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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담담한 응원

신희극지왕(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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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청춘을 기억하며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는 거장의 담담한 응원


국내에 아주 짧게 개봉한 뒤 바로 IPTV 시장으로 넘어간 〈신희극지왕〉(2019)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주성치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웃길 때 세게 웃기고 울릴 때 제대로 울리는 주성치 특유의 코미디 코드로 가득했던 〈희극지왕〉(1999)과 비교하면, 〈신희극지왕〉은 확실히 어딘가 밋밋하긴 하다. 


〈신희극지왕〉에는 원작에서 연극 〈정무문〉을 연습하며 주성치와 임자선, 전계문이 서로를 번갈아 가며 때리는 정신 나간 코미디도 없고, 장백지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 책을 품에 안고 택시 안에서 오열하는 장면 같은 절절한 로맨스도 없다. 


〈신희극지왕〉은 그저 10년차 단역배우 여몽(악정문)이 이 악물고 온갖 부조리한 상황들과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희극지왕〉이 선사했던 현란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기대하고 〈신희극지왕〉을 본 관객들이라면, 주성치가 감독 자리에 익숙해진 이후 코미디의 감을 잃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성치가 지독한 무명시절을 견디고 정상에 올라선 뒤, 자신이 거쳐왔던 언더독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커리어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을 곱씹어보면 〈신희극지왕〉의 담담함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주성치 작품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지닌 것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무일푼으로 기회를 찾아서 홍콩으로 온 촌뜨기였고(〈신 정무문〉, 〈도성〉), 먹고 살 재주가 없어서 사기꾼이나 도적으로 전락한 인물들이었으며(〈서유기 월광보합〉, 〈식신〉, 〈쿵푸허슬〉), 가진 재주가 있어도 좀처럼 그걸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떠도는 외톨이들이었다(〈희극지왕〉, 〈소림축구〉). 


그러나 지금의 주성치는 명실공히 홍콩 영화계의 가장 큰 별이다. 배우로도, 제작자로도, 감독으로도 모두 성공해 홍콩을 넘어 중화권 전체에서 손꼽히는 영화인이 된 지금의 그와, 과거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처절하게 망가지던 젊은 시절의 그가 같을 수는 없다. 


아직까지 젊은 시절의 쓰라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던 시절엔 그 시절의 처절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거침없이 망가뜨릴 수 있었겠지만, 이미 안정적인 위치에 올라선 그가 언더독을 응원하겠다고 그들을 대책없이 마냥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이미 가진 자가 아직 가지지 못한 이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랴?

그래서 〈신희극지왕〉은 〈희극지왕〉의 가장 단단한 알맹이만을 뽑아와 그것만 오롯하게 살려낸다. 도저히 내일이 보이지 않는 끔찍한 무명시절을 오로지 희망 하나로 견디면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바다를 향해 “노력! 분투!”라고 외치던 가난한 단역배우의 마음 말이다. 


〈신희극지왕〉에는 〈희극지왕〉에서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문제의 콧물 장면 같은 분비물 코미디도 거의 없고, 손에 잡은 기회를 사랑을 위해 포기하는 〈희극지왕〉의 멜로 라인도 없다. 대신 〈신희극지왕〉에는 딸에게 맨날 그 놈의 가망 없는 배우질 때려치우라고 모진 소리를 하면서도, 딸이 안 보는 곳에서는 딸을 함부로 대하는 영화 촬영장 스태프에게 화를 내며 사람을 정중히 대하라고 목청을 높이는 아버지가 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사기꾼 남자친구가 남긴 상처를 연기의 소재로 삼아 오디션을 통과하는 웃픈 현실이 있다. 


〈신희극지왕〉은 한때 언더독이었으나 더 이상 언더독일 수 없는 거장이, 제 장난기를 누르고 옷깃을 여미며 오늘날의 언더독들에게 예를 갖춰 보내는 인사가 아니었을까? 세상 그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라는 인사.

물론 〈신희극지왕〉이 〈희극지왕〉만큼 걸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성치 코미디의 강점은 세상 못난 이들에게 표하는 무례에 가까운 동지의식과 정신을 쏙 빼놓는 번잡함에 있는데, 그걸 다 제하고 담백한 알맹이만 남긴 〈신희극지왕〉은 아무래도 심심할 수밖에 없다. 


굳이 따지자면 거장이 남긴 범작이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하지만 난 어쩐지 〈신희극지왕〉에서 주성치가 보여준 성숙한 태도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이제 예순을 목전에 둔 거장이, 제 청춘을 기억하며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는 담담한 응원을 말이다.


인물소개
  • by. 이승한 칼럼니스트
    열두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영화감독이 되길 희망했던 실패한 감독지망생입니다. 스물넷부터 서른여섯까지는 TV와 영화를 빌미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고 있죠. 자기 영화를 왓챠에 걸었으면 좋았으련만, 남의 영화를 본 소감을 왓챠 브런치에 걸게 된 뒤틀린 인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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