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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방식으로, 〈라디오 스타〉

조회수 2019. 11. 20. 13: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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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 (2006)

"열도 나는 것 같고 어지럽고 배도 아파요... 기침도 나오는 것 같아요!"


학교에 가지 않기 위해 아픈 척을 했습니다. 그날은 예방접종이 있었는데, 날카로운 주사 바늘이 피부를 뚫는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피하고 싶더라고요. 어머니의 손바닥 청진기는 정확했습니다. 황망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야 했죠.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발현되는 심리적 보호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특정 외부 요인이 나를 위협한다고 감지한 순간, 여러 장치들 중 적합한 것을 꺼내 딱! 대응을 하는 거죠. 이를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제가 주사를 피하기 위해 취한 행동은 방어기제의 하나인 '퇴행'입니다.


* 퇴행(regression): 극도의 스트레스나 좌절에 직면했을 때 이전 발달단계에서 효과적이었던 미성숙한 행동을 함으로써 현재의 불안에 대처하려는 것


동생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첫째 아이가 갑자기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어리광을 부리는 것, 성인의 경우 스트레스 상황에서 과식을 하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도 퇴행의 예를 볼 수 있는데요.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자 아스가르드의 왕, 천둥의 신이라는 모든 권위와 책임을 내려놓고 술과 게임으로 여생을 채워갑니다. '스톰 브레이커'를 병따개로 쓰는가 하면 게임 속의 다른 유저와 다투며 시시덕거리죠. 얼굴 가득 득시글거리던 익살이 '타노스'라는 단 세 글자로 증발하는 장면은 그가 애써 외면하던 진심을 보여줍니다.

에휴, 토르는 정신이라도 차리죠. 시종일관 퇴행만 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습니다. 바로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분)'인데요. '비와 당신'이라는 히트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입니다. 이 아저씨가 성깔이 장난 아니에요. 말썽도 어찌나 많이 부리는지. 관계자들 모두 포기한 진상입니다.


다행히도 최곤의 곁에는 그를 보필하는 하나뿐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지적 참견 시점〉을 따라해 볼까 해요. 진상 오브 진상 최곤. 매니저인 박민수의 시점에서 그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1. 우리 곤이

곤이가 가요대상을 받는다. 무대를 향해 걷는 그의 뒷모습은 내가 살면서 보았던 가장 멋진 장면이다. 웃어라 곤아. 맘껏 날아라.


#2. 곤이 녀석

또 손님과 갈등을 일으켰다. 오늘은 한술 더 떠서 카페 사장에게까지 주먹질을 했다. 음주, 폭행 사건으로 등 돌린 사람들 틈에서 그나마 믿고 무대를 내어준 분인데... 오늘은 피해자 신분이다. 유치장 신세 면해보려 부단히 선후배의 옷자락을 당겨본다. "돈 없어." 묻기도 전에 대답부터 온다. 곤아, 이 녀석아, 상황이 예전과 다르잖아. 참는 게 어렵니.

#3. 곤이 새끼

지방 방송국 DJ를 조건으로 곤이의 구속을 면했다. 알리 없는 그 녀석은 가는 내내 불평을 쏟아 낸다. 10년간 작동한 적 없는 방송 장비, 싸늘한 국장, 좌천된 PD 사이에서 어렵사리 시작한 첫 방송. 곤이가 후배 가수와 전화 연결 중 욕설을 주고받는다. 방송이 끝나자 그 분노가 나를 향한다. 걔한테 돈을 왜 꿨냐고? 그거 니 깽값 물었어 이 자식아.


#4. 마지막 기회

청취율이 늘었다. 공개방송까지 한다니, 신이 마지막 기회를 주나 보다. 다시 돌아온 영광의 시대, 그런데 그 시대는 예전과 달랐다. 이제 곤이에겐 더 나은 관리가 필요하다. 그를 떠나야 한다.

"막판에 배신 때리고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거지!?"

이 녀석, 어른스레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화를 쏟아낸다. 열불 내며 울먹거리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 맘 쓰인다. 어쩌겠냐. 녀석의 고함질을 뒤로하고 숙소를 나선다. 나도 고생 많았다. 집에 가자 이제.


#5. 라디오 스타

이제 전국 송출 라디오에서 그 꼴통 자식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없이도 잘하네. 그래, 곤아. 웃어라. 다시 날아라.

퇴행, 과거의 방식으로

영화 〈라디오스타〉는 과거의 스타가 과거의 장비, 과거의 습관으로 현재를 써나간다는 점에서 퇴행의 본질과 닿아있습니다. ‘과거는 현재를 이해해 가는 수단’이라는 점이요. 우리 역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애인이 마음을 몰라줄 때, 또는 그저 사는 게 피곤하고 지칠 때 '최곤의 선택'을 해버리곤 합니다. 유치하게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딱히 다른 방식이 떠오르지 않죠.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는 간단합니다. 정신 차려. 어른답게 행동해.


그런데 퇴행은 단순히 '철없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방식이 아직도 유효한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약발이 떨어졌는지 검토하고 앞으로도 그 선택을 고수할지 고민합니다. 이는 유아기의 발달 과정과 그 형태가 유사해요. 


따져보면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 시절 그 모습처럼 여전히 자라나고 있는 셈입니다. 애초에 어른이 되겠다고 자처한 적도 없어요.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그 범주에 들어왔을 뿐,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죠. 겁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니 이따금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나를 이해해주세요. 박민수가 있었기에 최곤은 그 많은 퇴행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내 안에도 민수형 같은 매니저를 고용해주세요.

전국으로 송출되는 라디오의 첫 생방송. 최곤은 눈물로 호소하며 민수형을 찾습니다. 여전히 사과는 없지만,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는 말에서 그의 작은 변화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더 자라나고 있는 걸까요.


"나 조용필 만들어준다면서...

와서 좀 비춰주라. 반짝반짝 광 좀 내보자 쫌!

듣고 있으면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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