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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공통전염병의 시대

조회수 2020. 3. 26. 16: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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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2013)

팬데믹이 공식적으로 선언됐다. 알 수 없는 경로로 동물에게서 인간에게 바이러스가 넘어와 신종 질병이 되고, 국가 간 확산을 통해 세계적 대유행이 되는 시대. 재난적 상황이 일상화되는 인류세(人類世)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올해 들어서 인류세의 알람은 계속 울리고 있다. 1월, 호주는 기후 위기로 화염에 휩싸이며 남한보다 넓은 면적이 불에 타고 동물 10억 마리가 죽었다. 인도네시아는 기록적인 폭우로 대홍수 피해를 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방해금지모드’를 설정한 듯 지구적 재난 현장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까.


2월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코로나 집단 감염이 한국을 강타했다. 감기와 인류를 감염시키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사계절을 가진 북반구의 겨울 시즌을 공략한다. 중국,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처럼 북위 30~50도에 위치한 나라들이 연속해서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영화 ‘감기’는 코로나 사태를 예견했을까. 영화의 만듦새 탓인지 2013년 개봉 당시에는 혹평을 면치 못했지만 40만 명이 살아가는 평범한 도시 분당에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한국적 설정과 감염자가 집단 학살 당하듯 대규모로 죽어 나가는 모습을 시각화한 충격적 비주얼로 관객 311만 명을 불러모으며 흥행은 제법 선방했다. 


무엇보다 2015년 메르스가 확산하며 전염병의 무서움을 체감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2020년 코로나가 대유행하는 지금 시점에 보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치 차트 역주행하듯 계속 회자되는 이런 영화, 흔치 않다. 


‘감기’는 전염병의 최초 발병 원인을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경로로 감염된 동남아 사람이 홍콩을 통해 한국에 밀입국하다가 바이러스를 퍼트린 것으로 묘사한다. 


반면 2011년 개봉했던 할리우드 영화 ‘컨테이젼’은 사건의 전말을 친절히 알려준다. 홍콩에서 다국적 회사의 차량이 바나나 나무를 베자, 서식지를 잃은 박쥐가 돼지 농장으로 날아든다. 돼지가 박쥐 배설물을 먹고, 그 돼지를 도살한 정육주가 안 씻은 손으로 다국적 회사 직원(기네스 펠트로 역)과 악수를 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동물에게서 사람에게 전파된 바이러스 감염병, 이른바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퍼지는데, 그만큼 예상 불가능하고 치명적이다. 메르스, 사스, 신종플루, 에볼라, 에이즈, 페스트, 광견병, 광우병, AI, 코로나19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신종 전염병 중 약 75%가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실제 사스도 중국관박쥐와 사향고양이라는 숙주를 통해 인간에게 전이된 것으로 밝혀졌다. 코로나 19의 경우 박쥐가 최초 숙주, 천산갑과 밍크 등이 중간 숙주로 의심받고 있으나 정확한 감염 경로를 확인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구 역사에 인간과 야생 동물의 직접적인 접촉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인구 급증과 도시 개발은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 기회를 늘며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가능성을 높혔다. 인류세의 기점으로 꼽히는 1950년대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다. 불과 70년이 지난 지금 3배가 넘는 77억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우리는 그만큼 인간의 영토를 넓혔고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파괴됐다. 


게다가 교통의 발달로 화물, 여행객을 가리지 않고 국가 간 이동이 활발하니 전염병이 발생하면 대륙 너머로 안 번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해외 직구를 하면 며칠 후 호주에서 내 집 앞으로 건강보조식품이 오듯, 중국에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19는 77억 모두의 집 앞으로 금세 갈 수 있다. 영화 속 상상은 현실이 됐고, WHO는 1968년 홍콩독감,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2020년 역사상 세 번째 팬데믹을 선언했다. 선언 주기가 짧아지는 것만큼 또 다른 인수공통전염병의 출현도 두려울 따름이다. 

영화 ‘감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분당의 스타디움에 수만 명의 사람이 살처분돼 쌓여있는 씬이다. 실제 대한민국에서 살처분은 거의 매년 거르지 않고 반복됐다. 구제역으로 소, 돼지 수백만 마리가 희생을 치렀다. 2008년 인수공통전염병인 AI(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했을 때 우리는 약 천만 마리의 식용 닭을 도살해 이 땅에 묻혔다. 2013년 제작된 ‘감기’의 미덕은 당시의 현실을 용감하게 인간에 적용한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인수공통전염병이니 영화적 상상력이 인수공통으로 발휘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이상하진 않다. 


우리는 동물을 금수라 부르며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엄격히 구분 짓지만, 바이러스 입장에선 인간도 동물이다. 숙주로 삼을 만한 동물이 줄고 있는 마당에 77억으로 개체 수가 급증하고 전파력이 뛰어난 호모사피엔스는 좋은 숙주감이다. 그렇게 인수(仁獸)공통전염병은 계속 발병 중이다. 우리가 자초한, 인류세의 징후 중 하나다.

인류세라는 재난적 시대 상황에서 사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운이 좋았다. 국토가 작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은 폭염의 위험성이 호주보다 낮다. 북반구 온대 기후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북극, 남극처럼 빙하가 녹아내리지도 않고 투발루나 몰디브처럼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바다에 잠기지도 않았다. 전쟁에 비유하자면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위치한 격이다. 


그러나 인류세의 다른 위협과 달리 전염병은 전방, 후방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전파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위협적이다. 코로나19의 진원지로 알려진 우한은 인구수 기준 세계 17위의 메가시티다. 서울은 세계 5위다. 온도도 맞고 숙주도 많고 전염도 쉽다. 인수공통전염병이 퍼지기 좋은 조건이다. 


2013년 작 ‘감기’가 2015년 메르스, 2020년 코로나19로 다시 회자되듯 또다시 대중 앞에 환기되는 시기는 언제가 될까? 그때도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재택근무를 하면 지나갈까. 얼마나 더 많은 사회적 비용과 희생을 치러야 인류세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을 깨닫고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댈까? 확실한 건 지구는 계속 이상 신호를 보내온다는 것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시대의 이름을 ‘인류세’로 개명하자고 하는 이유이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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