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있을까. 보통의 존재..〈로제타〉

조회수 2019. 10. 30. 16:14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로제타 (1999)

〈보통의 존재〉라는 책이 있다.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지금은 음악과 작별하고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의 산문집으로 2019년 1월 현재 61쇄를 기록했다. 2009년 발간 당시 유명 저자의 책이 아니었음에도 이 책이 10년 동안이나 지속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제목이 한몫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보통의 존재가 되고 싶은-즉 평범한 안락을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되어 책을 펼쳐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평범함이란 어느 수준일까. 고고하게 독서를 통해 평범한 삶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다른 누군가가 갈구하고 있는 평범한 궤도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최소한의 평범한 삶을 원했던 로제타(영화 〈로제타〉의 주인공)는 주문을 외우듯 이런 말들을 읊조린다. 


너의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너는 직업을 구했어. 나는 직업을 구했어.

너는 친구가 생겼어. 나도 친구가 생겼어.

너는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나도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너는 틀에 박히지 않을 거야. 나도 틀에 박히지 않을 거야. 

잘 자. 너도 잘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평범한 여유를 상상할 수도 없는 삶. 그런 사람들이 갈구하는 평범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어쩌면 나 역시 안온을 간절히 바랐던 순간이 떠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로제타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임과 동시에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영화다.

그녀는 가난하다. 집 대신 컨테이너에서 살고 와플과 수돗물로 끼니를 때운다. 배가 아프면 드라이기로 배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렵고 기껏 구한 일자리에서는 사장 아들에 밀려 부당 해고를 당한다. 게다가 부모도 형제도 없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예 지워졌고 어머니는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파는 알콜 중독자이다. 


딸 앞에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은 없다. 재활원에 보내려는 딸과 실갱이하다 딸이 물에 빠지자 옳다구나 하고 도망가버린다. 딸이 살려달라며 허우적대고 있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도망가버린다. 물질적, 정서적으로 어떤 보호막도 없는 로제타에게 생존 이외의 것은 모두 사치다.


무한 경쟁 사회가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다고들 하지만 로제타의 경쟁 대상은 다른 누가 아닌 그녀 ‘자신의 삶’이다. ‘내 삶’이 끊임없이 나를 조롱하고 괴롭히고 있다는 지독한 절망감은 스스로를 더 고립시킨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악하지만, 술에 절어 집 앞에 반송장으로 널브러져 있는 엄마를 보고 마침내 모든 노력을 멈추기로 한다. 

조용하게 최소한의 작별 의식(직장에 전화를 거는 것과 삶은 달걀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 것)을 치르고 가스 누출로 생을 마감하려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은 그녀를 비웃으며 그녀의 의도와 반대로 흐른다.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새어 나오던 가스가 끊겨 버린 것이다. 결국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로제타는 무거운 가스통을 들고 가스 충전소로 간다. 자신을 죽여줄 가스를 충전하기 위해. 넉넉한 가스가 들어있는 새 가스통은 그녀에게 죽어야만 하는 절망이었을까, 죽을 수 있는 희망이었을까. 


낑낑대며 들고 가는 가스통의 무게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버겁다. 들고 가다 잠시 내려놓아도 스스로가 다시 들고 가야 하는, 누구도 대신 들어주지 않는 너무 가혹한 짐이다. 낑낑대던 그녀는 결국 가스통과 함께 넘어지고 내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린다. 단 한 번도 소리 내 울지 않았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질 만큼 그녀의 삶은 보는 사람마저 숨이 턱턱 막힌다.

그 삶을 반영하듯 영화 속에는 배경 음악 없이 내내 날이 선 현장음만 가득 차 있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듯 음악을 사용해 어떤 감정도 억지로 고조시킬 의도가 없다) 그나마 단 한 장면에서 만난 음악도 타인의 삶 속에 있던 음악일 뿐이다. 음악이 없다고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관객의 입장에서도 음악을 집어넣을 정서적 공간이 없으니까.


밑바닥 삶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이 영화를 보며 내내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제목부터 가사, 곡조까지 처절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죽음(정태춘. 1990)이라는 곡은 비극적 사고에 대한 기사를 그대로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끔찍한 사고의 내용은 이렇다. 가난한 맞벌이 부부가 아이들을 맡길 여유가 없어 집 안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했는데 아이들이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화재로 사망하고 만다. 3살, 5살의 어린 아이들이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간 부모는 자신의 행동이 아이들을 불길 속에 갇히게 했다는 죄책감을 어떻게 견뎌내며 살아냈을까. 열심히 살려고 했던 죄밖에 없었는데.

세상의 민낯을 그대로 내보이며 여기 이렇게 아픈 사람이 있다고, 왜 어떤 이들은 열심히 살아도 죄로 돌아오는 삶을 살아야 하느냐고 외친 두 작품 모두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실질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로제타로 인해 청년 실업 대책인 [로제타 플랜]이 실시됐고 우리들의 죽음은 [영유아 보육법] 제정에 큰 역할을 했다. 30년 전의 노래, 20년 전의 영화이다. 그럼 지금 세상은 달라졌나. 함부로 희망차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모두가 보통의 존재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어쩌면 영원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