠에서 1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미술 부분에선 재능을 보였고 그 역시 자신에게 예술적 소양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빈으로 가서 미술학교(빈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으나 그는 여러차례 입시에 실패합니다. 그가 입시에 실패했을 그 즈음 같은 학교에 입학했던 이가 바로 에곤 실레입니다. 아마 히틀러가 입학했다면 에곤 실레와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고아였고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히틀러는 엽서, 광고의 그림을 그리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갑니다. 당시 그가 그렸던 수채화나 스케치들 중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시절의 예수> <바다의 야상곡>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경매에 나와 높은 가격으로 낙찰되기도 했지요. 신문 국제면의 뉴스를 보면 종종 그의 작품 경매 소식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빈의 싸구려 하숙집과 복지시설 등지를 전전하며 보냈던 20대 초반의 몇년간이 그를 반유대주의, 극우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는 몇몇 기록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던 그는 미술학교에 낙방한 원인을 심사위원들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심사위원 7명 중 4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미술학교 교장에게 “나를 낙방시킨 유대인들은 보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냈다는 것이지요.
알게마이네 차이퉁 편집자 출신인 플로리안 일리스가 쓴 <1913년 세기의 여름>은 문화예술이 황금처럼 꽃을 피우던 1913년 빈의 모습을 재구성한 책입니다. 월별로 다큐멘터리처럼 흥미롭게 구성돼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 발발 직전이던 이 때 빈에는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인물들 수백명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지요. 이 책에는 당시 스물네살이던, 희망없고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 히틀러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흥미로운 대목을 하나 더 소개하자면 이 시기 빈에 히틀러와 스탈린은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빈의 비밀 은신처에서 레닌의 지시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쓰고 있었으며 히틀러는 실패한 거리의 화가였지요. 두 사람을 아는 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쇤브룬 궁전 공원에 자주 산책하러 나갔다고 하니 수없이 스쳤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운명적인 조약을 체결했을때도 직접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이 때가 두 사람 인생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참고ㅣ<유대인 경제사> 6 홍익희, 한스미디어
<1913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한경희 옮김,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