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 기 빨려? 더 포스트

조회수 2019. 10. 15. 14:4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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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트 (2017)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있었던 일이다. 문득, 미팅에 참석한 열 명 가운데 딱 한 명, 우리 쪽 CD(Creative Director)님을 빼고는 나머지 모두가 여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쯤이었나? 600대 비금융 상장사 여성 종업원 고용률이 25%도 채 안 된다는 기사를 봤던 것 같은데, 꽤 고무적이면서도 이건 이것대로 별스러운 여초가 아닌가 싶어, 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CD님께 말을 걸었다. 


"여자가 참 많은 회의였죠?"


그저 가벼운 화제 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 피곤한 CD님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오, 나 기 빨려 죽는 줄 알았어.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보다 격하게 날아들어온 CD님의 서든어택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왠지 모를 송구함으로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소멸하려는 찰나, 새삼스러운 의문 하나가 삐쭉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근데 여자들은 보통 이런 경우, 그러니까 본인이 속한 집단에 남자가 극단적으로 많다고 해도, 기가 빨린다느니 뭐, 그런 말 잘 안 하지 않나? 확률상으로 따져도 사회생활에서 여성이 남초집단에 섞일 경우의 수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을텐데?


그리고 영화 <더 포스트>가 떠올랐다. 미국 정부가 30년 동안 숨겨온 베트남 전쟁에 관한 비밀을 담은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 포스트誌의 편집장 ‘벤’은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폭로하기 위한 기사를 작성하지만, ‘아서’를 주축으로 한 이사진은 회사의 상장 이슈를 이유로 이를 저지하려 한다. 


결국 기사 발행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은 포스트誌의 사주이자 최초의 여성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 앞으로 돌아가고, 늦은 밤 그녀의 집으로 몰려든 남자들은 각자의 주장을 펼치며 캐서린의 압박한다. 회사의 중역들이 테이블에 앉은 캐서린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장면은 <더 포스트>의 가장 대표적인 미장센이기도 하다.

집도 넓고, 자리도 많은데 좀 떨어져 앉으시지들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고 뭐고,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저 구도에서 만약 성비가 바뀌었다고 생각해보자. “아오, 나 기빨려 죽을 것 같아!!!” 캐서린의 대역이 되었을 누군지 모를 ‘그’라면 분명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서양인들은 안 그럴 거라고 단정하지 말자. 아무리 70년대라도 그렇지, 당장 <더 포스트> 이야기 속에서도 복장 터지는 미소지니misogyny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캐서린은 달랐다. 그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결정을 내린 뒤 우아하게 자리를 물리며 그저 나지막이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내 결정엔 변화가 없고, 이만 자야겠어요.

명리학, 흔히 ‘사주풀이’란 것도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고 한다. 직업운을 가늠하는 ‘관’이 없이 재능이나 끼를 의미하는 ‘식상’만 많은 사주를, 과거에는 천한 광대의 사주로 봤지만 최근에는 1인 크리에이터나 마케터로서의 자질로 해석하는 식이다. 


여성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왕성한 사회생활을 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의 사주가, 과거엔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거나 ‘드세고 박복한’ 사주로 풀이가 되곤 했다는 것이다. ‘일하는 여자 = 팔자 센 여자 = 남자 기 빨아먹는 여자’를 한둘도 아니라 떼로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진이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꼭 직장이 아니더라도 여자들이 많은 곳에 있다 보면 남자 입장에선 긴장감이 높아지고, 신경 쓸 것이 많아 쉽게 피로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른 성별의 대할 때, 그 ‘다름’으로 인해 느끼는 긴장이나 피로의 정도가 여자라고 해서 크게 다를까? 애초에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어쩌면 별 거 아닌 농담 같은 관용적 표현이 다시 잘못된 생각과 감정을 재생산하고 굳히는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고로 인심은 곳간에서 나고, 에너지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에서 나온다고 했다. 속이 허할 땐 기 센 언니들 탓 대신 기센 언니들과 고기라도 구워보자. 즉각적인 평안과 안식이 우리의 위와 장으로, 그리고 삶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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