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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대는 죽음, 이상한 활기.. 쥐잡이

조회수 2019. 10. 21. 13: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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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잡이 (1999)

〈캐빈에 대하여〉(2011),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의 국내 개봉으로 감독 린 램지의 이름이 익숙한 관객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막 4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린 램지의 장편 데뷔작 〈쥐잡이〉(1999)로부터 이 지면을 시작해보려 한다.


1970년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소년 제임스 길레스피(윌리엄 이디). 불행은 벼락처럼 소년을 덮친다. 제임스는 실수로 친구 라이언을 집 앞 운하에 빠뜨리고 라이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에 이른다. 의도하지 않은 장난은 비극이 되었고 매일같이 뛰놀던 집 앞의 풍경은 두려움과 불안을 한껏 끌어안은 풍경이 된다. 내성적인 제임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모든 걸 집어삼킨 물속을 말없이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다.


영화는 죽음의 원인과 범인을 파헤치는 추적의 일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대신 충격적인 사건 이후 그 누구와도 이 일에 관해 말하지 못하는 제임스의 내밀한 심상, 소년이 오가는 동네의 변함없는 일상과 그 속에 잠복해 있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폭력과 비루함을 비춘다.


이를테면 제임스의 가족. 짐작건대 어머니는 자신의 많은 걸 포기하고 집안을 돌봐왔을 것이고 아버지는 제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영화는 이 집안의 상태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하나의 장면을 무심히 집어넣어 둔다. 제임스가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지쳐 잠든 엄마의 구멍 난 스타킹을 조심스레 당겨 비죽이 나온 엄마의 발가락을 덮어주는 장면 같은 것이다.


또 이를테면 제임스의 친구. 유일하게 제임스가 교감을 나눈 마거릿이 폭력적인 또래들에게 시달리다 안경을 운하에 빠뜨리게 된다. 제임스는 그 안경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 물은 라이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물이다. 그 물속에 또다시 마거릿의 안경이 빠졌다. 물속을 헤집어보는 제임스의 안간힘은 이미 잃어버린 것과의 대면이자 다시 또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이중의 두려움이다. 제임스 주변의 정돈되지 않은 상황도 마찬가지다. 거리에 넘쳐나는 쓰레기, 곳곳에 어른대는 오염의 흔적들, 그곳을 누비는 쥐들.


린 램지의 세계는 많은 경우 (단편의 일부와 4편의 장편 모두에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또한 놀랍게도 린 램지의 세계는 그 비애 사이에 불균질적인 음악과 몸짓을 넣는 걸 잊지 않는다. 예컨대 〈쥐잡이〉에서 제임스의 친구 케니가 물에 빠졌을 때 제임스의 아빠가 케니를 구한 뒤 집안에서 벌어지는 짧은 파티의 장면 같은 것이다.

죽은 애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끔찍한 순간을 마치 환희에 가득 차 흥겨운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장면으로 바꿔놓았던 〈모번 켈러의 여행〉(2002)이나 주인공 조(호아킨 피닉스)가 엄마를 죽인 자와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던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순간도 마찬가지다. 종잡을 수 없는 이런 이상한 활기가 비애를 더 극대화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균형적이고 불균질한 것들의 혼종이야말로 세상의 모습이고 심상의 다면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에 이르러 〈쥐잡이〉의 제임스는 죽음의 공간이던 물과 이상한 방식으로 대면한다. 그것은 서둘러 잠에서 깨고 싶은 악몽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영원한 몽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린 램지의 영화에서 형태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수장(水葬)과 밀폐의 이미지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명확하게 떨어지는 결론 같은 건 이 영화에 없다. 여기에도 속할 수 없고, 저기로도 갈 수 없는 제임스의 마음과 몸의 상태만이 있다. 무언가의 실체란 그런 이상한 중간 어디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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