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조회수 2019. 9. 24. 11: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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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내 인생(1985)



어제 사촌 누나가 죽었다. 아무런 전조가 없는 죽음이었다. 나이 터울이 꽤 나기에 함께 나눈 추억이 많지는 않았다. 기억 나는 거라곤 누나가 고등학생일 적, 동생이 누나의 책상을 뒤져 연애편지를 뺏어 읽다가 따귀를 얻어맞았던 일 뿐이다. 


영정 사진 속 누나는 신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이십분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년 전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누나의 아들은 품이 맞지않은 상복을 입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기만 했다.


문득 내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실감했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아홉살이었고, 잠을 자려 누운 채 얼마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한복을 입고있던 외할아버지. 곰방대로 담배를 태우고 막걸리를 자주 드시던 외할아버지. 다정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전혀 없이 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던 외할아버지. 그 외할아버지는 지금쯤 분명 땅 속에 계실텐데, 언제까지나 그런 어둠 속에 혼자 지내야 한다면 참 무섭겠다.고 말이다.


“엄마. 나중에 말이야.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그런 생각을 하다 어린 동생 쪽으로 돌아 누운 어머니의 등에 대고 말했다. 


“엄마도 죽어?”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응”하고 답했다. 방앗간 일을 하느라 종일 몸을 써 피곤했기 때문인지 이미 반쯤 잠이 든 상태였다.


“아빠도 죽어?”


“응”


“차돌이(동생)도 죽어?”


“응”


“방울이(치와와)도 죽어?”


“응”


“나도 죽어?”


“그래.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어. 그러니까 어서 자.”


돌림노래 같은 나의 질문에 지친 어머니는 짜증난 목소리로 답했고, 더 이상 물었다가는 혼나겠다 싶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쉽사리 잠에 들진 못했다. 모두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니. 감당키 어려운 비극적 사실이 너무나 무섭고 슬퍼서 눈물이 찔끔났다.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영원히 살 줄 알았다.


불현듯 덥고있는 이불이 부러웠다. 이불은 나이를 먹지 않으니 죽지도 않을 테니까. 왜 나는 결국 죽어야만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음 날 나는 일기장에 동시를 한편 썼다. 제목은 ‘이불’이었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이불은 좋겠네. 죽지 않아서’로 끝이 난다는 것만 기억한다.

‘개 같은 내 인생’을 처음 본 것은 그 즈음의 일이다(토요일 밤 해주던 ‘주말의 명화’에서 더빙된 것으로 보았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인 꼬마 ‘잉마르’는 말썽꾸러기다. 그에겐 병을 앓고있는 어머니가 있다. 잉마르는 그런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려 애쓰지만 하는 일마다 어그러져 어머니의 안정을 해치기만 한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잉마르는 시골 작은 마을에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겨진다. 그곳에서 잉마르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즐거운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그 사이 어머니는 병이 점점 심해져 결국 죽게된다.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하고 있어 별수없이 이 마을에서 살아가야 할 신세가 된 잉마르. 잉마르는 큰 충격에 빠져 외삼촌이 만들어 놓은 오두막에 틀어박혀 밤새 엄마를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리고 다음 날, 외삼촌은 잉마르를 다시금 소소한 마을의 일상으로 이끈다.


써놓고보니 참 재미없을 것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큰 재미는 없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별 거 없는 일들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질 뿐이며, 병든 어머니가 죽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영화를 통틀어 이렇다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처음 보았을 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내 또래 아이가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고, 영화 속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의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좋았다.


시간이 흘러 두번째로 보게 되었을 땐 이 영화가 한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세번째엔 내가 겪었던 누군가의 죽음을 반추할 수 있었고, 네번째엔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희미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로도 나는 이 영화를 수십번 다시 봤는데(폐업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샀다) 볼 때마다 내가 겪고있던 상황에 따라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카를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9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정말 끝없이 슬퍼했다. 긴 투병 끝에 맞이한 죽음이라 수없이 예상했던 순간이었음에도, 부모의 죽음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슬펐고, 그래서 슬퍼했다.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카가 슬퍼하게 두었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잉마르가 오두막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슬퍼하게 두었던 외삼촌처럼. 그의 마음이 이제는 이해됐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젠가 조카가 충분히 슬퍼한 뒤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누나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는 것이겠지. 


그날까지는 나도 조카도 일단 사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김보통
만화가, 수필가, 라디오 게스트

책 쓰는 만화가입니다. 저서로는 『아만자』 (전5권), 『DP 개의 날』 (전4권),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살아, 눈부시게!』,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 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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