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한국에 데뷔시킨 영화?

조회수 2020. 6. 18.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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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1997)

‘정말로 벨벳언더그라운드가 이 영화 때문에 한국에 데뷔했다고?’라고 생각하셨다면 죄송하다. 좀 부풀려 봤다. 


그렇다고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다. ‘한국에 데뷔'시켰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지만 일부 음악 팬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를 대중에 확실하게 알리는 데에 이 영화가 큰 몫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 곡 덕에 서정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완성된 것도 명백하니 그야말로 상부상조.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신다면 일단 이 곡을 듣고 화 좀 달래시길.

64년 결성되어 73년 해체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1993년 재결합 공연 영상.

이 곡을 쓴 루리드는 초창기 멤버였지만 70년 탈퇴했고

90년대 몇 차례 일시적 재결합이 있었다.

루리드를 비롯해 니코, 스털링 모리슨은 2020년 현재 모두 사망했다.


PC통신으로 익명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무척 생소한 개념이었던 1997년 개봉작, 영화 <접속>은 ‘새로운 방식의 소통’에 대한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영화다. 그 화제성에 눌려 영화 속 음악 이야기는 충분히 얘기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밀레니엄을 앞둔 시대, 전문직 종사자들의 ‘힙'한 소통 방식을 보여준, 시류를 잘 반영한 영화이며 사랑에 상처 입고 절절매는 청춘 로맨스 영화이자 전도연이라는 훌륭한 배우가 기지개를 켰다는 영화사적 의미도 있다. 하지만 훌륭한 배우들과 소재에 비해 거의 사랑과 전쟁 수준의 스토리 라인과 듬성듬성 편한 대로 버무린 캐릭터의 감정선은 아쉬움이 남는데 이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준 것이 바로 음악이다.


도입부 선율은 바흐가 자신의 두번째 아내에게 선물한 작품집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에 실린 미뉴엣 G장조를 편곡한 것.

사라 본 이전, 이후에 숱한 음악가들에게 불리운 노래.

미국, 영국 등에서 차트 상위권에 올랐으며

스페인, 독일, 일본, 핀란드, 이탈리아 등 다양한 버전이 있다.


얼굴도 모른 채 채팅으로만 서로의 사랑을 응원하던 두 주인공이 마침내 만날 때 흐른 러브 테마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 살짝 나와 아쉽지만 밤거리의 고독함을 배가시켜준 톰웨이츠의 'Yesterday Is Here', 품격있는 서정의 목소리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Look Of Love', 조금씩 가까워지며 활기가 도는 마음을 노래하는 듯한 트록스의 'With A Girl Like You' 등 줄줄이 이어지는 명곡은 스토리상의 부족함을 지적하려던 우리의 뇌를 마비시키고 쓴소리를 준비했던 입을 막아버린다. 


말하자면, 아니 뭐야 스토리 왜 이래 하며 분노 게이지가 상승할 때 즈음 마음을 탁 녹이는 명곡이 등장하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Pale Blue Eyes'는 단조로우면서도 세련되고,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로 영화 전반에서 흐르며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에 가교 역할을 한다. 


팝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의 후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사실 실험적이고 퇴폐적인 가사가 주를 이뤘는데 루리드(벨벳언더그라운드의 리더)가 첫사랑을 생각하며 쓴, 비교적 서정적인 내용의 이 곡은 영화 속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져 국내 음악 팬들에게 우울한 사랑의 송가로 자리매김한다. 10여 년 후 인기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닿을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대변하는 곡으로 쓰여 다시 한 번 큰 사랑을 받았다.

단순히 ‘이 영화는 좋은 음악이 가득한 영화예요.’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접속'은 한국 영화의 OST 시장에 새로운 문을 연 영화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 음악은 클래식, 국악 혹은 가요를 삽입하거나 영화에 맞는 음악을 새로 작곡해 삽입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고, 이미 발매된 외국곡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사용한 영화는 없었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창작곡이 거의 없이 단지 ‘좋은 선곡’만으로 훌륭한 OST를 완성한 것은 무척 참신한 시도였다. 동시에 외국곡에 대한 저작권 사용 승인을 받은 최초의 한국 영화이기도 하다. 사용 승인을 받기 위해 장장 9개월을 기다렸다고 하니 제작 단계부터 음악에 공을 많이 들인 셈이다. 그 공은 관객들의 호응으로 보상받았다.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OST의 인기도 치솟아 당시 거리 곳곳, 라디오 채널, 음반 가게 등 여기저기서 접속 삽입곡들이 울려퍼졌으며 8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국내 영화에서 다양한 팝 음악을 듣게 되었으니 인기뿐 아니라 영화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성과를 이룬 것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영화를 보다 보면 음악 외에도 재미있는 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단, 배우들의 젊은 목소리다. 특히나 전도연의 앳된 목소리를 들으면 저렇게 어렸던 신인 배우가 이제는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존재가 되었구나 하며 세월의 간격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모닥불 타는 소리에 버금가는 최고의 ASMR, 바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다. 이제는 PC보다는 노트북이 흔하고 키보드 종류도 다양하지만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오래된 키보드 소리는 서걱이는 연필 소리가 향수를 자극하듯 그 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우리는 또 무슨 새로운 기계를 만지며 ‘아 우리 때는 터치폰 카톡 보내는 소리에 정을 느끼곤 했지'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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