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이유 〈어둔 밤〉

조회수 2019. 12. 12. 13: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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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2017)

〈왕좌의 게임〉을 밀레니얼 세대의 삼국지라 칭하며 직장생활의 비애를 털어놓은 후 퇴사를 했다. 몇 개월을 사무실 책상에 앉아 시름시름 앓았다. 지금 그만두는 것이 맞을까, 조금 더 버티다 보면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시간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진 순간 결심했다. 

이렇게 앉아서 고민하느니
그만두겠다.

결국 퇴사의 이유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퇴사의 이유이자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어둔 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둔 밤〉은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 장편경쟁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필자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어둔 밤〉은 한 대학교의 ‘영화 보는 동아리’ 회원인 심피디, 안감독, 요셉, 조빙의 이야기이다. 이 네 명의 친구들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넘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고,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영화제작의 여정이 이 영화의 주 내용이다. 

사실 〈어둔 밤〉은 학교에서 영화를 찍으며 희로애락을 함께 하던 친구들끼리 만든 영화로, 어쩌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영화제 계약직 직원이었고, 이대로 나의 삶은 지속 가능할 것인가 고민하던 때였다. 


그 고군분투의 영화제작 여정은 그 시절 우리들의 지난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웃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고등학생에게 얻어맞아 받은 깽값으로 영화를 만드는 에피소드도, 메소드 연기를 하다가 신의 은총을 받아 종교인이 된 친구도, 할리우드에 가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도제가 되진 않았지만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촬영을 공부하게 된 친구의 이야기도 모두 실제 감독과 나와, 나의 친구들의 사연들이다.


영원히 외장하드에만 남게 될 줄 알았던 영화 〈어둔 밤〉이 관객들을 만나게 된 그때를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어둔 밤〉이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 순간은 더 특별했다. 사실 남미 관객들과도 이 영화로 소통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영화제에 갔었다. 


영화 속 요셉이 액션 배우가 되고자 훈련을 하며 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L-O-V-E를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스페인어 자막에는 찰떡같이 A-M-O-R로 번역되었고, 사람들이 폭소하는 것을 목도한 순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어둔 밤〉의 스페인어 자막을 번역해주신 분이 이 영화만 5번을 보시고, 관련된 영화들을 모두 찾아보신 뒤 번역하신 공이 컸지만, 언어가 달라도 영화로 서로 소통하던 그 순간의 벅찬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에도 종종 남미 관객들이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다시 영화를 볼 수 없냐는 연락이 올 때마다 여전히 신기하고 감사하다. 


나만 웃긴 줄 알았던 장면에서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던 순간,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할 때 실제 한 관객이 극장을 떠나 허탈함도 맛봐야 했던 때, 그리고 영화의 긴 여정을 함께한 관객들이 환호하던 순간, 그리고 이젠 내 외장하드에서 파일을 여는 것이 아니라 왓챠에서 스트리밍 할 수 있게 된 지금까지. 이 순간들과 기억들 때문에 다시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지난 4년간 영화제 스태프로서의 직업을 마무리하며 퇴사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3년 동안 머물렀던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나오는 기분은 시원하기보다는 찝찝했고, 여전히 아침 7시에 눈이 떠지는 내 자신이 싫고, 막상 자유의 시간이 주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정말 영화를 만들어서 다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오긴 할까, 애를 써서 만들었다고 해도 영화를 개봉하기는 어디 쉽나. 


아마도 내 삶은 더 비루해질 수도 더 어두워질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만들고 관객들과 소통하던 그 순간의 즐거움과, 그때의 내 모습에 충실하고자 한다. 오늘 밤엔 왓챠로 다시 〈어둔 밤〉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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