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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에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 해외에서 주목받는 까닭은?

조회수 2019. 10. 15.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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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명문 사립대학 법학과를 나왔다. 동기, 선후배들이 다 도전하는 사법시험은 왠지 보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 빠져 살았다. 어릴 때부터 취미삼아 찍어오던 사진이었다. 취미를 업으로 삼을 용기는 없었다. 생계를 꾸려나가려면 직업이 필요했다.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다. 정착하지는 못했다.


판에 박힌 일상, 일사불란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직장 생활이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3년 정도 다니다 사표를 쓰고 나왔다. 이후 사업체도 운영해봤고 해외금융 분야에도 발을 담궈봤지만 제대로 안 됐다. 고배를 마셨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로 변신했다. 영어만큼은 자신있었다. 돈도 제법 벌었다. 눈코뜰새 없이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회의감이 밀려왔다. 학원가에 뛰어든 지 7년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야 하나. 내가 꿈꿔온 삶이 이런 것이었나.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밤낮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건가.

답을 찾고 싶었다. 고민의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뭐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사회 생활을 하면서 목격하고 겪은 수많은 부조리를 향한 분노가 쉬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무작정 펜을 잡았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금씩 적어나갔다.


글만 적다보니 좀 싱거웠다. 사진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았다. 취미 활동으로 해온 카메라를 다시 잡았다. 주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글보다 사진이 점점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참에 아예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로 접어드는 건 어떨까.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전업작가 허은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프로작가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다. 막상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고 나니 그간 우호적이던 사진 전문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사진 전공도 하지 않은 아마추어가 하면 얼마나 하겠어? 취미로 좀 하다 말겠지.'


변변한 경력도, 체계적인 사진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를 향한 전문가들의 선입견이었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세상을 향한 분노, 사진을 향한 열정을 쏟아붓듯 작품 속에 담았다. 작품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갈고 닦은 솜씨가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출신 구분 없이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해외 콘테스트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체계적인 교육 한번 받지 않았지만 오직 사진을 향한 열정과 노력으로 전업작가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3년째 되던 해, 비로소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IPA(International Photography Awards) 세계사진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2년 연속 프로페셔널작가 부문 각 6관왕, 3관왕을 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시상식에 초청받았다. 유럽을 대표하는 PX3 파리국제사진상(Prix De La Photographie Paris)을 비롯해 ND 어워즈, Monochrome Photography 어워즈, Monovisions Awards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주요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런던의 사치 미술관에서 스크린으로 전시되고 있다. 2019년 베를린아트북 '주목할 추상작가'로 선정됐고 홍콩 아시아컨템퍼러리는 허 작가를 '한국의 이머징 아티스트'로 선정해 소개했다.


해외에서 들려오는 잇단 수상 소식에 국내 갤러리들도 서서히 '사진작가 허은만'을 주목하고 있다.

허은만 작가의 작품은 '추상주의'를 표방한다. 화가가 손으로 그리는 회화와 달리 실재하는 피사체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 사진 작품 속에서 추상주의를 추구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사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추상성을 구현하겠다는 건지 물었다.

실재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존재는 다 본인의 경험과 기억이 맞물려 창조해내는 상상의 표현일 뿐 누구에게나 동일한 '절대 진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다면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잘 찍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지요. 사진 작품 속에서도 회화처럼 존재를 해체하고 작가의 주관적 개념을 녹이는 '추상주의' 작업을 시도한 배경입니다.

이를 위해 허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개발해냈다. 카메라를 붓과 나이프처럼 손에 쥐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다양한 속도와 형태로 흔들며 저속셔터로 천천히 '차~알~칵' 찍는 방식이다.


그는 이를 '제스처럴리즘'이라고 불렀다. 이같은 카메라의 '부지런한' 제스처를 통해 피사체는 알 듯 모를 듯한 형태로 해체되고, 때로는 작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대 이상의 작품이 탄생한다.

"국내외를 통틀어 사진작품 속에서 이같은 시도는 처음입니다. 몇몇 작가들이 흉내내고 있지만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이 기술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요. 또 다른 작가들의 모방을 꼭 나쁘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저의 방식을 따라해 훗날 사진 작품의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킨 작가로 세계 미술사에 기억된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겠지요"


늦은 나이에 꿈을 쫓아 과감히 프로의 세계로 뛰어든 사진작가 허은만, 사진을 향한 열정과 새로운 창작 욕구를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켜나갈 것인지 앞으로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갤러리바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에서 다양한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허은만 초대전 The Abstractionist
갤러리바움(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3-8, 2층)
2019.10.02 ~ 2020.10.22 오전 11시 ~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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