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살자, 〈이웃집에 신이 산다〉

조회수 2019. 10. 29.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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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신이 산다 (2015)



살며 문득 발이 멈추어지는 때가 있다.


어디로 가고 있던 것인지, 왜 가야하는지, 가서 뭘하려던 것인지 갑자기 생각이 안나 우두커니 멈춰선 채 바람만 맞고 서있는 꼴이다. 기운이 없는 것인지 길을 잃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져 세상도 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만 같다. 


예전에는 그런 순간이 오면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대로 인생이 송두리째 망해버리는 것만 같은 위기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못드는 밤을 숱하게 보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덧 불혹을 앞둔 - 이제는 침착하게 응급처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컵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 단번에 들이켜 뇌세포를 대량으로 학살한 뒤 잠드는 것으로 지리멸렬한 삶을 조금이라도 단축시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조용히 자크 반 도마엘의 영화를 본다.


벨기에 출신의 감독 자크 반 도마엘은 1991년 ‘토토의 천국’으로 데뷔한 뒤 약 30여년의 시간 동안 ‘제8요일’, ‘미스터 노바디’, ‘이웃집에 신이 산다’ 단 네 작품을 연출했다. 하나 하나가 오랜 시간 깊은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답게 한결같이 묵직하지만, 이 묵직함을 ‘보고싶지 않은 진지함’이 아닌 ‘보지 않을 수 없는 귀여움’으로 포장한다는 점이 내가 생각하는 그의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작인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독보적으로 귀여운 영화다.


우선 제목이 귀엽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라는 국내판 제목도 귀엽지만, 원제인 ‘Le Tout Nouveau Testament(신 신약성경)’이 귀엽다. 새로 쓰는 신약성경이라니. 도대체 누가 쓴다는 것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이 세상을 만든 신의 딸인 ‘에아’인데, 이 에아가 매우 귀엽다. 

에아는 벨기에의 한 아파트 골방에 틀어박힌 채 자신이 창조해낸 세상 속 인간들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아버지 ‘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그런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인간 세상으로 떠나간 오빠가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에아는 무책임하고 삐뚤어진 아버지를 골탕먹이려 아버지의 컴퓨터를 이용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남은 수명을 발신한 뒤 집 안의 세탁기를 통해 인간 세상으로 떠난다(귀엽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게 된 인간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 속에서 에아는 자신만의 사도들을 만나 함께 귀여운 여행을 하며 새로운 신약성경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중 유독 인상 깊었던 것은 두번째 사도인 장 클로드의 이야기였다. 그는 어린 시절 위대한 모험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꿈이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어, 평생을 부지런히 일한 끝에 한 회사의 예산 담당자가 되었다. 나이는 벌써 58세로 일을 하느라 시간에 쫓겨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던 그는 언제나와 같은 출근길에 핸드폰 문자로 자신의 남은 수명을 통보 받는다. 그 길로 들고있던 서류 가방을 쓰레기통에 쳐박은 장 끌로드.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중 에아를 만난다.


“아이는 자라면 뭐가 되나요?”

에아가 묻는다.


“부모가 되지. 가끔”

그는 답한다.


“부모는 자라면 어떻게 되나요?”

에아는 다시 묻는다.


“죽는단다.”

그는 답한다.


이어 에아의 손끝으로 날아온 새에게 장 끌로드가 묻는다.

“너는 왜 공원을 벗어나지 않고 이곳에 있는거니?”


에아가 휘파람으로 새에게 통역을 해주더니 새의 답을 전한다.

“아저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네요.”


이윽고 장 끌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험을 시작한다. 그동안 온갖 핑계로 미뤄뒀던 모험을 죽음이 명확해진 순간에서야 떠나는 것이다. 귀여운 장면이지만 서글픈 감정이 들기도 하는 건, 영화 속 장 끌로드의 모습이 마치 어느 순간의 나를 보는 것만 같기 때문이겠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우리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굳이 전지전능한 신의 장난으로 죽을 날을 확정받지 않더라도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또한 매일 죽어간다는 것과 같음을 진작부터 알고있다. 그럼에도 마치 영원히 살아갈 사람처럼 기약없는 미래를 향해 기꺼이 현재를 바치며 살아간다. 


나이를, 성별을, 종족을, 장애를, 상황과 여건과 시간을 핑계로 정말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미루고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에아는 말한다. 원하는 삶을 ‘지금’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당신의 삶은 끝이 날 것이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살며 문득 발이 멈추어지는 때가 있다. 어디로 가고 있던 것인지, 왜 가야하는지, 가서 뭘하려던 것인지 갑자기 생각이 안나 우두커니 멈춰선 채 바람만 맞고 서있는 꼴이다. 그럴 때는 ‘결국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면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주변의 것들이 단순해지기 시작하며 그중 많은 것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그리하여 무엇을 하다 죽었을 때 억울함이 덜할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하는 일은 간단하다.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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