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듣는 여자는 가만 안둬! '말괄량이 길들이기' 새롭게 보기

조회수 2020. 3. 27. 14: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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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이 글은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영화 <내가 널 좋아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서 아직도 찾는 스테디셀러죠. <햄릿>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직 3월밖에 안 됐는데, 올해 우리나라에서 <햄릿>을 각색한 공연은 벌써 네 개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을 활용한 작품들은 각색 방향이 다양합니다. 원전의 인물 관계나 갈등을 최대한 유지하고, 살리기도 하고, 모티프만 따와 현대적으로 변용하기도 하죠.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인기 있는 희곡 중에서 요즘 시대에 ‘원전 그대로’ 올라가면 안 되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입니다.

출처: 네이버영화
말을 안 듣는 여자는 가만 놔두지 않는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파듀아의 부자, 밥티스타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딸의 성격은 아주 정반대였죠. 둘째 딸 비앙카는 상냥하고, 아름다워서 구혼자가 넘쳐났는데 첫째 딸 카타리나는 성격이 거칠고 난폭해서 구혼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밥티스타는 카타리나가 시집가야만 비앙카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비앙카와 결혼하기 위해서 비앙카의 구혼자들은 카타리나의 결혼을 추진해야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비앙카를 사랑하는 호텐쇼와 그레미오는 호텐쇼의 친구이자, 소문난 망나니인 페트루치오를 돈으로 매수해, 카타리나를 유혹해서 결혼하게 만듭니다. 결혼한 페트루치오는 폭력적인 언행으로 카타리나를 교육시키죠. 한편, 비앙카는 파듀아에 유학왔다 자신에게 반해버린 루센쇼와 결혼하게 됩니다. 루센쇼는 가정교사로 변장해 비앙카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립니다. 결말에서 호텐쇼는 어떤 부자 미망인과 결혼하며, 총 세 쌍의 부부가 생깁니다. 세 신랑은 피로연에서 남편이 불렀을 때 누가 제일 먼저 달려오냐는 것으로 내기를 하는데요. 말괄량이로 모든 이가 기피했던 카타리나가 페트루치오에게 가장 먼저 달려옴으로써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카타리나를 구제불능으로 보고, 갈등을 겪은 후 ‘현모양처’의 모습이 된 것을 통해 ‘여성은 자고로 아름다워야하고, 조신해야하고, 남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극중 남성 인물들이 마냥 긍정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점과,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누군가를 길들이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블랙코메디로 읽어내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든,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카타리나를 다루는 양상은 폭력적이고, 소모적입니다. 카타리나는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세고, 남자한테 대든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창피함, 폭력적인 언행들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말미에서 인형처럼 현모양처의 덕목을 줄줄이 읊는 변화는 지금의 성평등에 대한 가치관으로는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발레나 오페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다시 올라간다고 할 때, 종종 관객의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어떻게 카트리나와 페트루치아의 관계를 각색했느냐가 관건인 것이지요.

카타리나 - 내가 궁지에 빠질수록 그인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아니, 그인 날 굶겨 죽이기 위해서 나와 결혼했을까? 친정집에선 문간에 나타난 거지들도 애걸하면 뭘 얻어 가요. 못 얻어 가더라도 다른 곳에 가면 자비를 얻죠. 헌데 한 번도 애걸이라곤 해보지 않은 내가, 아니 애걸할 필요조차 느껴보지 못한 내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게다가 한잠도 자지 못하려 머리는 빙빙 도는데, 그인 줄곧 소리만 질러서 눈도 붙이지 못하게 해요. 무엇보다도 가장 싫은 것은 그이 태도예요. 그게 모두 애정 때문이라나. 글쎄 내가 먹거나 자는 날엔 죽을 병에 걸리든가 당장에 목숨을 잃고 말 것 같은 말투란 말이에요. 제발 먹을 것 좀 갖다줘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독만 들어 있지 않다면.

시작은 불순했으나 끝은 진심 가득하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출처: 네이버영화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구시대적이어서, 쉽사리 현대극으로 잘 번안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로맨틱 코메디 현대극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각색한 작품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히스레져가 페트루치오를 연기했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입니다.

비앙카와 카트리나의 관계는 비슷합니다. 비앙카(라리사 오레이닉)는 예쁘고, 상냥하고, 학교에서 인기도 많지만 카트리나(줄리아 스타일스)는 괴팍하고, 인디밴드에 열광하며, 강성 페미니스트입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는 자매에게 연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두 자매가 상처받을까봐 겁이 나는 것이죠. 하지만 비앙카는 연애도 해보고 싶고, 무도회도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런 비앙카에게 아버지는 카트리나가 한다면 비앙카도 다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한편, 전학생 카메론은 비앙카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산 오리를 먹었다든지, 감옥에 갔다 왔다든지 하는 루머가 많은 망나니 페트릭(히스레져)에게 카트리나를 꼬시라고 매수합니다. 재미로 시작한 페트릭은, 이내 카트리나가 사실은 ‘괴팍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요.

출처: 네이버영화

전반적인 설정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비슷합니다. 다른 부분 또한 많은데요, 제일 기본적으로는 이야기가 서술된 주된 시점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비앙카의 구혼자 로센쇼, 카트리나와 결혼한 페트루치아의 시점에서 벌어진 일들을 서술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말괄량이’인 카트리나의 이야기가 적습니다.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카트리나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래서 카트리나가 ‘괴팍한’ 평판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 동생에게 바랐던 점, 그리고 카트리나의 개인적인 욕망까지 나오면서 카트리나의 서사를 보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카타리나의 서사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카타리나와 비앙카, 두 자매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영화가 됩니다. 로맨스 코메디이기도 하지만 카타리나와 비앙카의 성장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카타리나는, 아버지 밥티스타도 질려하는 말썽꾸러기였는데,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카타리나는 비앙카와 동등하게 소중한 딸이자,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한 명의 주체적인 사람입니다.

말괄량이를 ‘길들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페트루치오가 카트리나를 바꾸는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카트리나가 자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괴롭히지요. 방식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페트루치오가 카트리나를 바꾸려는 이유 또한 상당히 가부장적입니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고 남자 말에 토를 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영화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카타리나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카타리나를 종속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관심 가지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페트릭은 카타리나가 좋아하는 것, 취미, 싫어하는 것들을 알아가며 카타리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카타리나를 애써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가 언제나 빛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퇴색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가치관이 되기도 합니다. 고전 작품을 지금에서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전히 유효한 가치관을 발견하고, 보전하면서도, 이미 오래전에 빛을 바래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들은 지금의 가치관에 맞게 다시 수정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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