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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

조회수 2020. 5. 29. 07: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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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 시리즈

뉴욕의 꼴통 형사 존 맥클레인이 나오는 ⟨다이 하드⟩ 시리즈를 보면, 내가 삶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 인생, 어쩌면 좋지?’가 아니라 순식간에 ‘아이구, 저 아저씨 이번에도 망했네? 어쩌면 좋지?’가 된다. 


이 아저씨 인생도 참 기구하다. 별거중인 아내를 만나러 갔더니 테러범이 인질극을 벌리고(⟨다이하드 1⟩), 공항에 아내 마중 나갔더니 용병들이 공항을 접수한다(⟨다이하드 2⟩).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MBC에 입사했다. 드라마 PD로 일하지만, 영상문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일을 하다 주눅이 들 때가 많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다이 하드⟩를 본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게 내게는 공부다. 극장에서 처음 보는 영화의 경우, 줄거리 전개를 쫓아가느라 딴 생각 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이미 본 영화라면, 결말을 알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감독의 연출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왓챠플레이⟩는 내게 온라인 영화 아카데미다.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며, 영상문법을 공부한다. ⟨다이 하드⟩ 시리즈 중 음악이 좋아서 반복시청하는 장면도 있다.


⟨다이 하드⟩ 1탄에서 한스 그루버 일당이 금고의 최종 잠금장치를 해제했을 때 베토벤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진다. (1:43:25~1:44:25) 극장에서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나도 환희에 들뜨는 기분이었다. “인생 대박이 터졌다! 저 돈을 들고, 튀면 되는구나!” 그런데 좀 이상했다. 악당이 승리하는 장면인데 왜 이리 신나는 거지?

⟨다이 하드⟩ 3탄의 악당은 1탄에 나온 한스 그루버의 형인 사이먼 피터 그루버 (제레미 아이언스 분)다. 뉴욕의 백화점과 지하철에서 연이어 폭발물을 터뜨린 테러리스트 피터 그루버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바로 뉴욕 연방 준비 은행을 터는 씬이다. 이때 흐르는 배경음악은 남북전쟁 때 만들어진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 연인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노래인데, 군악대의 합주곡으로 자주 쓰인다. 폭탄을 찾아 뉴욕을 헤매는 브루스 윌리스의 모습과 함께 뉴욕준비은행의 금고를 터는 장면이 교차된다. (52:30~58:50) 신나는 행진곡이 깔리는데, 은행 터는 스케일이 장난 아니다. 볼 때마다 그 정교한 화면 연출에 입이 떡 벌어진다.


같은 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다 궁금해졌다. ‘존 맥티어난 감독은 왜 매번 악당들의 승리를 돋보이는데 이렇게 웅장한 음악을 썼을까?’ 관객의 정서적인 반발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깨달았다. 이건 고도로 계산된 연출이다.

⟨다이 하드⟩ 시리즈의 주인공은 존 맥클레인인데, 인생이 이보다 더 고될 수 없다. 1탄에서 처음 등장하는 모습은 고소공포증으로 하얗게 질린 비행기 승객이다. 남편은 박봉의 말단 형사인데, 아내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중역이다. 아이들을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존재감 없는 아빠다. 죽을 고생을 하며 테러범과 싸우다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장난하지 말라고 혼만 난다. 나중에 깨달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초라해 보이고, 악당이 강력해질수록, 긴장은 올라간다. 주인공의 시련이 커질수록, 마지막의 승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고난을 만났을 때는, 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들 기회를 만났다고 반겨야겠구나!’


살다가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는 ⟨왓챠플레이⟩를 켜고 ⟨다이 하드⟩에서 환희의 송가를 튼다. 내 삶의 시련이 클수록, 끝내 딛고 이겨내리라. 오라, 악당들이여. 오라, 시련이여. 너희들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줄 조연에 불과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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