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조회수 2020. 3. 11. 10: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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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 (2016)

다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


초창기 '이것'은 피아노 모양과 비슷했다.
존 메이어는 '이것'으로 가사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직업도 있다. '이것' 수리점, '이것' 수집가, '이것' 연주자, '이것' 조형가.
톰행크스는 250여 대의 '이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사랑하는 마음에 동호회를 만들어 사용을 종용할 생각까지 했다.
'이것'은 1868년에 최초 발명되었으며 일련의 과정을 지나 대량 생산되면서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터에 최초로 진입한 계기가 된다.


정답은?

바로 타자기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서점 한 켠에도 오래된 타자기가 있다. 손님들은 타자기를 발견하면 십중팔구 눈이 휘둥그래져 묻는다.

이거 진짜 되는 거예요?

각종 문구를 작성할 때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는 내겐 익숙한 물건이지만 손님들에게는 실물 타자기를 보는 일이 흔치 않았을테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만약 톰 행크스가 내 타자기를 본다면? 아 이 제품은 몇년도 생산됐고 세계에 몇 대 있는데 타이핑 소리가 비교적 묵직하군요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한바탕 신이나서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타자기 유저이긴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에는 몰랐다. 유구한 역사, 무수한 종류를 가진 타자기의 참모습을. 그리고 그걸 사랑하는 다양한 방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이폰이 출시될 때마다 새벽부터 길게 줄을 서고 첨단의 첨단을 찾아 헤매는 2019년, 우리에게 타자기는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들은 타자기를 지키고 싶어하는데 그건 실용적이지 않아요. 제 나름의 경의의 표시예요. 선반에서 먼지에 덮이느니 이 상태가 낫다고 생각해요. 기술은 인류를 바꿀 거예요.

-제레미 마이어 / 타자기 조형가


편의와 행복이 같은 뜻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켄 알렉산더 / 캘리포니아 타이프 라이터 직원

 

전 타자기를 과거보단 미래의 상징으로 봐요. 앞으로 일어날 뭔가의 상징.

-리차드 폴트 / 작가

 

컴퓨터 화면과는 친해지질 못했어요. 촉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싫어요.

-샘 셰퍼드 / 극작가 겸 배우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실제 캘리포니아에 있는 타자기 수리점의 이름이기도 하다. 예리한 사람이라면 위에 인용한 출연자들의 말에서 느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옛 것은 소중한 것이여.” “오래된 것이 더 소중해!”라는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레트로 열풍이나 뉴트로 같은 조악한 단어의 조합으로 트렌드를 만들어 한 때의 ‘힙’을 다루려는 의도도 없다. 


다만 타자기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고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지켜가고 있는지 각자의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오래된 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현대적 방식을 소개하며 기술의 발전 안에서 사라져가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250여개의 타자기를 소유하고 있는 톰 행크스. 그는 매일 타자기를 이용한다.

진중한 연기를 주로 선보이던 톰행크스가 할 말 많은 어린 아이처럼 상기되어 줄줄이 말을 이어가는 이유가 뭔지, 스티브잡스와 제품 설명회를 함께 했을 정도로 기계를 잘 다루는 존 메이어가 왜 작사를 할 때 타자기를 쓰는지.


부품도 구하기 힘든 시대에 IBM 출신의 기술자는 왜 타자기 수리점을 어렵게 이어가는 길을 택했는지, 무대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하며 기타를 부수던 피트 타운센트처럼 관객 앞에서 타자기를 부수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타자기를 죄다 분해해서 전혀 새로운 조형물로 만드는 예술가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지.


각자의 사정을 듣다보면 하나의 물건에 참 별의 별 이유가 다 있구나 싶은 재미를 느낀다.


Jeremy Mayer가 만든 마크 주커버그의 얼굴. 그는 타자기 부품은 인체와 닮았다고 말한다.

타자기의 발전 과정 역시 눈을 사로잡는다. 초창기 타자기는 피아노의 모습과 닮아있다. 타격을 줘서 작동하는 원리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다. 모양이나 소리도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제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타자기들을 보면 아니 어쩌자고 저 아름다운 것들을 없애버린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사라진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편함이다. 휴대하기도 무겁고 손목에 힘도 많이 들어간다. 심지어 한 번 틀리면 죄다 다시 써야한다. 수정액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바로 프린트 되는 셈이기 때문에 완벽한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톰행크스는 잘못 쓴 부분에 엑스자를 사정없이 덮어씌우는 과감한 방식을 택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장점이기도하다. 문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기록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과정을 보는 것이 컴퓨터에서는 불가능하다. 작가 데이빗 맥컬로프의 말처럼 기록이란 완성된 문서로서의 기능 외에도 사고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나 역시 생각하기 때문에 수기로 작성하거나 타이핑한 자료들의 수정 전 문서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 


덕분에 잡다한 자료가 여기 저기 쌓여있긴 하지만 어떤 완성품의 과정을 기억한다는 것은 다음 작업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타자기의 단점이자 장점인 또 하나의 특징은 물성이다. 타이핑 소리와 감촉. 직접적인 자극이 인간과 기계 사이에 긴밀감을 만든다. 물론 이 물성이 결국 컴퓨터의 편리성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인터뷰에서 불편함을 지향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 오프라인 책방으로 꾸역 꾸역 손님들이 와야하는 이유를 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불편함을 지향한다는 말은 불편하길 바란다는 말이 아니라 불편한(정확히 말하면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으니 간직된다는 그것을 즐겨보는 순간이 삶에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다큐멘터리 속 등장인물 대부분은 그런 지향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비록 시대의 흐름의 큰 줄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지만 각자의 신념은 확고하다.

각자가 다 문화예요.
한 명 한 명이 다 문화인데
문화를 크게 하나로 보는 건
말도 안돼요.

극작가 겸 배우 샘 셰퍼드의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다수의 선택으로 변화해가지만 소수의 선택도 늘 존재한다는 것을 가끔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을 지켜간다는 것은 참으로 줄거운 일이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 지금 보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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