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그래도 빵이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조회수 2019. 11. 7. 14: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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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79)

나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아주 어릴 적에-아마도 십대가 채 되기도 전에- 보았는데 티브이에서 방영해주는 주말의 명화라든지, 뭐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이런 식으로 기억했다. 


눈, 센트럴파크, 프렌치토스트.

이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대한 완전한 오독이다. 이 영화는 이혼 부부의 양육권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4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아마도 여러분은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결혼 생활 7년 동안 남편의 뒷치닥거리만 하던 아내, 조안나가 갑자기, 테드-남편-와 일곱살짜리 아들을 떠나면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녀는 나중에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엄마가 집을 떠난 이유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서야. 모두에겐 자신 만의 길이 있단다.”


일년 반 후에 나타난 그녀는 아들의 양육권을 가지고 싶다고, 이제는 전남편이 된 테드에게 소송을 건다. 이 소송에서 증인대에 올라선 테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내는 언제나 말했습니다. '여자라고 왜 남자만큼 야망이 없겠어?' 당신 말이 맞아,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알아.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묻고 싶습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건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에 이 영화의 진짜 훌륭한 점은 다른 데에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어떤 순간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순간들이 있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본인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증발되어 버리는 감정 같은 것들이 있다. 무심하게 볼에 갖다대는 손, 서성이는 발걸음, 문 밖에서 떨구는 고개 같은 것들. 눈이 엄청나게 오는 날 세탁물을 찾아오는 길에 테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혼녀이자 친구인 마가렛을 만난다. 


테드와 그녀는 어깨동무를 한 채로 함께 걸어가며 두려움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조안나가 집을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아들과 만나는 장소는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이다. 트렌치 코트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초조하게 서 있던 그녀는 저 멀리 아들이 보이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팔을 벌린다. 아들이 산책로를 전속력으로 달려서 제 엄마에게 가 버리고 났을 때, 혼자 남은 테드는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든 후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고 다시 보게 만든 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프렌치 토스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프렌치 토스트라는 음식을 처음 접한 건 바로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조안나가 떠난 다음날 우왕좌왕하면서 테드는 프렌치 토스트를 만든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결국 아무도 그 토스트를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프렌치 토스트를 만드는 장면은 한번 더 나온다. 이때쯤엔 테드는 마치 프렌치 토스트를 만드는데 도사가 된듯이 보인다. 넓은 볼에 계란을 깨서 넣어주고 잘 저은 후 우유를 붓고 또 다시 저어준다. 그리고 거기에 식빵을 적신 후, 버터로 달군 후라이펜에 넣어서 굽는다.


처음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 때 식빵을 반으로 접으니까 아들이 빵이 잘린 게 싫다고 볼맨 소리를 한다. 이떼 테드는 이렇게 대답한다.“조각이 나든 아니든 맛은 똑같아. 빵은 빵이란다.”

나는 어쩐지 이 말이 마음에 든다. 무언가 인생의 진리가 들어있다고 느낀다. 잘리든 안 잘리든 빵은 빵이다. 원한 적 없는 상실과 마주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거나 받았을 때, 어떤 관계에 완전하게 실패한 기분이 들 때, 어쩐지 빵은 빵이다 라는 말을 떠올리면 엄청 안심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삶은 삶이다.
빵은 빵이다.

흠. 이건 그저 내가 고독한 빵순이기 때문인걸까? 하하…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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