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어요!

조회수 2019. 10. 11. 13: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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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감독의 속마음

모두가 숨죽인 촬영 현장.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다 외쳤다. “컷!” 배우에게 향했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OK 여부를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헷갈린다. 고백컨대 이 장면이 어떻게 찍혀야 OK인지, 잘 모르겠다. 


NG는 아니지만 마음 같아선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하지만 촬영 종료 시간이 얼마 안 남았고, 찍어야 할 장면도 산더미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라는 스태프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 OK로 할게요.”

OK면 OK지,
OK로 하겠다는 건
또 뭐예요?

배우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다른 배우가 짓궂게 대꾸한다. “OK로 하겠다는 것이지, 딱 OK는 아니라는 거야.” 또 다른 배우가 까르르 웃는다. “OK입니다!” 뒤늦게 큰 소리로 정정하지만, 최선을 다한 배우의 마음에 끝내 찝찝함을 안겨버리고 말았다. 식은땀이 내 이마를 타고 흐른다.


감독은 하루에 수백 가지 결정을 내린다. OK 컷을 결정하는 것은 기본이고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볼펜의 모양과 색깔까지도 결정한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지만, 최종 결정은 감독 몫이다. 수년간 이야기를 쓰고 어떻게 찍을지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려왔건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장에서 신속·정확한 결정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감독이 모르면 누가 알아?” 옆에서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감독도 모를 때가 있다. 아니 많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해.” 반가운 소리에 뒤돌아보면, ‘한 번은 참아주겠다’는 못마땅한 눈초리다. 사실 돌이켜보면 결정 자체가 힘든 게 아니었다. 그 결정이 언제나 옳아야 하는 중압감에 짓눌렸던 것이다. 그릇된 결정으로 영화 만듦새가 떨어지면 데뷔작이 곧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엄살이다. 중압감과 불안에 시달리는 게 어찌 영화 감독 뿐인가. 한 번 실수하면 더는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속에서 모두가 신속·정확한 결정을 요구받는다. 중압감과 불안은 이 시대의 동반자와 다름없다. 문제는 더 잘해야 하는 순간, 그때마다 얄궂게도 결정장애가 툭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결정장애가 무능의 또 다른 말로 통용되는 사회인지라 채찍질 해대곤 한다. ‘좀 더 유능해져야 해, 좀 더 확신을 가져야 해, 좀 더 경쟁력을 키워야 해.’ 하지만 헛된 다짐은 ‘내가 그렇지 뭐’라는 자조로 끝맺는다.


잘 모르겠어요.

영화 〈배심원들〉에서 8번 배심원 남우의 한마디에 신속한 결정을 요구하던 배심원들이 뒷목 잡고 쓰러진다. 영화를 보던 어느 관객마저 답답함에 자리를 박차고 상영관을 뛰쳐나갔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그래도 ‘나는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남우의 미련한 용기가 배심원들에게 살인 사건의 이면을 볼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결국 남우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듯 배심원들이 손을 번쩍 들고 외치기 시작한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장면이 신속·정확한 결정을 요구하는 세상에 반기처럼 느껴지길 나는 바랐다. 그리고 ‘모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게 사건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우의 결정장애를 참고 견뎌준, 아니 더불어 고민한 배심원들 모두의 값진 승리로 기억되기를.


그래, 반기를 들자! 결정장애는 세상의 요구로 생긴 마음의 병이지 무능이 아니다!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자신 있게 외치겠다! 더 나은 해답을 찾을 때까지 당당히 버티겠다! 잠깐만. 


그치만 세상이, 우리 배심원들처럼 견뎌줄까? 현실은 영화와 다른데... 아...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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