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세상에서 가장 섬뜩하고도 로맨틱한 고백

조회수 2020. 7. 23. 08: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요즘은 이런 게 좋은 제목인가. 한 명은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두 명은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게? 아니면 내용과는 정반대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게?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오싹한 기분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꽤 좋은 제목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작품의 제목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주인공 ‘나’는 병원에서 우연히 같은 반 여학생 ‘사쿠라’가 놓고 간 ‘공병문고’를 줍는다. 거기에는 사쿠라가 췌장이 안 좋아 죽게 된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공병문고를 찾으러 다시 병원에 온 사쿠라는 자신의 병을 알게 되었음에도 별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이는 ‘나’가 신기하기만 하다. 그녀와는 ‘정반대’인 그에게 사쿠라는 그 순간 이미 반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때부터 사쿠라는 ‘나’를 따라다니며 자신이 죽기 전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함께 지워나갈 것을 강요한다. 디저트 카페 가기, 스티커 사진 찍기, 여행 가기 등 사쿠라와 ‘나’는 연인처럼 많은 일들을 함께 하며 소중한 추억을 쌓는다. 혼자 책 읽는 것만 좋아하고 타인과 소통하기를 꺼려하던 ‘나’는 사랑을 주고받는데 익숙한 사쿠라를 통해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딛는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영화가 시작한지 3분 30초 만에 사쿠라가 ‘나’에게 외치는 대사다. 옛날 사람들은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아프면 위를 먹었대.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라면서. 이 장면에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그저 조금 섬뜩한 농담일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대사는 더 많은 의미를 얻게 된다. 


사쿠라는 첫 버킷리스트 실행을 위해 ‘나’를 고기 뷔페에 데려간다. 열심히 내장을 구우면서 그녀는 무심히 이렇게 말한다. “내 췌장은 네가 먹어도 돼.” 외국에는 다른 사람의 몸을 먹어주면 그 사람 속에서 영혼이 살 수 있다는 신앙이 있대. 라고 부연하면서. 그렇다면 나의 췌장을 먹어도 좋다는 건 너의 몸속에 계속 살아있고 싶다는 의미인데,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한 말이라면 이 얼마나 애달픈 고백인가.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읽는데 서툰 ‘나’는 단칼에 거절하고 만다. 사쿠라의 영혼은 너무 시끄러울 것 같다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만 하는 ‘나’란 아이에게, 연애 세포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쿠라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에게도 기쁨, 슬픔, 아픔 등의 감정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여전히 방법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나’는 병원에 입원한 사쿠라에게 “사실은 너를 많이 걱정하고 있어” 라고 할 정도로 발전한다. 더 나아가 ‘나’는 자기와 정반대인 사쿠라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닮아가고 그녀처럼 되고 싶어 한다. 


십대의 로맨스 뿐 아니라 성장담으로서 이 작품의 의미와 매력은 여기에 있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다시 등장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나’가 병원에서 퇴원한 사쿠라에게 보낸 메시지다. 불행히도, 사쿠라는 세상에서 가장 섬뜩하고도 로맨틱한 이 고백을 영영 읽지 못한다. 

잘 만든 고전 할리우드 로맨틱 멜로드라마들에 비하면 십대의 취향을 저격한 이 작품은 기획성이 강하고 다소 가벼운 느낌이다. 그러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독특하며, 가장 잊어버리기 어려운 사랑 고백 중 하나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를 아는 사람에게라면 언젠가 써먹어 볼 수 있을까. 


나에게 없는 장점들을 갖고 있는 네가 되고 싶어서, 

너의 육신은 땅에 묻히더라도 너의 영혼은 늘 내 몸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함께 하기를 바라므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