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과 인권은 공존 가능한가

조회수 2020. 4. 17. 11: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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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브릿지 (2015)

민족주의. 민족주의. 민족주의. 한반도에서 벌어진 100년간의 역사는 언제나 ‘민족’이라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심지어 북한의 공산주의 운동까지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라는 전제 조건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여성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유럽은 물론이고 같은 시기 일본에서조차 여성운동은 ‘참정권 운동’, 즉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주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여성’이라는 또 다른 주체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달랐다. 언제 한반도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까. 통상 1908년 ‘국채보상운동’을 꼽는다. 나라 빚을 갚자는 운동에 호응하여 부녀자들이 가락지며 비녀는 물론이고 자식 돌반지에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폐물까지 기부하였던 것이다. 


여성들이 노력하여 무너져가는 조선왕조를 구원하자는 발상. 여성이 역사에 등장하긴 했지만 여기서 여성은 민족을 위해 행동하는 여성.


일제 시대에 들어가서도 이런 행태는 반복된다. 〈근우회(1927)〉 창립. 한국 근대 여성 운동사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단체는 비로소 여성의 권리, 남녀 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하지만 근우회 역시 민족운동단체였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신간회〉의 자매단체였고 단체를 이끌던 여성들의 상당수는 대부분 독립운동을 후원하거나 민족을 위해 여성 인재를 기르는 교육자들이었다.

따져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들이 모두 이렇다. 유관순은 3.1운동 당시에 옥고를 치르며 순국한 애국여성이고, 영화 〈암살〉 덕분에 재조명된 남자현 역시 국내와 만주를 오가며 의열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2.8독립선언서를 주도했고 3.1운동 당시 경부선과 경의선을 타고 다니며 항일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김마리아 역시 우국지사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사 교육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분명히 민족과 여성의 해방을 동등한 가치를 두고 싸웠을텐데 이 땅의 교육 방식이 모조리 민족주의를 기준으로 가르쳐지니 말이다.


미국은 신대륙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중세 기독교 체제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그리스-로마와 야만족 문명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왔다면 미국은 그러한 전통의 기반 없이 영국을 몰아내고, 동시에 인디언도 몰아내면서 그들만의 민주공화국을 만들었다.


신이 선택한 나라, 신 앞에 평등한 나라. 그런데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에 노예가 있었고 건국의 아버지 제퍼슨이 예언을 했듯 그것은 저주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노예 해방, 흑인 민권 운동이라는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 


단일 민족은 아닌 관계로 민족주의가 부상할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답게 애국심이 장려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되 국가 전체의 번영을 강조하는 국가주의 또한 미국의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다. 인권과 국가이익이 공존하는 나라의 탄생.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이 후 미국은 세계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2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는 종래의 힘을 영원히 잃어버렸고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거듭 강성해진 공산주의 제국 소련과의 경쟁이 본격화된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두 명의 인질이 억류되어 있다. 한 명은 국가 기밀을 잔뜩 보유한 군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냥 위험한 곳에 갇혀 있는 개인. 한 명 밖에 구할 수 없다면 국가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그런 식으로 국가 이익을 기준으로 사람을 선별하는 행위는 옳은가 그른가. 아니, 둘 다 구하는 것이 올바른 거 아닌가?


흔히들 다원화라는 말을 많이 쓴다. 사실 별 의미 없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시장과 소비문화가 발전하다보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다원화가 된다. 


중요한 사실은 집단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가 충돌을 일으킨다고 판단할 때 그 사회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한 번에 두 가지 가치 체계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훨씬 본질적이란 말이다. 


감동적인 영화 〈스파이 브릿지〉가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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